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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21. 2017

권력이란 이름의 메커니즘

우리가 지닌 결정적인 키(Key)


사람들은 자존심을 버리면 비참해진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자존심을 버리면 비참해지는 게 아니라 비굴해지는 것이며, 자존심을 세우면 세울수록 비참해진다.

마치 태수(조인성)가 처음 펜트하우스에 입성해 검사, 언론인, 심지어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그들 권력자들의 더티한 유흥행각을 보며 냉소를 보이다 한강식(정우성) 부장검사에게 얻어터지며 깨닫던 것처럼.


태수가 한강식 라인을 타는 댓가로, 즉 검사로서의 양심과 개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린 댓가로 그는 권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권력의 비열함을 눈감아야 하는 비굴한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생의 아이러니 아닌가.

권력을 얻는 댓가로 권력에 아부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한강식의 말대로 우리의 역사가 이미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라 부르는 그들은 대대손손 권력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반해 독립유공자들은 기껏해야 60만원짜리 연금에 의탁한 채 살아가야 하거나 그것마저도 인정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시절이 하수상할 때 가장 좋은 생존전략은 역사가 증명해준대로, 한강식의 말처럼 권력에 줄을 서서 스스로 그 역사가 되는 길이 현명하다.


태수가 자존심을 세웠다는 이유로 한강식에게 얻어터지면서 얻은 깨달음과 ×같은 기분은 더럽게도 강식의 말이 다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자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이 될 수 없다면,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 진정한 1%의 권력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면 강식의 말처럼 촌스러운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권력에 줄을 서서 역사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일이 현명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그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만도 없다. 우리의 역사가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껏 작동되어왔기에.


부당거래, 내부자들을 통해 이미 예방주사를 맞고 사전에 면역력을 키웠음에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과 권력의 비열함, 인간의 모순, 생의 아이러니를 목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더 킹>은 <부당거래>나 <내부자들>이 갖지못한 유머와 활력을 통해 이 모순과 아이러니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름 돌파구가 있고 해법이 있음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더 킹의 오프닝은 후반부 시퀀스와 합치된다. 그리고 이 두 시퀀스가 바로 더 킹의 서사의 현재시점이다.

안동 하회탈이 대마의 껍질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질펀하게 웃고 떠드는  세 사람(강식, 동철, 태수)이 탄 차량이 빗 속에서 어떤 차량에 들이받히며 360도 회전하는 순간 자신 앞에 닥친 죽음을 예감한 태수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과거 시점으로 플래시백된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고 지옥 간다던 엄마의 말을 복기하는 태수의 내레이션은 이미 자신이 뭔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며 잘못을 저질렀다는 시인에 기반한다.

때문에 이 오프닝 장면은 후반부 이 장면과 합치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영상을 과거시점으로 다시 되감는 방식으로 이런 태수의 후회를 대변한다.


"그 때 내가 그 xx를 구속시켰더라면, 그 여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더라면..."


그러나 태수의 깨달음처럼 그런 후회는 다 부질없는 짓이다. 차라리 후회할 시간에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며 또한 이성적인 선택이다. 영화 말미 태수가 정계로 뛰어드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것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 학교 일진이나 다름 없었던 태수가 x만한 검사한테 양아치 아버지가 얻어터지는 걸 목도하며 권력의 필요성을 깨닫는 이치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권력이란(보다 정확하게는 태수의 눈에 포착된 권력은 검사이다)무고한 사람들을 감방에 처넣을 수도 있고, 16개월형을 8개월형으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킬 수도 있는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도, 반대로 살릴 수도 있다. 권력이란 전지전능한 무엇이 아니던가.  


전두환(82~87) ▷ 노태우(87~92)▷ 김영삼(92~97)▷ 김대중(97~2002)▷ 노무현(2002~2007) 대통령의 서거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시점까지 거의 5대 20년 이상의 세월을 관통하는 더 킹의 시간적 서사는 이들 권력의 교체시마다 그 하위 권력자들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적확하게 들여다보기 한다.


권력에 줄을 서서 상위 1%의 세계에 진입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권력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위 99%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권력이 비정하고 비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야만 자신들의 목숨을, 그리고 자신이 속한 조직을 지켜낼 수 있는 권력이란 이름의 생리 때문이다.

