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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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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01. 2017

화양연화

창작소설/단편소설 04

 남자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여자를 잃어버렸습니까?”


 남자의 잃어버렸다는 표현에 잠깐 머릿속멍해졌다.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녀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남자와 함께 검은 돌문으로 들어서자 다 쓰러져가는 돌기둥 앞에 무희로 보이는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다. 신전 앞에서 서서히 움직이듯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돌기둥에서 빠져나온 데바타들이 춤을 추고 있다. 마치 살아있는 압사라의 춤처럼 그들 아름다운 데바타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손을 탄 때문일까? 유독 그들의 얼굴과 어깨, 가슴같이 도드라진 부분의 색이 유독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꽃 봉우리처럼 도드라진 여신들의 젖가슴과 잘록하게 뒤틀어진 허리. 그녀의 것인 양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래 힌두의 신전에는 남근석을 상징하는 링가와 우주의 대지를 상징하는 요니를 한데 모셨다고 해요. 음과 양은 영원히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의 합일이 곧 삼라만상의 완전함을 의미했겠죠. 분리되어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그러니 나를 가져도 가지는 것이고, 나를 갖지 못해도 이미 가진 거나 다름없어요.”


 그녀를 처음 품에 안던 날 밤,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등을 꼭 껴안으며 그녀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녀는 이 많은 앙코르와트 유적에 얽힌 사연들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화양연화’라는 영화 때문이었나? 아님, 나 때문? 분명 그럴 것이다. 나 때문이었겠지.


 누군가의 짓꿎은 장난인지, 간절한 염원 때문인지 만져지고 깨어져 가슴 한 쪽이 다 떨어져나여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거 같지 않소? 화랑 내벽의 신비가 시작되는 시간은 바로 저녁노을이 첨탑에 걸리는 시간입니다. 압사라와 데바타들의 군무가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고, 그때야말로 비로소 사원에 경건한 신비가 찾아오는 시간이죠. 아마 모르긴 해도 당신의 여인도 이곳에서 비밀을 묻었을 겁니다.”


 남자는 마치 양조위가 사원의 구멍에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흙으로 봉합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한 말투였다.


 그거 알아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구멍을 만들고 자기 비밀을 속삭인 뒤 진흙으로 봉했다고 해요.”


 말하지 못해 그의 가슴에 사무쳐 화농이 되어버린 비밀의 말이 그 구멍 안으로 흘러들어가 진흙으로 봉인이 되고,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로하듯 그 봉인된 자리에 파란 싹이 돋아나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럼, 그 신비의 시간까지 기다리는 수밖없겠군요.”


 남자와 헤어져 해가 지기까지 사원 안을 미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우연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건 두 사람이 서로의 운명이 되는 길을 함께 선택했기 때문이에요. 화양연화란 우연 위에서는 절대로 싹틀 수 없는 것이죠. 운명이 되어야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 차우와 리첸이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나 그들은 이미 운명이었음을 영화 제목이 말해주고 있잖아요. 나도 그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그때까지도 영화를 보지 못했던 난 그녀가 하는 말들이 늘 물음표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를 걸어다녔을까? 몸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 싶을 즈음, 평소에 그녀가 독백처럼 한 번씩 툭툭 내뱉곤 했던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의 정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난 알았다.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나를 떠나리란 것을. 다만 애써 외면하려했 뿐이었다.


 어둠이 조금씩 앙코르와트 사원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이쯤이던가? 아님 이쯤? 지난 밤 숙소에서 영화를 좀 더 꼼꼼히 봐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마음이 초조해지자 손과 등줄기에 땀이 배어났다.

붉은 색 도포를 입은 승려 한 명이 합장을 한 채 기도를 하고 있다. 무작정 그가 있는 사원의 기둥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이 일러준대로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인사를 건넸다.


 여행객이신가 봅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근데 아까부터 보니까 석상들을 뚫어져쳐다보고 계시던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무슨 사연인진 모르겠으나 떠났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면 그대로 두는 게 순리이지요.”


 이곳에 오래 계셨습니까?”


 그럼요. 한 20년쯤 되나?”


 19c 프랑스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이 거대한 유적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암흑 속에 갇혀있었을까? 누군가가 찾아내주기를 간절히 바라진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 역시나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이는 동안 간절하게 내 손길기다렸을지도.


 노승의 주름진 얼굴이 사원과 함께한 세월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 했다.


 그럼, 혹시 예전에 양조위라는 영화배우가 이곳에서 영화 촬영을 한 걸 기억하십니까? 혹 그 장소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러게 한 10년쯤 됐나? 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만.


 "한 이 쯤 될 것 같네."


