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 엣지러너> - 자본과 힘의 공허
※스포주의
지금으로부터 50년 가량 후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데이비드의 일상을 통해 이 미래 사회의 면면을 보여준다. 집에서 쓰는 세탁기도 충전을 하지 않으면 멈춰 서고, 돈을 들여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며, 보험 가입자가 아니면 사고 현장에 사람이 방치되고, 더 비싼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수술한 가족을 면회할 수 없고, 그렇게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가족이 죽자 자판기 같은 곳에서 유골함을 받아간다. 삶의 모든 흐름이 물신화되었다. 극단으로 치닫은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이곳엔 국가가 보이지 않았다. 교육이나 의료, 건강 보험 등의 공공 복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두 값을 지불한 만큼 서비스를 제공 받는 방식이었다. 공적 권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사적 권력이 채운 세상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며 이미 거대 기업의 힘이 국가를 초월했고, 정부는 자본에 예속되어 기업이나 투자 및 금융 기관이 배를 불리는 데 필요환 환경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사이버펑크는 시장의 힘이 계속해서 비대해졌을 때의 모습을 꼬집어낸 것이다. 미래의 모습이지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자본은 도덕성도 지워냈다. 이곳에서는 살인이 잦았고 처벌 받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은 자본과 함께 무력도 중요했다. 사람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니, 힘과 자본만이 생존의 법칙이 되었다.
그래서 죽음도 가벼웠다. 연출 자체도 죽음을 심각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 잘리고 부서지는 모습을 고깃덩이처럼 표현했고, 뇌가 터지고 피가 콸콸 솟구치는 등 과장된 묘사가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희화화한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로 죽음의 묘사가 사실적이지 않았다. 사이버펑크 특유의 네온 색감까지 더해져 더욱 가상의 죽음 같아 보였다.
죽음에 대한 인물의 반응도 심각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친오빠의 죽음에도 레베카는 분노할 뿐 슬퍼하지 않았다. 물론 엄마 재킷을 입고 다니고 엄마를 늘 회상하는 데이비드나 불같이 화를 내는 레베카 모두 나름의 애도 방식이었겠으나,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인물의 반응을 따라가며 함께 슬퍼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이 이야기 속에 마련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삶이 물신화된 결과물일까.
그런데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죽음이 하나 있다. 바로 데이비드의 죽음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시작한 이후부터 데이비드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의 성장을 함께 하고, 그의 행복을 응원하기도 한다. 할 줄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어린 아이가 조금씩 세상에 적응해가며 많은 것을 갖춰가는 모습은 즐겁기도 했다. 그러다 후반부에서는 아슬아슬한 데이비드의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다가, 끝내 데이비드의 죽음을 목격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 짙은 공허와 허무가 있다. 성장과 이상을 추구하며 애쓰다가 끝나버린 삶의 덧없음이 있다.
데이비드의 죽음이 가리키는 의미는 여럿이다. 먼저 작품 내부적으로 바라보면 인간임을 초월하고자 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결말이다. 근육, 신경, 장기 등의 신체를 기계로 바꾸며 이성을 잃고 마는 ‘사이버 사이코’는 트랜스휴머니즘을 한정없이 추구한 결과로, 인간임을 벗어날 수 없는 그 경계를 설정한다. 데이비드는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다가 더 강한 힘에 의해 죽었다. 힘을 추구하는 자는 힘에 의해 거꾸러진다.
이렇게 신체를 개조하는 사이보그의 개념은 비현실적이지만, 데이비드의 성장과 노력을 현실적인 맥락으로 가져오면 그렇게 낯설지 않다. 계속해서 몸을 기계로 바꾸고 기계의 힘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더 큰 힘과 부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최근에 독서모임에서 자본주의를 멈출 수 없는 건 한번 부를 맛본 사람은 그보다 더 부족한 삶으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끝내 사이버 사이코가 되고 만 메인도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도 절대 ‘down-grade’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린 진화와 성장만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더 약해지는 것/더 빈곤해지는 것을 퇴행이라 여긴다. 끝없는 상승을 바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메인과 데이비드가 멈추길 바랐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욕망은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인가?
그래서 데이비드의 죽음은 자본주의, 계급주의, 권력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 공허를 보여준다. 상승을 추구한 그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다. 강렬한 물음을 던진다. 증식하는 자본, 추앙되는 성장, 그 끝엔 무엇이 있냐고. 자본과 힘이 전부인 세상과 자본과 힘을 쟁취하는 노력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 그래서 데이비드의 죽음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써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미래의 이야기였지만 현실이 보였다. 자본주의가 윤리관을 초월한 세상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는데, 현실의 자본주의가 윤리관 안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블랙 미러>를 보았을 때처럼 역겨운 느낌도 들었다. 그 역겨움은 현실성에서 온다. 지나친 현실감으로부터 파생되는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아마 우리가 자본주의를 제동할 수 없다면 이런 세상을 맞이하게 되겠지. 덧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