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밋너 Aug 11. 2022

락으로 다시 쓴 인간의 신화, 경계선의 영웅 아킬레스

뮤지컬 <아킬레스> 초연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초연이 끝난지 벌써 1년하고도 반이 넘었는데, 여전히 뮤지컬 <아킬레스>를 놓지 못하고 질척거리다가 임시 저장글에서 완성되지 못한 채 죽어있는 후기를 우연히 발견하고, 안 되겠다 싶어 예전 고훈정 팬카페(!)에 썼던 후기라도 가져와서 다듬어 놓는다. 


2020-10-07


뮤지컬 <아킬레스>는 우리가 불가사리, 그러니까 불가라고 부르는 MJ Starfish의 창작 초연극이며 2020년 10월 4일부터 2021년 1월 24일까지 동숭동 드림아트센터 2관에서 공연됐다. 코로나19 확산과 맞물려 12월 중순부터 1월 초순까지 공연이 중단되기도 하고, 전석 판매부터 퐁당, 퐁퐁당, 퐁퐁퐁당까지 겪을 수 있는 거리두기는 다 겪느라 유독 뼈아프게 남아 있는 공연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으로 전관을 뛰고 싶다고 생각한 뮤지컬이었으며, 본진에게서 탈덕이 불가능함을 알게 해 준 의미 깊은 공연이었으므로 아마 앞으로도 나는 이 뮤지컬을 계속 곱씹으며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절박했던 그 때 그 시기와 실존하는 폐허처럼 우리를 지배했던 드림아트센터 2관의 공기까지 모두 더해 하나의 공감각적인 체험을 완성하게 해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아킬레스가 있던 그날의 기억들이 이토록 선명하므로. 그리고 지난 7월, 초연 폐막 이후 1년 6개월 만에 열린 아킬레스 투어 인 서울 콘서트를 통해 여전히 내가 이 뮤지컬과 아킬레스로 살아 숨쉬는 본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MJ Starfish 트위터


아킬레스, 신이 되지 못한 인간-그 경계선의 영웅


처음 극의 제목이 공개되고 이어 프로필 사진이 떴을 때부터 과연 이 신화가 나치 집권 하의 그 당시에 어떻게 녹아들 것인가 너무 궁금했다. 아킬레스의 투구, 헥토르의 화살, 파트로클로스의 올리브 가지...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너무나 익숙한 신화의 서사처럼 영웅 탄생의 설화를 담은 넘버 아킬레스가 나와서 신화적 차용이 생각보다 더 많은가보다 싶었다.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자식을 낳을 거라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탁 때문에, 자신도 신이면서 어쩔 수 없이 인간과 결혼해 리귀론(아킬레스)을 낳아야 했던 테티스, 그리고 그런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던 펠레우스, 태어나자마자 스틱스에 담궈져 불멸을 얻을 수 있었으나 끝내 필멸자로 남게 된 반인반신의 아킬레스. 이 관계가 루벤슈타인 가(家)로 어떻게 녹아들지 궁금했는데 군인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사이의 갈등으로 경계선을 치환하는 게 신선했다. 사실 아킬레스 넘버에 신화적인 내용들이 다 들어가있어서 가사 전달이 안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도 같다 싶은 부분도 있었고. 어쨌든 퍼펙트 홈~파라다이스를 거쳐 끝내 어머니 테티스가 떠나고 난 뒤, 홀로코스트의 시작과 게슈타포의 등장으로 격변해가는 아킬레스의 삶 역시 신화적 모티브가 듬뿍 느껴지더라. 물론 트로이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홀로코스트를 그대로 등치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전쟁이 서로 다른 인물이자 같은 인물인 아킬레스라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는지는 예감할 수 있으니까.


