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용서, 그리고 벼랑 끝의 자유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는데, 나는 이제 과거와 정말 작별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짜여진 각본 속 이야기가 너무나 얕고 공허하게 느껴지던 시간들이었다. 내 안의 거대한 파도와 싸우느라,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가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
그러다 우연히, ‘은중과 상연’을 만났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관통해 버렸다.
스크린 속 두 여인은, 바로 내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두 명의 ‘나’였다.
상연.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했던 여자. 그녀가 경승주 감독에게 뱉어낸 “상관없는데. 나는 내가 하나도 아깝지가 않거든요”라는 말은, 과거 상처가 너무 깊어 자신을 아끼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던 나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느끼는, 텅 비어버린 자유. 그녀가 “칼을 든 기분.. 난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라고 말하며 느끼던 그 위태로운 희열 속에서, 나는 사랑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미움받는 쪽을 택했던, 상처 입은 내 안의 아이를 보았다.
은중. 때로는 따뜻했고, 인간적이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지키려 애썼던 여자. 그녀가 상연을 향해 내뱉던 “영원히 보잘것없는 도둑년이야”라는 차가운 선언은, 단순히 배신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고통을 통과해 온 생존자가,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세계 주위에 단단한 성벽을 쌓아 올리는 소리였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모든 것을 단호하게 끊어내려는, 나의 처절한 자기 보호의 모습이었다.
이 드라마가 나에게 이토록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나의 인생이 바로 이 두 사람 사이의 길고 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아이(상연)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나(은중).
은중은 ‘미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차이를 안다. 미워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올라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아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녀가 상연을 ‘싫어하려’ 애썼던 것은, 그 지독한 미움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은중과 상연은 늘 말했다. 서로를 이길 수 없다고.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미워했고, 동경하면서도 질투했다. 각자의 삶에 있어서도 서로를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지독하게 얽힌 운명이었다. 그 치열함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고 경쟁하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사랑했던 그녀들. 나는 그녀들의 삶이 결국 화해로 승화되어 서로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는 마지막 모습에서, 비록 쓸쓸했지만 한 줄기 미세한 희망을 보았다.
은중을 배신하고 괴로워하던 상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은중의 엄마를 찾아가 안아달라고 한다. 그런 상연을 은중의 엄마는 그저 말없이 안아준 뒤, 나지막이 말한다. “또 와.”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이 터져 올랐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한 나약한 인간의 고통 그 자체를 온전히 긍정해주는 진짜 어른의 위로였다. 너의 잘못과 별개로, 너의 아픔은 진짜라고. 그러니 언제든 아플 때는 다시 찾아와 울어도 괜찮다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바로 저런 위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가장 추하고 이기적인 모습까지도 판단 없이 안아주는 단 한 사람.
은중은 묻는다. 아직 말하고, 걷고,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왜 그곳에 가냐고. 상연에게는 오빠의 죽음, 엄마의 죽음, 단 두 가지의 끔찍한 죽음만이 존재했다. 스위스를 알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기만의 죽음'이라는 희망을 찾았다. 그래서 답한다. “그럴 수 있을 때 가려는 거야. 내가 아직 나일 때.” 죽음을 매개로 한 그들의 화해. 그것은 상연에게는 “더는 아프지 않고 내가 누군지 아는 채로 죽고 싶은, 고통을 거절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고, 은중에게는 잃어버린 친구를 결국 다시 찾게 된 계기였다.
결국 은중은 상연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기로 결심한다. 아빠의 산소호흡기를 뗀 죄책감에 아직도 괴롭다는 선배 언니가 "그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닐 거야"라고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연을 혼자 보낼 수 없었다.
그녀들의 마지막 선택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나를 버티게 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현애살수(懸崖撒手)'.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
상연은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평생을 붙잡고 있던 모든 집착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은중은, 앞으로 평생을 따라다닐 기억의 무게라는 벼랑 끝에서 기꺼이 손을 놓아버리고, 상연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했다.
내가 많이 힘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며 버텼다. '여기는 벼랑이다. 그래, 차라리 손을 놓아버리자.' 그런데 나는 죽지 않았다. 알고 보니 벼랑이 아니었다. 사뿐히 내려앉을 높이였던 것이다.
상연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한 은중은, 홀로 성당으로 향하며 자신의 결심이 가진 무게를 곱씹는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무서울 줄은. 그곳에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가겠다고 말한 후에야 알았다.’
이 장면에서 나는, 엄마의 항암치료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자신이 피곤하고 지쳤다는 이유로 만만한 언니에게 욕설을 퍼붓던 동생과, 그것을 말리지 않고 외면하던 엄마를 피해 병원 옆 성당으로 도망쳐 한참을 울며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기억이란 이렇게나 끔찍한 것이다. 나의 유년시절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성당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이, 이제 그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매개체일 뿐인 것이다. 이렇게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의 과거와 오버랩되는 많은 부분때문에 괴로워야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서로의 진심을 전한다.
(상연) 정말로 같이 떠나게 되면 진짜 여행을 하는 것처럼 떠나자. 웃으면서. 한 번도 못해봤어. 우리 둘이서 여행.
(은중) 근데 절대 잊으면 안 돼. 나는 끝까지 너랑 같이 돌아오고 싶다는 거. 여행이 뭔지 알지? 떠났다 돌아오는 거야.
그들의 애틋한 대화 앞에서,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연과 그 모든 것을 용서한 은중의 모습에서, 나는 암으로 스러져간 엄마와 이모를 떠올렸고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에 한참을 통곡하고 말았다. 그것은 드라마이자 판타지였다. 현실에서는 가족 누군가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더라도 각자의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집착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아직 젊은 상연과 같은 수많은 암 환자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슬펐다.
엄마의 마지막을 지키려 간병휴직을 내고 병원 근처 바닷가 마을에 빌라를 구해, 가족 간의 화목한 시간을 꿈꿨지만 결국 가족의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어둠만을 확인한 채 상처로 끝나버렸던 나의 현실. 마지막 순간까지 돈 문제로 엄마를 괴롭히던 아버지의 모습. 드라마 속 은중은, 내가 엄마에게 그토록 해주고 싶었지만 끝내 해줄 수 없었던, 그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지막을 대신 선물하고 있었다.
과거, 은중이 상연에게 던졌던 가장 모진 말. “누가 너를 받아주겠니?” 그 저주 같던 말은, 마지막 순간 상연의 깨달음으로 되돌아온다.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 끝내, 네가.”
이 드라마는 나에게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소환시키는 고통인 동시에, 화해의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이치가 적용되지 않는다. 드라마이기에 상연이 암에 걸리고 죽음을 맞이하지, 현실은 오히려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낸 사람이 암에 걸려 고통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은 그랬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지옥을 안고 살아간다. 타인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겉보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여도 내면의 지옥이 어떻게, 얼마만큼의 무게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들 적당히 감추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상연의 위태로웠던 삶, 상연의 배신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야만 했지만 또 자기만의 인생을 개척했던 은중의 삶. 그녀들의 치열했던 삶을 통해 또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