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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12. 2017

<화양연화>와 <냉정과 열정 사이>의 감성을 잇다

영화 '남과 여', 사랑이라는 이름의 평행선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가 정상적인 이성에 의해서만 작동되는 곳이라면 많은 문제들은 실상 일어날 이유도, 그럴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 안에는 항상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스위치가 동시 가동 중이다.

우리의 인생은 대개 이 이성의 스위치가 on 상태로 감성의 스위치를 눌러주기에 일상에 특별한 문제가 생긴다해도 그것은 이성의 스위치에 의해 대개는 컨트롤이 가능한 양상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스위치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경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영화 <남과 여>는 이성의 스위치에 빨간 불이 들어온 두 남녀의 메마른 감성의 밑바닥 아래를 헤집어 아직 죽지않고 깨어있는 감각 한 올을 현실이라는 수면 위로 처절히 끌어올린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 영화의 최루성은 조금도 인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감성마저도 오롯젖게 만든다.

이성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일상의 세계, 그 좁고도 어두운 내면 속 균열의 틈바구니를 뚫고 집요하게 감성을 뒤흔든다.



핀란드 헬싱키, 일상성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의 한시적 자유




    기홍(공유)과 상민(전도연)이 처한 일상의 세계는 건조하다못해 쩍쩍 갈라질 정도의 메마름 속에 던져져 있다. 그들 세계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아이들의 병적 증세는(자폐와 우울로 보이는) 실상 그 아이들의 세계를 지탱하느라 힘에 겨운 기홍과 상민, 두 사람의 심리적 병리 증상과 다름 아니다.

이 영화의 주 공간적 무대가 되는 핀란드의 헬싱키는 바로 이런 마음의 병을 지닌 두 사람이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잠시 잠깐의 해방구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속 풍경을 연상케하는 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인물들의 일상성과 그들이 처한 일상세계를 파괴시킨다. 이 영화에서 계속 상민이 시계를 보는 이유, 그럼에도 일면으로는 그 시간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심리는 현실의 지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망각하고 싶은 인물의 내면을 대변한다 보여진다.

또한 흰색과 검은색만이 지배하는 이 영화의 절대적 색감을 차지하는 이런 무채색이 그리는 풍경은 두 인물들의 내면 속 풍경과 유사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들의 내면은 칼라처럼 강렬하지도, 아름답지도, 휘황찬란하지 않다.


거기에 그 묵직하고도 진득한 모노톤의 화면과 뒤엉킨 피아노와 바이올린, 피아노와 첼로가 어우러진 묵직한 선율은 영화 <화양연화>의 그것처럼 절제미를 동반한다.

물론 흔히 말하는 남녀 간의 진도상으로 보자면, <남과 여>는 확실히 화양연화보다 더 폭발적이며 감정의 표현 방식 역시 좀 더 두드러진 직접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왜 기홍과 상민이 어떤 개연성없이 서로에게 끌리게 되었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런 설명조차 필요없을 정도의 낯선 세계가 주는 비현실적 세계와 직감적으로 알아본 서로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유사한 소재를 두고 이 두 영화(남과 여와 화양연화)는 그것을 표현하는 상이한 색채와 표현 방법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사한 슬픔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낯설지 않으며 이질적이지 않다.


   아이의 심리치료를 위해 먼 세계로 온 기홍과 상민의 일상은 아이들이 캠프를 떠나 있는 동안 이들 두 사람을 억압시키는 기저들이 일시적으로 소멸되는 지점에서 극적으로 분출되는 양상을 띤다.

그동안 자신들의 감성과 감정을 꽁꽁 가두고 있던 세계로부터 놓여난 이들이 현실의 감옥으로부터 유한의 자유를 획득하는 지점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감정의 발화점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언제든 다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유한의 자유만이 허락된 한시적 세계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세계는 한시적인 여행자로서의 세계이며, 이는 서울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상민의 아들 종화와 함께 간 한 바닷가 앞에서 나누는 대사를 통해서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난다. 어떤 이와의 만남이나 사랑이 여행과도 같다는 것은 결국 어느 순간엔가 되돌아가야 하는 집(가정)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여행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이들의 사랑(설령 한 순간의 해방감과 격정이었다 하더라도)이 왜 불꽃 같은 양상으로 타오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바로 조만간 되돌아가야할 현실의 감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며, 그들의 그 자유란 실상 영구적인 사면을 의미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그들의 생은 여전히 그들 앞에 지독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그들 두 사람을 향해 어서 다시 오라고 손짓 한다.



서울,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그 일반적인 양상


    8개월 후,

기홍과 상민은 서울에서 다시 재회 한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울로 돌아온 순간 이들을 지배하는 세계는 비현실이 아니라 다시 현실이며, 그 세계는 어둡고 메마르지만 그럼에도 버텨내야만 하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상민에게는 여전히 그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 종화가 있고, 직업인으로서 감당해야만 하는 고충이 있으며, 아들 문제로 서로 갈등하는 남편이 있다. 적어도 관객입장에서 보기에 상민의 세계 안에는 남편은 존재하지만 그 남편과 아빠의 기능과 역할이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세계처럼 보인다.