아킬레스의 회고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신화 속 인물들과 같은 이름, 조금 다른 역할을 부여 받는다. 어머니 테티스와 아버지 펠레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소꿉친구 데이다메이아,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케이론, 베를린 콘서바토르 음악학교에서 만난 친구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까지. 죽음을 피하고자, 전쟁에서 벗어나고자 숨었던 리오메데스 왕의 궁전은 하인츠 부부의 집-데이다메이아의 방이 되고 신화 속에서 자식까지 낳았던 데이다메이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킬레스와 함께 '멀리 날아간' 친구가 된다. 테티스가 떠난 후 아킬레스를 맡아 기르며 사사한 켄타우로스 케이론은 아킬레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는 스승으로서 역할은 같지만 테티스를 '나보다 더, 내가 사랑한 것들보다 더, 음악보다 더' 사랑한 기억을 가진 인물로 각색됐고.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 역시 신화 속 속성에 더해 조금씩 바뀌어가며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데 이 변화들을 짜맞춰나가는 게 재밌었다. 그리고 굳이 아킬레스여야 했던 이유도 마지막 장면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것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아킬레스-파트로클로스-헥토르 사이의 관계에 맞춰 재단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스틱스강에 아킬레우스를 담그는 테티스(Thetis dipping the infant Achilles into the river Styx), 페테르 파울 루벤스(1630~1635)


신이 되지 못한 탓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영웅의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상처받은 자존심과 회피와 부정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했던 신화 속 아킬레스처럼 극 중 아킬레스도 그런 과정들을 남김 없이 걷는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나치에게 끌려가고, 독일계 유태인이라는 불분명한 경계선 위의 정체성(반인반신처럼!) 때문에 배척받으면서, 자신의 주위로 좁혀들어오는 홀로코스트의 광풍을 '쥐새끼처럼' 케이론이 없는 기숙사에서 숨어 지내다가, 자신을 찾아왔지만 정작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초라해진 아버지를 두려움 때문에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머리로 알면서 가슴으로 답하지 못한 그 때의 아킬레스에게 저항의 수단은 노래가 아니었고, 그저 금서인 하이네와 츠바이크의 책들을 몰래 구해 읽는 것 정도로 자기 당위성을 채우는데 그쳤다. 하지만 아버지를 회피하고 부정한 끝에, 이번엔 자기 눈 앞에서 끌려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에게 던져지는 돌을 피하면서 아킬레스의 가슴에 불씨가 하나 피어올랐고 그게 어린 시절부터 아킬레스를 감싸주고 덮어주면서도 비난하고 자책하던 허수아비 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킬레스가 반인보다 반신으로서 자신을 선택하고 영웅이 된 것처럼 아킬레스 역시 자신이 외면하고 침묵해왔던 현실에 맞서 자신에게 주어진 또다른 재능인 노래로 저항을 시작하는 계기도 되고.


아버지 펠레우스-인간-폭력과 전쟁-으로 상징되는 1층 권총박물관과, 어머니 테티스-신-예술과 평화-로 상징되는 2층 피아노 사이의 경계선인 계단에서만 즐겁게 놀 수 있었던 아킬레스는 지금까지 도망치기만 했던 삶, 무시해온 것들, 침묵하던 시간-나의 적-유죄-로 상징되는 지하 1층 클럽 일리아스와 저항-나의 친구-무죄로 상징되는 지하 2층 백장미단의 전단 작업실 사이 환풍구를 타고 들려오는,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목소리'에 자신의 불꽃을 태우고 당당하게 노래하기로 결심한다. 저항의 시작이고,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는 각오로. 그리고 이렇게 또 다시 아킬레스는 자신의 이름에 합치하는 신화 속의 내러티브로 한 걸음 다가간다.


