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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25. 2017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죽음을 통한 삶의 가치, 부조리에 대한 저항

인간의 삶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를 찾으라면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다. 삶은 비극일 수도 희극일 수도,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 예외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인간의 삶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참인 명제인 이런 죽음에 대한 확신은 인간의 모든 운명을 사형수의 그것과 동일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런 죽음이 예견된 사형수의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 죽는 '자연적인 죽음(자연사) =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자발적 죽음(자살)= 사형(타자에 의한 비자발적 죽음)'은 결국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비극적이게도 등가가 성립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소설 밖 미래에 예정된 뫼르소라는 인물의 사형은 이 소설의 인시피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하는, 이미 과거사인 엄마의 부고로 시작하는 뫼로소 어머니의 자연사로부터 이어진다.

어머니의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에서 출발하여 뫼르소 자신이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이는 살인사건과 그로 인한 사형의 언도로 이어지는 이방인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키워드는 바로 '죽음'이다.

이 죽음은 자연사 ▷살인 ▷ 사형과 같은 그 성질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죽음이라고 하는 한 가지 공통된 정의를 향해 달려가는 비극과 맞물린다.

결국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흐르는 주된 주조는 바로 죽음에 대한 심상이자 그것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다.

흔히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혹은 부정)의  3부작이라 불리는 <이방인>, <시지프 신화>, <오해> 속에는 이방인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죽음의 방식을 하나하나 면밀히 다루고 있다. <오해>는 살인으로 인한 자살을, <시지프 신화>는 자살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카뮈의 작품 세계의 주요 화두가 이처럼 죽음에 도달하는 각기 다른 방식을 다루고 있음은 그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예술이나 문학에 담기는 정신은 작가나 예술가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문학이나 예술은 그러한 개인적 경험에서 생성된 사유와 철학을 어떻게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하느냐의 문제이다.

카뮈는 불과 채 한 살도 되기 전인 1914. 9월 1차 대전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삶을 알기도 전에, 그것을 체험하기도 전에 죽음을 먼저 경험하게 된 카뮈는 그 자신 역시나 폐결핵으로 인생의 주요 순간마다 여러가지 제약을 받으며 좌절을 겪는다.

17살에 발병한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대학교수 임용시험에도 탈락하며, 2차 대전 발발 시에는 입대 부적격 판정을 받는다.

생의 아이러니는 알베르 카뮈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라 불리는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가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한데 반해, 정작 카뮈 자신은 본인의 전생애를 걸쳐 괴롭혔던 이  폐결핵이 아닌 교통사고로 4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역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 죽음 뿐이라면 결국 생의 가치나 살아간다는 일의 가능성은 결국 모두 무용한 것이 되는가?

카뮈의 이방인이 어떤 소설인가에 대해 규정하는 일은 소설을 통해 결국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개인적 시선을 읽어내는 일이다.

먼저, 뫼르소란 인물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이 소설 속에서 여러모로 중요하게 작용한다.

어머니를 모신 요양원으로부터(뫼르소는 3년 전에 이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부고를 들은 뫼로소는 자신이 거주하는 알제로부터 80km 떨어진 마랭고로 향한다. 그러나 그를 지배하는 생각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80km나 떨어진 그곳에 가야하는 번거로움과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요구해야하는 이틀 간의 휴가 신청에 대한 부담감, 피로감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뫼르소의 성향은 양로원에 도착한 이후 그의 행동을 통해 보다 단적으로 드러난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관 옆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심지어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문지기가 건넨 밀크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의 나이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장례식이 치뤄지는 동안이나 그 전에도 단 한 차례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문지기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고 둘이서 함께 피웠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알제로 다시 돌아온 후에도 이런 선뜻 이해하기 힘든 뫼르소의 행동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작열하는 알제의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가 하면, 일전에 일하던 사무실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마리를 만나 함께 해수욕을 즐기고 그날 밤(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그녀와 잠자리도 갖는다.


소설 이방인의 문체는 이런 뫼르소라는 인물의 성격을 대변하듯 그 자신에 의해 무심한 듯 묘사된다.

즉, 이 소설의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뫼르소가 뫼르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마치 제 3자의 행위를 서술하듯 무심히 간접적이고도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그 자신의 행위에 깊이 관여하지도, 그 행위를 상세히 묘사하거나 서술하지도 않는다. 그느 마치 관찰자처럼 행동하며 동시에 자신이 통과해온 시간들 속 사건들을 서술하는 화자가 된다.

그를 둘러싼 모든 세계, 심지어 그 자신이 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무심한 듯 한 뫼르소라는 인물의 행동은 그의 성격과 이 소설에서 카뮈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설명과 묘사를 통한 장황한 수사의 방식 대신, 제한된 설명과 묘사를 통한 암시는 이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그리고 이것은 2부에 이르러 뫼르소에게 사형이 구형되는 중요한 구실이 된다.


1부에서 어머니의 자연적 죽음으로부터 출발한  이방인의 플롯은 1부 6장에 이르러 살인 사건으로 전환 된다.

실상 이 이방인이라는 소설 전체를 통틀어 이 살인 사건은 중요한 의미로 기능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죽음(살인)은 뫼르소라는 인물이 살아가는 세계 밖에서 작동하고 있는 별 의미가 없는 세계의 일처럼 가볍고도 비중 없게 다뤄진다.

뫼르소의 주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살라마노 영감이나 레몽이라는 인물들에 대한 이해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자 단서이다.

