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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Oct 25. 2018

여성에서 인간으로, 갇혀버린 비극의 역사를 박제하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피에 젖은 저고리를 벗어던지기 위해

※이 포스팅은 우란문화재단의 '우란시선' 첫 번째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고리를 움켜잡았더니 그 안에 친할머니 저고리가 보여.
그 안에 또다른 저고리가 보이고 또 보이고…
그런데 죄다 피눈물에 젖어있으니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될지 모르겠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웹툰 <쌍갑포차> 생굴편에 나오는 대사다. 여성이 여성에게 대물림한 여성혐오의 역사,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 여성들의 삶을 이 대사 한 마디에 축약해놓아서 감탄을 금치 못했던 대사이기도 하다.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강제되어왔고, 종속된 채 통제받아왔다. 대부분의 경우 강압과 혐오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때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다른 피해자를 낳기도 한다. 학습받은 여성혐오의 피해자인 여성들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옳고 또 보호하거나 보호받는 길이라 여기기에 혐오를 대물림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또다른 가해자가 된다. 내가 휘두르는 그 폭력이 아버지의 채찍과 남편의 도끼와 아들의 발길질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는다. 왜냐하면, 우린 여자니까. 그렇게 살아온 여자니까.




# 남성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이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 일을 낯설어하도록 강제해왔다. 남성의 실수는 매력적이고 남성의 방탕과 문란은 매혹적이며 남성의 죄악은 미화되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여성들을 세뇌하고 가르쳐왔다. 남성이 쓰고 남성이 등장하고 남성의 눈으로 본 세계에 익숙해져있는 여성들은 지금도 여성을 인간으로 보는데 익숙치 않다. 슬프게도 나부터 그렇다. 남성에 의해 해석되고 부여된 여성성, 남성에 의해 정립된 여성의 올바름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대를 물려 학습되어왔기에 우리는 그걸 부수고 나아가려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검열하며 도덕적으로 결백하길 바란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100%의 도덕적 완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래야만 <남성과 다른> 우월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성과 달라야 한다,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때 마주한 현실이 남성의 추악함을 벗겨내고 그들이 저지른 과오를 손가락질하는 이 시대에서 여성다움의 근간처럼 여겨지는 명제다. 학습된 여성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는 종종, 혹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결백한 도덕적 잣대를 요구한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는 <남성과 다른> 결벽한 주체성을 형성할 때만 여성만의 올바름으로 규정된다. 슬픈 덫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모든 순간 결벽하고 올바를 수 없다. 여성은 남성처럼 실수할 수 있고, 남성처럼 방탕하거나 문란할 수 있으며 남성처럼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다.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남성을 질투해 죽이고 남성이 남성을 증오해 파멸시키듯 여성도 여성을 질투해 죽일 수 있고 여성을 증오해 파멸시킬 수도 있다.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건 여성이라서,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차갑고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덥고 답답하다. 스페인 어느 시골 다섯 명의 딸과 살고 있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시대와 환경, 사회와 역사가 낳은 여성혐오의 전시장이고 베르나르다와 그의 다섯 딸들은 20세기 초반 그 때 그 시절에 횡행했던 여성혐오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박제된 인물들이다.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로부터 창녀란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베르나르다는 그의 죽음으로 창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기회에 직면한 베르나르다가 선택한 건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아니라 집안을 통제하는 폭군이다. 이제껏 남자에 의해 통제되어온 알바 가문을 여자인 베르나르다가 이끌어간다. '뒷담화를 하는' 여자들을 상대로 콧방귀를 뀌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남들의 허물을 캐는 게 베르나르다의 자기방어인 것처럼, 그는 여자가 창녀 아니면 누군가의 소유물-아내, 부인, 어머니-이라는 이분법으로만 존재하는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딸들을 지키기 위해, 즉 창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위압적인 폭군이 된다. 베르나르다의 집에 존재하는 질서는 전적으로 딸들을 위한 것이자, 궁극적으론 베르나르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베르나르다에게 딸들은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 나의 부속품-어쩌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바라보듯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건 베르나르다 자신이 안토니오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베르나르다는 딸들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딸들의 본능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다. 아니다, 본능을 억압한다는 표현은 오독일 수 있다. 본능은 원래 없는 것이다. 여자에겐 본능 따위 주어지지 않았고, 설령 본능이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젖가슴을 모두 내놓은 채" 남자들과 뒹굴고 남자들이 "기타처럼 만져댄" 로제타 같은 '잡년'들 얘기인 것이다. 창녀, 창녀, 창녀.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 사이 남편의 부속물로 기능해온 여자인 베르나르다의 세계에선 그렇다. (그래서 베르나르다는 극 초반부 꽉 닫힌 문 앞에 서서 내가 결혼하는 날 넘버를 부르며 두 뺨과 사과로 표현되는 여성의 성애적 욕망을 젖가슴을 움켜잡는 동작으로 표현하다가 멈칫하곤 이내 창녀, 창녀…를 읊조리고 떠나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베르나르다를 그렇게 만든 것은 당연하게도, 그 자신은 아니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 여성들에게 주어진 결말은 단 두 가지 뿐이다. 검은 옷을 입은 죄수가 되거나, 흰 옷을 입은 미치광이 혹은 시체가 되거나. '행복해야만 하는' 앙구스티아스나 '유일하게 아버지를 사랑한' 막달레나, '소문 하나 없는' 아멜리아, '남자들이 조롱하고 침을 뱉는' 마르티리오는 베르나르다와 함께 시대의 감옥에 갇혀 죄수로 살아가는, 검은 옷을 입은 슬프고 평범한 죄수들이다. 자기 어머니를 창녀라고 부른 남자를 위해 푹푹 찌는 안달루시아의 무더위 속에서도 긴팔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수를 놓는 죄수들. 하지만 탈옥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고 남자를 원해, 자유롭게 살고 싶어, 본능을 따라 살 거야. 흰 옷을 입고 그렇게 외친 마리아 호세파와 아델라는 미치거나 죽어버렸다. 얼마나 끔찍한 결말인가, 자유를 추구하고 본능을 쫓은 여성은 미친 년 취급을 당하며 뭇매를 맞거나 감금되고, 혹은 손가락질과 경멸, 혐오와 무시에 유린당하며 목숨을 끊는다. 이 끔찍한 학대들이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삶에 미시사로서 존재하고 있단 걸 우린 알고 있다. 그리고 <베르나르다 알바>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박제된 역사들을 무대 위에 펼쳐놓고 눈 앞에 참혹하게 들이댄다. 박제된 여성혐오의 역사와 고난의 서사, 인간으로서 본능을 억압당하고 가축처럼 감금당했던-흡사 발정난 수컷말 때문에 마굿간 안에 갇혀야했던 암컷말들처럼-여성들의 노래와 외침은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한 이 극을 날 것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칼춤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런 서사를 단순히 한 남자를 둔 자매간의 질투가 불러온 참극 정도로 표현하는 건 극에 대한, 그리고 참혹한 역사를 거쳐 생존해 온 여성들을 향한 무례이고 또 실례다.