신화 속에서, 반인반신의 불완전한 정체성 속에서 방황하던 아킬레스는 죽음을 향해가는 영웅이다. 전쟁에서 큰 업적을 세우고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자 미덕이던 때지만 아킬레스에겐 전쟁에서 영광을 얻으면 죽을 거라는 저주와 같은 신탁이 내려졌기 때문에. 전쟁을 피해 리오메데스 왕의 궁전에 숨어있던 이유도 그렇고, 파트로클로스의 호소에도 출전하지 않으려던 이유도 그렇고. 하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깊은 후회와 비탄에 빠져 끝내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앞서 나가 싸워 헥토르를 죽이고 승리한다. 그 후에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치 체제에서 저항하는 것은 반역이며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죽음이라는 처참한 결말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마이크 앞에 서서 독일 국민에게, 그리고 내 적과 친구들에게 고하는 노래를 바친 아킬레스의 영웅성 역시 이 때 완성된다.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용기, 저항에 따르는 희생을 각오한 순간에 나타나는 결연함이 내가 사랑했던 고훈정 아킬레스의 <나의 적과 친구들에게 고함>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서 아마도 가장 좋았던 피날레가 아니었나 싶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획득하는 영웅성은 물론이고 옳은 일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친구'이자 '동지'들에게 보내는 그 모든 감정이 훈킬의 넘버에서 찐하게 울려퍼졌거든. 이 서사의 결말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훈킬의 그 순간을 더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롹(!), 저항과 자유로 다시 쓴 인간의 신화


사실 이 얘기를 쓰고 싶어서 후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킬레스>를 보면서 내내 생각한 건 저항은 인간이 써내려간 역사이자 동시에 하나의 신화라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골자가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킬레스의 이야기는 결국 모든 것이 신들의 장난에서 시작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황금 사과를 던지지만 않았더라면, 수많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창과 칼을 겨누고 싸우는 가운데 끊임없이 그들을 종용하고, 이간질하고 또 장난치는 신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피를 볼 일도 죽음이 들판에 무수히 흩어질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들에게 핑계를 돌리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찾아와도 피와 전쟁은 계속 된다. 신탁이 없어도, 신의 장난이 아니라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황금 사과를 만들어 서로에게 던져 이유를, 구실을, 핑계를 만들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왔고 끝없는 전쟁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다. 물론 그게 옳지 않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서 소리 높여 아니라고 말할 용기를 갖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뮌헨 대학의 백장미단 기념조각


하지만 언제 어느 때나 무겁게 짓눌러 온 침묵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괴물에 가까운 불의에 저항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고했던 백장미단처럼,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며 저항의 메시지를 노래로 쏘아올렸던 1960년대의 수많은 락 가수들처럼.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지만, 언제나 그들에게 휘말려 고통받고 시달린 끝에 절망하고 좌절하거나 끝내 이겨내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것들을 상대로 침묵하지 말 것, 목소리를 낼 것, 끝까지 싸울 것을 외치는 락은 저항과 자유의 코드를 담아서 인간이 쓰는 신화다. 그래서 락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선택하고 신화의 외피를 두른 채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아킬레스>가, 분명 아직 거칠고 덜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이유가 아닐까. 아니, 이건 그런 의미에서 꼭 락 뮤지컬이어야만 한다.


<아킬레스>는 정말 쉽지 않은 극이고, 주인공 아킬레스 역시 정말 쉽지 않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무대 위에서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노래하고, 연기하며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극을 받아들이고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모든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엄청날 것 같다는 생각을 매번 극을 볼 때마다 했다. 의상이나 핸드마이크, 동선 등 여러 가지로 아쉬운 부분들은 많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뚜렷함과 그걸 소화하고자 전심전력으로 노래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상쇄되는 것들이 더 많았던 공연이 <아킬레스>였다. 개인적으로는 극의 구성이나 배경, 그리고 모노드라마처럼 전개되는 방식 등 여러 가지를 보면서 <헤드윅>이 떠오르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와 연기로 극을 이끌어가야 하는 이 무겁고 열정적인 시간을 지나, 언젠가 더 나아가 또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계선 위의 영웅을 다시 한번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재연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는 자신을 잊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