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시계의 추억

29살, 주특기는 추억팔이입니다.

by 김아릿
지나가버린 아득한 과거의 가라앉은 감동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건넨 충고이다. 사랑이나 평범한 주제 말고 본인 고유의 색을 내는 방법을 일러주는 내용이다.


이 말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나의 주특기는 과거 회상.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 미래에 대한 거대한 비전이나 놀라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자신 없다. 대신, 기억하는 것은 잘하고 좋아한다. 릴케 별 거 아니네 하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은 생리통 때문에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태블릿으로 영상을 보는 것도 지겨워 옆으로 돌아누웠더니 벽시계가 보였다. 어렸을 때 큰 방에 걸려있던 벽시계가 생각났다. 원목으로 둘러싸인 원 모양의 평범한 시계였다. 초침이 로마자로 쓰인 숫자들을 지나칠 때면 똑딱똑딱 소리가 꽤나 크게 났다.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이 신기했다. 시침은 저렇게 느리게 움직이는데 도대체 어느새 다음 자리에 옮겨가 있는 거지? 시침이 움직이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감시를 했다. 멀리에서 손가락을 시곗바늘에 겹쳐대어 움직이는 각도를 재보기도 하고, 분침이 매 분마다 딸깍 움직이는지 체크하기도 했다. 특히 분침이 30분을 지나가면서부터 시침이 다음 시에 가까워지는 것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주로 4시 30분 정도였는데 갑자기 4에서 5로 옮겨간 시침을 보며 ‘내가 왜 또 놓쳤지?’라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다. 시곗바늘은 성실하게 움직였고 나는 끈질기게 쫓아갔다. 침대 위에서의 조용한 술래잡기는 종종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늘 시곗바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우리 집에도 옆 집에도 다 있었던 그 시절 시계.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 없거든.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20살. 사랑과 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디게 가는 시간이 그렇게나 원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버리기만을 바랐다. 결국 혼란은 지나가고 정서와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일상에 안주하며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나의 시침은 3에 가까워져 버렸다.


그렇다. 20대라는 시간 역시 나를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시간은 인간을 집어삼키고, 그 앞에 놓인 우리는 유약하다. 시간은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다. 자기 계발서에서 종종 보이는 시간을 아끼는 방법 같은 건 안타깝지만 허상이다.


찝찝한 생리통과 함께 씁쓸한 결론만이 찾아왔다. 릴케는 분명 과거를 통해 가라앉은 감동을 끌어올려 보라고 했건만, 글쎄, 감동은 없고 현타만 세게 온다.

Saturn Devouring His Son(1636), Peter Paul Rubens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K-장녀는 질 수 없다. 술래잡기에서 스피드가 안되면 못 잡는다. 속도로 시간을 앞지를 순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질 게임을 하지 말자. 365일이라는 제한시간은 같다. 그동안 쫓고 쫓기는 놀이 말고, 더 재미있는 것을 하면 된다. 말 그대로 '시간이 (앞서) 가는 줄 모르게' 살면 된다.


대학 시절 가깝게 지냈던 모 교수님께서 몇 달 전에 전화를 하셨다. 취직해서 살고 있다고 하니 대뜸 "글은?"이라고 물어보신다. 취미로만 혼자 쓰고 있다고 하니 "OO. 너는 글을 써야 돼." 한 마디 하셨다.


경제학과생이었지만 문철학 수업을 쫓아다녔던 그 시절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가장 즐거운 한때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20대, 다시 한번 글을 써보아야겠다. 남들 앞에서, 내 이야기로. 추억팔이라는 주특기를 살려서.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서 30이 왔을 때 시간에 지지'는' 않았다고 우겨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