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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Dec 02. 2022

정욱진, 워라밸과 막걸리를 사랑하는 즐거운 배우

2022-11-23, 뮤지컬 <랭보> 인터뷰

막걸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많아요. 흔히 와인은 잘 받는데 막걸리는 안 받는다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이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인정한다. 인터뷰 말미에 막걸리 이야기를 물어봤던 건, 그가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다른 인터뷰에서 봤기 때문에 똑같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뭔가 재미있는 이유나 곁들일 에피소드를 첨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는 걸. 그러나 막걸리 이야기를 꺼내자 아예 눈빛이 달라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람, 막걸리 사랑이 정말 '찐'이다. 

사진 | 라이브, 더블케이 엔터테인먼트 제공

올해 4월, 뮤지컬 <킹아더>의 앙상블 정다영, 이종찬 인터뷰 이후 한동안 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5월부터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패턴이 규칙적이 된 탓이다. 아무래도 대학로(로 대표되는 연극, 뮤지컬) 배우들의 인터뷰는 점심부터 콜 들어가기 전인 3~5시까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인터뷰 한 건 하려면 반차, 혹은 연차를 내야 하는 (직장인에게)험난한 스케쥴이다보니 한동안 인터뷰를 쉬고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에 조금 질려있던 점까지 포함해서 굳이 인터뷰를 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10월 26일, 지인의 초대로 뮤지컬 <랭보>를 봤다. 나는 사실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2차 창작 연극이나 뮤지컬을 그렇게 썩 좋아하진 않는데, 재연 때 한 번 프레스 리뷰로 보고 넘버가 참 좋군... 정도의 기억을 안고 나왔던 극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인이 '볼래요?' 하자마자 '보겠다'고 넙죽 받았다. 이번 3연에서 랭보 역으로 새로 캐스팅된 정욱진에 대한 평가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었다. 관람한 이들의 평을 종합하면, 이번 정욱진의 랭보는 내가 대단히 좋아할 만한 느낌의 랭보(이 모호한 표현이라니)일 것만 같았다.


그리고 120분 동안 정욱진이 연기하는 랭보를 본 뒤, 나는 이 배우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떤 마음으로 이 역할을 맡아 이런 식으로 연기한 것일지 궁금했다. 사실 그는 요즘 무대와 매체를 병행하느라 매우 바쁠 게 뻔한 터라, 인터뷰 일정을 잡을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욱진이 생각하는 랭보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정말 오랜만에 인터뷰를 신청했고, 11월의 어느 수요일 정욱진을 만나 바라던 대로 랭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랭보보다 더 많은 막걸리 이야기도.


사진 | 라이브, 더블케이 엔터테인먼트 제공
내가 만드는 랭보, '내 길'을 찾아간 남자

인터뷰를 앞두고, 그런 질문을 준비했다. 대학로에는 실존인물과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극들이 많다. 그리고 정욱진은 <쓰릴 미>나 <시데레우스>처럼,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극을 많이 연기한 경험이 있는 배우다. 하지만 네이슨, 케플러와 그가 이번에 연기하는 랭보는 또 다른 인물이며 뮤지컬 이전에도 충분히 많은 미디어에서 다뤄지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니만큼 캐릭터를 만드는데 실존인물의 레퍼런스를 어떻게 다뤘을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에게 '랭보'와 (대본으로)처음 만났을 때의 첫인상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의외로 시원시원했다.


"실존인물이니까 인터넷으로 사진이나 초상화 같은 것들도 찾아보고, 그를 다룬 영화가 있으니까 영화도 봤죠. <토탈 이클립스>라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했던 건데요(당연히 나는 알고 있다. 심지어 봤다, 그것도 2n년 전에). 아, 한 10분 보다가 막 넘겨가면서 봤는데 보다 보니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이건 확실히 내가 갈 길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듣자 마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인생,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토탈 이클립스>만한 영화가 또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로미오와 줄리엣> 이전에 <토탈 이클립스>가 있었으니. 그러나 정욱진이 말한 것은 단지 랭보의 미모(!)에 대한 의미만은 아니었다. 디카프리오의 랭보가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예민함과 집착, 지배욕과 광증 같은 감정들을 '오리지널 텍스트'라고 받아들여버리면, 자신의 랭보가 갈 길이 훨씬 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욱진은 바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갈 길은 아니다'라는, 이보다 더 솔직한 답변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그의 답변은 내가 '정욱진의 랭보'를 보고 느꼈던 감정의 근간을 단번에 납득시켰다. 뮤지컬 <랭보> 속 정욱진이 연기한 '랭보'에 대한 문답은 가급적 가감 없이 인터뷰에 모두 실은 이유다. ▶[캐스팅보드①] ‘랭보’ 정욱진, “’14 쓰릴 미’ 이후 이렇게 떨렸던 첫공은 처음” 전문 보러 가기 ▶[캐스팅보드②] 정욱진이 들려주는 뮤지컬 ‘랭보’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들 전문 보러 가기


