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량 Apr 16. 2024

선거철의 회의

선거 시즌이 되면 늘 회의를 느끼곤 한다. 뉴스에서 송출하는 소란은 요란하고 개인의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은 미미해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는 청년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간 낭비 같다. 그들이 하는 말은 비난과 위협뿐이라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지나치게 피로하고 무의미하다. 난 누군가를 편들어주고 싶지도 않고, 둘로 나뉘어 싸우는 것에 가담하고 싶지도 않다.


버스를 타고 큼지막한 사거리를 지나가는데, 한 국회의원 후보가 마이크를 쥐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웅변했다. “우리에겐 …..가 필요합니다. OO당은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진영 싸움에 매몰된 정치다. 개표가 끝나고, 인스타그램 스레드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서쪽은 파랗게 동쪽은 빨갛게 분리된 사진과 함께 “남북으로 나뉘고, 동서로 나뉘고… 무슨 세포 분열하냐.” 우린 왜 서로를 구분하고 못 싸워 안달일까.


공약은 엇비슷하다. 무슨 도로를 깔고, 재개발을 추진하네 마네... 편리와 자본의 증대가 정치의 목적인가? 이미 서울은 편리의 절정 위에 있지 않은가? 지하철 역이 촘촘히 배치되어 10분도 걷지 않을 수 있는데. 물론 이 불평등의 도시에서 누군가는 그 편리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편리 바깥에 있는 사람을 아우르는 방법일까.


공약은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지속해온 발전과 성장을 ‘더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발전주의의 부작용이 쉴새없이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은 ‘밝은 미래’를 언급하지만,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그리고 깊이 분포한 문제들은 잘 언급하지 않는다. 어두운 곳을 비추려 하지 않는데 어떻게 밝아진 사회를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불균형과 소외를 짚어내지 않는 정치는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가? 기후 위기는 누가 언급하는가? 우리는 어떤 세상을 기대하는가? 아무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누구를 뽑으란 것일까. 기권만이 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으면서도, 기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게 발목을 잡는다.


한번은 친구가 안담 작가의 글을 슬쩍 보여준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작가는 기자로 일하는 애인과 자신의 정치를 구분했다. 기자 애인의 정치는 어떤 장관의 말, 국회의원의 행동 같은 정치권의 이야기였고, 안담 작가의 정치는 젠더와 장애와 빈곤 등을 아우르는 소외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그 간극을 이해한다. 난 분명 사회 권력의 메커니즘과 다양성과 불평등을 말하는 치열한 정치를 공부하고 싶은데, 정치에 대한 제도적인 교육은 내가 궁금한 것엔 큰 초점을 두지 않았다. 왜 이 두 정치가 구분되어야 하는가? 정치권의 정치가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권하지 못해 투표했는데, 투표 결과는 둘째치더라도 내가 그 국회의원에, 그 당에 투표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지껏 신경이 쓰인다. 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 청년임에도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이다. 장관 이름 모르고, 국회의원 이름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최근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나의 무관심에 기함했고, 최신의 소식을 알려주려 열변을 토했다. 난 그저 그만 듣고 싶었다. 억지를 부리는 뻔뻔한 얼굴들, 포장으로 가려지는 현실, 해결방안 없는 비난과 투덜거림. 질린다.


누군가는 간절한 표정으로 노력한다. 중요한 문제를 열렬히 언급하기에 시선을 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클지, 얼마나 멀리,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닿을지 생각하면 기대감이 꺾인다. 행동조차 하지 않는 내가 기대감부터 잃어도 되겠냐마는…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