뫼르소가 사는, 같은 건물에서 살아가는 이들 두 남성은 뫼르소와 유사한 상실과 죽음을 경험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선 피부병으로 덕지덕지 보기 싫은 흉측한 딱지로 뒤덮인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살라마노 영감은 죽은 아내를 대신해 8년 째 이 개를 키우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개를 학대하면서도 그 개를 자신의 죽은 아내와 동일시하는 영감의 이중적 심리는 어느날 산책길에서 잃어버린 개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면 개들이 짖기만 해도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세상의 모든 개= 자신의 잃어버린 개'로 느껴질 정도의 상실감을 느낀다.


또한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이게 되는 결정적 원인 제공자나 다름 없는 레몽이라는 사내는 자신의 정부에게 지금까지 속고 살았노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를 혼쭐내줄 궁리를 모색하는 인물이다. 그 일을 위해 뫼르소에게 대필을 부탁하기도 하고, 경찰들에게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줄 것을 뫼르소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들에서 뫼르소는 문제의 아랍인들과 엮이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뫼르소가 아랍인을 쏴죽인)은 이 소설 전체를 통해 가장 짧고도 가볍게 다루어진다. 

1부 1장~5장까지 담긴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그 후의 풍경과 2부 1장~4장까지 담기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의 풍경을 서로 연결하는 이야기의 구심점 역할(1부 6장을 통해 짧게 다루어질 뿐이다)을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카뮈가 다루고자 한 이야기의 중심이 사형이라는 예정된 죽음의 수순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하나의 다리 역할을 위해 이 살인이라는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형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카뮈가 목도한 것이 바로 이 사회와 세계의 부조리한 면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형 제도와 재판과정의 부조리한 면)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였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즉, 어머니의 장례식 때 뫼르소가 보인 행동과 아랍인을 쏴 죽인 그의 행동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어머니의 시신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는 점,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여자친구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점 등이 뫼르소의 살인을 처음부터 계획된 범죄로 판단할 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검사나 판사, 심지어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뫼르소가 그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행동을 살인사건의 유죄를 넘어 인간성이 말살된 인간의 계획된 살인의 근거로 삼는다. 그들은 뫼르소의 진술 그 자체보다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의 과거의 행동과 그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변론이나 자신의 신에 대한 신념 따위를 설파하는데 더 열중한다.

그들의 세계 속에서 정작 당사자인 뫼르소 자신은 철저히 분리된다.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대해 애써 설명하지도 특별하고도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의 성격이 그를 사형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기이한 상황은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분리된 뫼르소의 자아이자 바로 카뮈 자신의 자아이기도 하다.


앞서 뫼르소의 성격이나 행동이 중요하다 말한 이유는 2부에 이르러 1부에서 행해진 그의 모든 행위들이 재판의 근거가 되고 선고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며, 그가 어머니의 장례 과정과 그 후에 보인 모든 행동들이 타자들에 의해  살인사건과 결부되어 해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이란 소설은 철저히 어느 한 쪽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재판 과정상의 풍경과 이런 일방의 힘을 정상적으로 회복하려는 뫼르소의 원심력으로 작동하는 이야기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감정적 변화를 수반하지도 않았던 뫼르소의 행위는 2 말에 이르러 이런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감방에 수감된 채 사형이 집행될 날만을 기다리는 뫼르소가 유일하게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일 수 있는 이 장면은 곧 카뮈가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과 다름 아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교도소 사제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으며, 기도를 그만하라고 분노를 토해내는 뫼르소의 모습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카뮈의 저항이다.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진 존재이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여기서 뫼르소가 말한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그 특권이란 바로 죽음에 이르는 길이며 사형 역시 누구에게나 언젠가 공평하게 주어질 죽음이란 이름의 특수한 이름인 것이다.

죽음은 여러가지 방식(자연사, 살인, 자살, 사형 등)으로 존재하지만, 죽음이라는 그 결과는 동일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예정된 사형수들이다.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소용이 있단 말이며 자연사나 살인이나 사형이나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른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 죽는다.

뫼르소란 인물에게 있어 모든 일들이 다 자신의 세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무신경하고 무의미한 것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그 공평성과 빠져나갈 수 없는 구멍 때문이다. 마치 뫼르소에게 언도된 사형처럼...


그렇다면 카뮈는 이런 부정과 부조리를 통해 삶을 비관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방인이라는 이 소설이 어떤 과정과 시간 속에서 쓰여졌는지를 이해하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에서 알제라는 공간과 뫼르소의 어머니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던 마랭고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는 바로 강렬한 햇빛이다. 심지어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죽이는 과정에서 해변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햇빛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의 그것처럼 그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 강렬한 무엇이며 살인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강렬한 햇빛과 아랍인이 품은 과도와 그를 향한 칼날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당긴 방아쇠.

그러나 정작 카뮈가 이 이방인을 집필하던 곳은 이런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던 알제도 마랭고도 아닌, 2차 대전과 비가 쏟아지던 파리의 우중충하고 번들거리는 세계이다.

결국 법정에서 그 자신이 사건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그를 배제한 채 진행되는 재판과정의 풍경은 카뮈 자신이 파리에서 이방인으로서 겪은 고독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게다 그는 이 글의 집필 당시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중심부에 있었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의 일부를 점령한 상태였다.

결국 소설 속 세계는 작가가 희구하는 세계에 대한 대비이며 역설적인 상징이다.

뫼르소에게 가해진 부당한 선고와 처사를 통해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인 죽음에 대한 절망이 아닌, 그렇기에 삶의 가치와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도 행복했고, 지금에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부당하게 작동하는 세계에 대해 뫼르소의 마지막 모습처럼 그만하라고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삶의 가치들은 결국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는 등가를 뒤집어엎는 역설이다. 삶이 부조리할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다.

소설 이방인 속에 녹아있는 각기 다른 모습의 세 가지 죽음(자연사, 살인, 그리고 사형)들은 이 철학적 사유를 깨닫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알베르카뮈#알베르카뮈이방인#알베르카뮈이방인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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