그 속에서 그녀는 홀로 힘겹고 외로운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기홍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홍에게 있어 돌봐야할 대상은 우울증에 걸려있는 어린 딸 유림만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덜컥 엄마의 짐을 떠안게 된 기홍의 아내는 아픈 딸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벅찬 인물로 비춰진다. 자신이 케어해야할 대상이 아이와 아내, 두 사람인 기홍의 현실의 무게는 어쩌면 상민의 그것보다 더 위태로운 수준으로 보이기도 한다.


   세차례에 걸친 남과 여의 공간적 무대의 이동(핀란드 헬싱키 ▷서울▷ 핀란드)은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의 변화를 단적으로 담아내며 이 영화의 플롯을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한다. 공간의 이동과 함께 달라지는 인물들의 내면과 선택은 각기 상이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핀란드에서 격정적인 육체적 사랑을 맺은 이들은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로 헤어진다. 헤어지면서 상민에게 아직 서로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는 기홍의 말에 상민은 그저 그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았을 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도 그렇다고 그 이름을 애써 묻지도 않는다.


   그러나 무대가 핀란드에서 서울로 바뀌는 지점부터는 말그대로 애달프고, 그립고, 뜨거운 사랑의 그 일반적인 타오름의 양상을 그대로 닮았다.

그저 잠깐이라도 함께하고 싶고, 보고 싶어 상민의 출장길에 무조건 동승하는 기홍의 모습이나 서울로 올라간 기홍을 뒤쫓아 서울로 향하는 상민의 모습은 이미 현실의 자기장으로부터 탈주한, 폭발하는 인물들의 감정의 분화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더이상 이성이 동작하지 않는 세계로 들어선 듯 보이는 이들의 일탈은 실상 여전히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아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마치 현실이라는 수갑이 채워진 인물들의 그것처럼 부자연스럽다. 그 수갑에서 자유로워지려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손목을 더 옭죄어오는 상황...


   이 영화를 불륜이라는 시선으로 가두기엔 너무나 먹먹하고 가슴 아픈 것은 결국 서로가 사랑했음에도 그들 두 사람의 이성과 감정의 스위치가 동일한 양상으로 켜지지 않은 그 어긋남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린 쪽과 차마 그러지 못한 쪽의 어긋남.

영화는 실상 이 두 사람의 최종택의 다름에 대한 여러번의 암시를 내비친다. 그것은 주로 상민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지켜내고 싶은 것과 지켜내야하는 것들 사이에서의 선택의 어긋남



    1년 후, 다시 핀란드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지금까지 개봉된 수많은 국내 멜로 영화들 중에서도 단연 기억에 남을만한 인상적인 숏을 보여준다.

공중에서 잡은 설원을 달리는 기홍의 차와 좌우로 도열한 전나무 숲의 부감은 마치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닌 비현실적인 세계로 보이게 만들며, 이 차갑고 서늘한 무채색 풍경은 멈춰선 상민이 탄 택시를 쫓는 기홍의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눈빛과 안타까운 시선과 충돌하며 슬픔의 정점을 찍는다.

기홍의 가족의 모습을 확인한 상민이 홀로 카페문을 쓸쓸히 나서던 순간, 택시 안에서 서럽게 눈물을 터뜨리는 상민의 무너짐, 그들이 함께 했던 그 겨울 헬싱키의 호수의 설경 앞에서 슬픔에 얼룩진 담배를 피워문 상민의 모습은 모든 이성의 스위치를 올스탑시킬만큼 감성을 뒤흔들만한 성질의 것이다.


   어떤 선택인들 버리는 쪽을 향한 아픔을 동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떤  선택인들 회한이 없을 수 있을까?

다 버린 쪽과 버리지 못한 쪽, 감정적으로 지켜내고 싶은 것(사랑)과 이성적으로 지켜내야만 할 것들(가족)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렸던 쪽의 선택의 어긋남.

통속이 통속이 되지 않게 흐르도록 만든 두 배우의 연기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설득력과 면죄부를 주게끔 만들만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무뢰한>에 이어 다시 한 번 전도연이 왜 전도연인지를 입증하는 이 영화의 모든 러닝 타임을 지배하는 배우 전도연의 절제된 내면 연기와 작년 자신이 출연한 세 편의 영화(남과 여, 부산행, 밀정)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공유의 조합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소재와 도덕적인 결함을 지닌 이들 인물들의 행위조차도 설득시킬만한 위력을 발휘한다.



    아름다운 핀란드의 설원 풍경, 인물들의 안정적이고도 절절한 눈빛 연기, 거기에 냉정과 열정 사이와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적인 백그라운드 음악은 이 영화의 통속성을 애잔미로 치환시킨다.  적어도 영상과 음악, 연기면에서 이 영화의 미학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다.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진하고도 무거운, 첼로와 어우러진 피아노 선율은 <냉정과 열정 사이>의 'Whole Nine Yards'의 감성이나 <화양연화>의 그것에 못지않다.


흥행 실패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이 영화만의 진한  뒷맛을 느껴보고픈 분들에게 한 번쯤 보시라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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