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때는 정시 논술을 준비하던 2012년 고등학교 3학년 겨울. 그 많았던 논술 문제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문제는 딱 한 가지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끊어져 있던 손금의 선을 칼로 그어 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제시문 (가)에 약술된 나폴레옹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 하나를 들고, 그 사건과 관련하여 나폴레옹이 언제, 어떤 마음으로, 어느 손금을 바꾸었을지 제시문 (나)의 내용을 토대로 상상하여 서술하시오. 또한 ‘손금’은 나폴레옹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을지 서술하시오. (800 ± 200자)
나폴레옹이 삶에서 겪었던 사건들 - 정말 시시한 것부터 중요해 보이는 것까지 - 이 몇십 개가 있었고 내가 도대체 언제 손금을 그은 건지 어떻게 알라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당황해했던 기억이다.(그렇다. 논술을 객관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적은 답변은 잊어버렸지만 논술 선생님께서 풀이로 알려주셨던 이 질문의 의미, ‘운명 vs 자유의지’가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 ‘운명은 내가 개척해야지’의 마인드셋이 대학,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나의 경험과 성향과 똘똘 뭉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남들이 재미로 본다는 타로나 사주도 정색을 하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내 인생에 대해 말을 해? 네가 뭔데 나를 평가해’라며 받아볼 생각도 안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에서 발견한 나의 모순은 필연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던 내가 우연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호텔 6호실에 머무는 티모시와 일이 6시에 끝나는 테레자 정도의 우연은 아니지만 생일이 같으면 역시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든지, 취미가 겹치면 나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 나아가면, 자유의지로 삶을 개척해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여태까지의 내가 있기까지에 이어져온 점들이 다 그렇게 될 거였을 거라고, 그랬어먄 한다고 믿는 것과 같이 말이다.
다른 분께서는 이런 말을 해주셨다. “모순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을 더 좋게 바라보기 위해 가지게 되신 필터인 것 같아요. 획일성을 요구하는 필연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좋게 해석할 수 있는 우연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요.”
우연인지 필연인지의 문제는 결국 내가 내 삶과 그 속 경험들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두느냐로 귀결되는 것 같다. 태어난 이유는 없고 태어났으니깐 사는 거라고 믿으면서도 한 번 사는 인생 최대한 의미 있게 살아보려 한다. 아마도 평생 이 무게를 저울질하며 살게 될 텐데 그 과정을 충분히 즐기길 바랄 뿐이다.
우리 할머니는 아흔이 넘었다. 할아버지는 십몇 년 전 돌아가시고 혼자 살고 계시다. 청소년 때는 명절 때 할머니 댁에 가기도 귀찮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가족 행사에서 빠졌었는데, 대학 입학 이후로는 명절이라도 절대 놓치지 않고 할머니를 보러 가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최근 2년 동안은 가끔씩 주말에도 가서 잠시라도 얼굴을 뵙고 오고 있다.
우리 할머니는 이제 정신이 온전하지는 않다. 귀가 잘 안 들려서 엄청 큰 소리로 말해야 하고, 이전에 알았던 사실들도 많이 깜박하신다. 오늘 언니는 몇 년 만에 갔더니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다행히도 나는 자주 가서 바로 알아보셨다). 할머니가 혼자 살기도 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 보니 어이없거나 화나는 일도 종종 겪으시는 것 같다.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 왔다가 우리가 선물해 준 이쁜 화분을 가져간다든지와 같은. 비슷한 류의 일들이 몇 년 동안 꽤 여러 번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어떻게 세상에 친구라면서 저런 류의 인간이 있을까 싶어 화도 나고 내가 가서 따져버릴까 하면서 울컥했던 마음이, 엄마와 아빠의 ‘원래 살다 보면 그런 일도 많다 + 그래도 다 내쳐버리고 혼자 사는 게 더 외롭다 + 이런 일들도 있기 때문에 할머니가 더욱 정신을 똑바로 다잡을 수 있다’라는 말에 이제는 무던해지고 잠잠해졌다. 집 안의 물건도, 음식도, 옷도,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경험들도, 할머니의 시간 속에서는 점점 더 작아지고 가벼워지고 있다. 크고 중요했던 의미들은 삶을 살아내간다는 가장 원초적인 목표 앞에 밀려 쪼그라들었다. 90년 넘는 시간 동안 마주쳤던 많은 무거움들이 이제는 다 가볍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렇기에 덧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이자 그만큼 세상을 충만하게 살았다는 뜻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시간의 유한함과 그 앞에 있는 우리의 자그마한 존재를 느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