배우님, 막걸리 얘기하니까 눈에 광기가 도는데요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대학로의 오드 투 디저트라는 카페였다. 마침 그 카페는 박유덕 배우의 데뷔 기념 카페 이벤트가 한창이었고, 매장 한편에 빔프로젝트로 넘버 영상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터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낙산을 뛰어오느라 11월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비친 채 들어선 정욱진은 커피 대신 시원한 차를 주문했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질 무렵 이미 그 차를 모두 들이킨 상태였다. 그러다가 그 자신도 참여했던 <라흐마니노프> 넘버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 모든 행동들이 마냥 유쾌하게 느껴진 건(애초에 불쾌할 수도 없는 행동들이지만) 인터뷰에 응하는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진지하고 솔직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진솔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정해진 틀 안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끌어내는 뻔한 과정인 인터뷰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인데, 어떤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그 인터뷰의 성패가 갈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 1시간 여를 돌파할 무렵 나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무척 성공적이군... 쓸데없이 길게 쓸 필요도 없으면서, <랭보>를 좋아하는 분들이 궁금해 할 만한 내용에 대한 답도 재미있게 나왔고 남은 건 내가 잘 다듬으면 되는 것뿐' 어쩌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질문지를 여유롭게 넘기며, 말미에 붙어있는-대체로 대화의 마무리로 사용하곤 하는 그런 뻔한 일상 혹은 신변잡기적인-질문을 던졌다. "배우 정욱진이 아니라, 일반인-자연체 정욱진으로 지낼 때는 뭘 하고 지내는지, 휴식할 때 주로 하는 것들이나 하루 일과 등이 궁금하다" 나는 이 질문이 불러 올 파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욱진은 알아주는 애주가다. 재미있는 건, 그가 특히 사랑하는 '술'이 바로 막걸리라는 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그는 막걸리를 무척이나 사랑하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의 막걸리 사랑에는 나름 유서 깊은(?)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정욱진의 할아버지가 전라남도 순천에서 막걸리 양조장을 하셨다는 거다. 유서 깊은 '막걸리 사랑' 가문이었던 셈이다.


정욱진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서두에서 인용한 것처럼 "막걸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많다"고 운을 뗐다. 와인은 받고, 막걸리는 안 받고, 이거 말이 안 된다며 열변을 토하는 그의 논지를 정리하자면 '막걸리도 결국 '라이스 와인' 아니냐, 와인과 발효 과정은 똑같다. 그러나 첨가물 없이 발효하는 와인과, 저렴화 정책으로 인해 아스파탐 같은 각종 화학물질이 들어간 막걸리 사이에 차이가 생긴 거'라는 거다. 즉, 막걸리가 안 받아서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막걸리에 첨가된 화학물질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란 얘기였다. 그리고는 정말이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라벨의 성분을 보세요. 정제수, 쌀, 누룩, 이렇게만 들어있는 막걸리는 마셔도 정말 머리가 아프지 않아요." 심지어 정욱진의 이 '막걸리론'은 <라흐마니노프> 때 막걸리를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던 유성재를 1차 막걸리, 2차 와인의 길로 이끌어 다음날 감탄을 자아내는 것으로 이미 검증까지 끝마쳤다. 정욱진은 이 이야기를 전하며 아주 당당한 낯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막걸리는 쌀이고 와인은 포도잖아요. 밥 먹고 후식으로 포도 먹은 거죠." 박수를 안 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술 마실 생각이 없었는데, 배우님 덕분에 정말 술마시고 싶어졌네요." 정욱진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는 그날 <랭보> 실황 촬영 회차 마티네 공연이 있었다.


쓰다 보니 막걸리 이야기만 한 바닥이 됐다. 워라밸 이야기는, 위에 소개한 대로 인터뷰 기사 본문에 녹아 있으니 읽어보시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실 것이다. 아, 정욱진이 추천한 대학로 막걸리집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곧(내년 1월쯤?) 발행하게 될 연극, 뮤지컬 뉴스레터에서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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