이슈는 이슈로 덮고, 받은만큼 복수로 되돌려주고, 제 아무리 대한민국이 덜썩덜썩할만한 사건의 진실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터뜨리지 않고 잘 익을 때까지 묵혀두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해야 그 권력이란 놈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 그 생리를 꿰뚫어보는 사람들이다.


터뜨려야 할 때와 묵혀야 할 때를 잘 구별하고 더 센 여론으로 기존의 여론을 덮으며 자신들이 불리한 시점과 유리한 시점을 명확하게 구별해내 적절한 행동양식을 취사하는 것이다.

또한 권력은 또 다른 권력과의 연대와 규합으로 그 세력과 몸집을 키운다.

이는 약자들의 연대와는 또다른 성질의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제 아무리 결속을 하고 연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꼴이지만, 권력자들의 연대는 점점 더 끊어내기 힘든 쇠사슬이 되어간다. 설령 신변의 위협을 느끼더라도 그들의 뒤를 봐주었던 하위 권력자들의 꼬리를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권력의 몸통은 늘 그대로이며 잘려나가는 것은 늘 힘 없는 권력의 약자들 뿐이다.

안희연 감찰부 검사가 한강식의 비리를 파헤치며 숨통을 조여오자 한강식과 들개파 두목 응수에게 가장 먼저 타깃이 되는 꼬리가 두일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영화 더 킹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내부자들이 단순히 한 개인의 사적 복수심에서 시작된 내부고발이라면 더 킹은 권력이란 이름의 시스템 그 자체, 즉 권력이란 이름의 메카니즘을 들여다보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중심에 검사들이 있고 그 검사들의 중심축에 바로 정우성이 연기하는 한강식이라는 캐릭터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더 킹 속 권력의 구조는 한강식(정우성) ▷ 양동철(배성우) ▷ 박태수(조인성)▷ 최두일(류준열) 순으로 피라미드화 되어있다.

이들 권력의 시스템이 주로 위로는 정, 재계 인사 그리고 그 최종 하위 권력자로서 조폭 같은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이유는 정재계 인사들은 권력의 동아줄이요, 조폭은 권력의 든든한 뒷배인 까닭이다. 그들은 동아줄을 잡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조폭을 두고 그들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뒷배로 이용한다.


권력이란 애초에 수평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상명하복의 수직적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태수가 검사가 되고나서도 촌스러운 자존심과 검사로서의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이 1%의 진정한 권력자의 세계로 진입했지만 이 세계는 그저 휴일도 반납한 채 서류더미에 파묻혀 살아가야 하는 법률서비스 공무원일 뿐인 99%의 평검사들의 세계보다 더 치열하고 비정하게 작동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온갖 궂은 일, 더러운 사건들은 이들 권력자들의 하위 끄나풀인 조폭들인 응수나 두일이 말끔히 처리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폭들은 이런 권력자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마음껏 자신들의 세계를 주무르고 또 확장한다.


니는 환한 데만 있어라. 더럽고 추잡한 것들은 나가 다 처리해줄텐게. 워낙 더러운 것들이 많이 묻어서 나는 티도 안나야...


태수의 중학교 동창이자 들개파의 오른팔인 두일이 태수에게 하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두일은 태수의 뒤를 봐주는 댓가로 점점 응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강남을 무대로 자체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자신의 세를 키운다.

그러나 태수가 제 아무리 두일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고 두일 역시 태수라는 동아줄이 있다고 하더라도 태수 역시나 두일이 응수의 부하인 것처럼 이 1%의 상위 권력자들의 세계에서 하위 권력자일 뿐이다. 한강식에겐 태수보다 더 든든한 뒷배인 들개파 두목 응수가 있다. 태수는 강식의 아랫사람일 뿐이고 두일 역시 응수의 부하일 뿐이다.


더 킹에서 주목해야할 또 한 사람의 인물이 바로 강식과 태수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간 권력자인 양동철 검사이다. 그는 태수의 학교 선배이자 2년차 평검사인 태수를 전략 수사부로 끌어올리며 강식의 라인을 탈 수 있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어찌보면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비열한 인물이 또한 그이다. 태수에게 강식의 라인을 탈 수 있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오프닝에서 태수의 후회를 만든 결정적 제공자 또한 동철이다. 그는 태수에게 송백호 사건(체육교사인 송백호가 여고생을 성추행한 사건)을 무마시키는 조건으로 강식 라인을 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건넨다.


