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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Feb 28. 2023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변화하고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쉽게 오염되기 때문이다. 정희진 작가의 글은 언어의 오염성을 고발한다. 내가 쉽게 사용한 단어에 어떤 규범과 권력과, 심지어는 폭력이 매달려 있었는지 들춘다. 그리고 한자의 뜻을 풀어헤치며 단어가 만들어진 원래의 목적을 뜯어낸다. 거기엔 우리 삶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론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나는 송구해졌다. 겁 없이 시작한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 지금껏 쓰고 있지만, 무게를 느껴온 적은 손에 꼽는다. 저자는 글을 쓰는 자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말한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록자 또는 전달자로서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여긴다. 단순 인용에 덧붙인 "무례와 곡해와 요약의 폭력성을 무릅쓰고... 옮겨본다"는 말 사려 깊음에 감탄했다. 서슴 없이 문장을 만들어온 나의 쓰기가 부끄러웠다. 언어의 가벼움과 글쓰기의 무거움을 알려준 책이다.


저자는 통념을 뒤집는다. 약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대변하고, 약자에 공감한 결과일까. 통념은 강자의 논리였다. 언어의 오염도 마찬가지였다. 단어와 관용구와 속담과 비유는 권력자가 쓰이는 대로 굳어진 결과물이었다. 저자가 뒤집은 정의를 모아 새사전을 편찬해서 필요할 때마다 들춰보고 싶다. 이를테면 '갑을'은 "본디 위계가 아닌 순환"이... 또는 "길을 인생에 비유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길이 있다는 착각을 준다." 나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들판을 달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인생을 길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평탄히 살아온 것도 내가 누려온 권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언어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이는 언어의 한계가 아니라 조건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다른 언어의 가능성(앎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책의 전반에서 현대 사회와 정치와 국가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느껴지는데도 내가 좌절하지 않은 건, 그 불신과 냉소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자가 가능성을 말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다." 마 전, 무엇으로 사냐는 질문을 받았다. 난 기대감이라고 답했다. 미래를 기대하기에 현재에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낙관적이기에 가능성을 기대로 여기는 게 맞다. 난 아직 세상과 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가능성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떡잎이다.


누군가를 추하다 여길 수 있는 무례와 폭력. 그리고 장애인의 분노를 불편해하고 싫어했던 지하철 승객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저자는 다른 이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난 최근의 이슈로 정확히 대체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고질적인 문제를 고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미적 정의를 전복하고, 약자의 분노에 대한 수용을 말하며, 슬픔의 표출을 권유한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꿰뚫는 근본적인 해결책 같았다. 삶이 무의미하고 목적 없음을 지극히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나이를 동등하게 소중히 대하고 생명을 아끼고 죽음에 슬퍼한다. 따뜻한 문장에 눈물이 고인 순간이 여럿 있었다.


역사 수업의 첫 시간에는 항상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등장했다. 이 책을 직접 읽은 적은 없지만, 수업의 요지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올바른 미래를 구축해나갈 수 있다'였다. 이 책에는 여성과 장애와 자살과 우울증과 정치와 노인과 세월호와 4.3 사건... 다양한 키워드가 있었다. 마치 약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 역사를 다시 보는 듯했다. 역사는 기록자의 시각이라며, 차라리 국사가 붕괴되어도 좋으니 여러 문헌 연구가들이 논의한 기록으로 역사 교과서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구절이 있었다. 난 이 저자의 기록이라면 과거를 통해 미래를 세워나간다는 역사 공부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경험이 부족해서, 또는 사유가 부족해서 모르고 외면했던 부분을 눈앞에 들이밀어 주었다. 한 번 읽어서는 체화할 수 없을 것 같아 여러 번 읽으려고 한다. 이렇게 귀한 책을 소개해준 예진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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