 노승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쫓아갔다. 검버섯이 핀 것처럼 여기저기에 검은 물이끼가 낀 사원의 기둥 좌측으로 압사라들이 춤을 추고 있다.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한 기둥 곳곳에는 그렇게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세상의 비밀을 다 들어주기위해 저 많은 구멍이 필요했을지도.

노승이 합장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구멍 속 여기저기를 미친 듯이 훑기 시작했다. 마치 그곳에 그녀의 흔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그곳에 비밀을 묻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기둥의 구멍 한쪽에 얼굴을 붙이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구멍을 가린 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비밀을 들었나요?”


 기둥은 말이 없었다. 어느새 나지막하던 중얼거림이 흐느낌으로 변했다.


 아, 그녀가 여기에 왔나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깨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애초부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떠난 길이었다. 그럼에도 분노가 서러움으로 바뀌고, 서러움이 절망이 되어 떨어졌다. 설령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언정, 찾는다 해도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란 걸.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 기둥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 늦으셨네요. 하긴 앙코르와트 사원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하우스 주인장이 반갑게 말을 건네왔다.


 " 혹시 이런 동양여자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 아, 이 여자분?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 머무셨습니다. 근데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거라고 하면서, 이걸 건네주더군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내게 건넨 것은 직사각형의 하얀 봉투였다. 봉투를 받아드는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 이 여자가 여기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언제였습니까? 다른 말은 않던가요?"


 갑작스럽게 쏟아내는 나의 질문들에 놀랐는지 남자의 동공이 커졌다.


 " 아니요. 그냥 어떤 남자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만 하더군요. 아마 들리는 말로는 이 근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도 들렀던가 봅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어떤 남자가 자신을 찾아오면 주라고 똑같은 봉투를 하나씩 남겼다고 하더군요. 그땐 그냥 무슨 사연이 있는가보다 그렇게여겼는데...... 그분이 찾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앙코르와트에 가면 비밀 궁전이 100개도 넘는 거 알아요? 그리고 앙코르와트 사원이 크메르 문명의 영광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서글픈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녀가 그 질문을 할 때 멍해 있었던 것처럼 남자의 말에 둔기로 머리를 맞은 사람마냥 또다시 난 멍해졌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건 말이에요. 캄보디아의 그 많은 사원들 중에서도 유독 앙코르와트 사원만이 서쪽을 향해 있기 때문이에요.”


 서쪽으로 지어진 게 왜 서글퍼? 그건 그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쪽은 사물이 저무는 방향이잖아요. 수르야바르만 2세가 이 사원을 지을 때 이미 그는 왕조의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은 해가 저물 때 이 사원은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점이에요.”


 그건 억지일 뿐이야.”


 화양연화란 말 뜻을 물은 적이 있었죠?”


 룸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겉봉을 뜯었다. 8등분으로 곱게 접힌 편지 한 장과 사진 한 장! 들고 있는 그녀가 남겼다는 마지막 메시지와 회색 도포를 입은 까까머리의 낯선 그녀 사진이 손아귀에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긴머리를 싹둑 자른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 편안해보였다. 사원의 석상에서 튀어나와 춤을 추던, 살아있는 압사라 같은 여신이 사진 속에서 평온히 웃고 있었다.


 

 너무나 빛나고 찬란했던 내 인생의 화양연화,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이에요. 내가 언젠가 그랬었죠?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땐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이 바로 그 때에요. 당신은 나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어요.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도 내 몫이고, 떠나야 한다면 그것 역시 내 몫이에요. 그리고 지금 난 내 몫의 그 일을 하려고 해요. 앙코르와트 사원의 역사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서글픈......


 하지만 앙코르와트 사원의 역사가 과거에 묶여있는 화양연화였다면, 제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가 될 거예요. 아니 그렇게 되게 만들 거예요. 과거가 아닌 당신과 영원히 쭉 함께하는 미래 속에 바로 제 인생의 화양연화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난 조금도 슬프지 않아요. 혼자 떠나는 이 길이 조금도 서글프지 않아요. 내가 없음에도 당신이 앙코르와트에서 날 찾았던 것처럼, 우린 함께 있지 않아도 결국은 함께 있는 거예요.

 이제 난 신에게로 돌아가려고 해요. 앙코르와트의 데바타처럼.....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려는지 어두웠던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에서 양조위는 무슨 고백을 했을까? 사랑함에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함에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의 고해성사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그대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고, 그대를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고 처절한 절규 마디였을까?


 숙소 창밖으로 빗줄기가 더욱 더 굵어지고 있었다.


 절제를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추할 뿐이에요.”


 그녀가 나를 떠나기 전 던졌던 마지막 한마디가 게스트하우스 창문에 빗물처럼 어룽지고 있었다. 미래로 가는 시간의 문이 열리면 그곳에서 한송이 꽃처럼,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화양연화였다고......


 

The End.


* 위의 단편소설은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가 소설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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