#다시 한 번 쓰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시대와 사회의 차별과 통념에 갇힌 여성들의 감옥이다. 베르나르다와 그의 다섯 딸들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는 무대 정면에 위치하는 거대한 문이다. 무대에 존재하는 문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굳게 닫혀있다. 가엾은 티브라노의 딸이 처녀수태를 하고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아 죽여 돌밑에 묻은 것이 '하느님의 지시를 받은 양' 그의 집앞에서 발견돼 한바탕 소란이 일었을 때, 뻬뻬가 죽은 줄 알고 정신을 놓고 울부짖는 아델라를 바라보던 마리아 호세파가 소리 없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문은 아주 잠깐 열리지만 진정한 의미로 감옥의 문이 열린 건-그 거대한 문이 반으로 갈라지는 건- 단 한 순간 뿐이다. 바로 아델라가 자살했을 때. 그러니까 여성들을 가둔 억압과 통제의 감옥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더 끔찍한 건 이 죽음이 단어 그대로의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남편을 묶어두고 외간남자들과 놀아난 로제타나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은 티브라노의 딸처럼, 정숙하지 못한 창녀들은 사회적으로 죽음을 당한다. 그래서 베르나르다는 아델라를 '처녀로 죽게'한 거다. 적어도 딸이 두 번 죽는 건 막고 싶어서, 혹은 자신과 남은 딸들의 사회적 동반자살을 용인할 수 없어서.



#극을 보는 내내, 100분 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10명의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됐다가 커튼콜 순간에야 벌벌 떨며 일어나 박수를 칠 수 있었다.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 고조할머니 혹은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 굽이굽이 거슬러 올라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두 얼굴로 살아와야했던 굴절된 여성들의 삶이 100분 동안 나를 짓누르는 경험은 고문처럼 고통스러웠다. 극이 끝나고 베르나르다와 그의 다섯 딸,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로 분했던 하녀역의 두 사람이 극중인물이 아닌 배우 개개인으로 나와 단 위를 걷는 순간에야 마법이 풀린 듯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극을 볼 때 전혀 흐르지 않던 눈물이, 단 위에서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떨던 배우들의 얼굴을 올려다볼 때 갑자기 터져나왔다. 모든 배우들이 퇴장하고 베르나르다 역의 정영주 배우가 홀로 남아 보여주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극 속의 인물들도, 극을 연기한 인물들도, 극을 지켜본 우리 모두는, 마굿간에 갇힌 암컷말이나 검은 옷을 입은 죄수가 아닌 그저 인간이다. 완벽할 필요 따위 없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다르게 취급받아야 할 필요 없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남자나 '총을 잘 겨누지 못하는' 여자가 아닌 그저 인간이니까. 우리의 비극이 <베르나르다 알바>를 통해 박제되는 것은 그래서 가치있다. 21세기의 베르나르다들이 피에 젖은 저고리를 벗어던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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