그리고 안희연으로부터 강식이 압박을 받자 두일을 치기 위해 벼르는 것과 함께 태수를 지방으로 좌천시킨다.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만 기다리라는 전제가 붙지만 실상 알아서 옷을 벗든가 조용히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어라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두일은 은신하는 대신 당당히 그들의 먹이가 되는 길을 택한다. 적어도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멋진 수트빨 뽑아입고 그 죽음을 자신의 의지 하에 당당히 맞는 길을 택한다.


그들은(강식과 동철 무리들) 이렇게 잘리는 꼬리들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들개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며 한 쪽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셔댄다.

이들의 권력이란 이처럼 꼬리 자르기나 하다하다 점괘나 굿 등을 보며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권력의 교체시기마다 몸을 사리며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 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몸을 사리는 이들의 모습은 이 비열한 세계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영역의 일이 있음을 이처럼 우화식으로 풀어낸다.

그들만의 펜트 하우스에서 유흥을 즐기고 시뻘건 육즙이 살아있는 스테이크를 썰고 군사경계선 주변의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즐기고 호위차량에 둘러싸여 휴가지에서 서울로 입성하는 이들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점괘나 굿에 기대는 이들의 모습은 권력이란 이름의 이면을 단적으로 상징화한다.


호화롭지만 추하고, 무소불위를 행사하는 듯 하지만 더없이 비굴하고 연약한 권력이란 이름의 실체,

그것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따라가는 더 킹은 이처럼 박태수가 무너뜨릴 수 없는 한강식이라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관객들에게 묻는다. 그 카드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진정 누구의 손에 쥐어져있는지를 조곤조곤 되묻는다.

특히 영화 말미에 이르러 태수가 강식을 향해 총을 겨눴다고 하는 부분에서 발사되는 총탄이 켜켜이 쌓아올려진 샴페인 잔들을 관통할 때의 쾌감은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이란 이름의 성찬을 무너뜨릴 수 있는 총알이 바로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을 향해  발사할 수 있는 탄환과 총자루는 결국 우리들이 쥐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선 태수의 당선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각각의 캐릭터들의 매력이 특정한 어느 한 사람에 집중되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에게 골고루 비교적 균등하고도 균질적으로 분산되어있는 더 킹은 이런 캐릭터들의 매력과 특징적 면모를 등에 업고 '자자'의 버스 안에서, '클론'의 난 같은 90년대 유행했던 신나는 음악들 속 권력이란 이름의 성찬과 비열함과 비정함을 낱낱이 해부한다. 게다 특정 검사들의 스캔들, 의뢰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제주 모 검사의 부끄러운 추태 등을 연상시키는 사건들을 슬며시 패러디해넣으며 실제 우리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환기시키는 지점은 이 조금은 과장되어 보이는 영화 속 인물들의 제스처나 스타일리쉬한 영상 같은 이 영화의 면면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암울하지만 한 가닥 빛이 보이고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이 읽힌다. 그것이 바로 부당거래나 내부자들이 이룩하지 못한 더 킹이 이룩한 하나의 성취이다.

게다 내부자들이 살리지 못한 각각의 캐릭터들의 고유한 특성이 더 킹 속 인물들 속에는 잘 살아 꿈틀댄다. 비정한 한강식, 비정하고도 비열하고 비굴하기까지한 양동철, 정의의 안희연, 의리의 최두일, 그리고 이리저리 인간적으로 흔들렸지만 결국 제 자리를 찾아 관객들에게 최종 물음을 던지는 인간적인 박태수에 이르기까지...


비극이 아닌 희극. 절망이 아닌 희망. 좌절이 아닌 재도약의 키를 관객들에게 쥐어주는 영화 더 킹은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늙지 않는 한강식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동안이며 청춘일 수 있는 권력이란 이름의 오만한 얼굴과 그 추한 젊음을 똑똑이 잘 감시하라고 충고한다. 눈 베이고 코 베이기 전에 그 술수를 지켜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이, 한 나라의 킹이 될 수는 없지만 그 킹을 만들 수 있는 힘!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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