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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09. 2017

그레고르 잠자는 왜 벌레가 되었나? 카프카 <변신>

도구화된 개인, 유리화된 가족


프란츠 카프카'와 '알베르 카뮈'는 철학자 사르트르만큼이나 실존주의를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실제로 수많은 고전 문학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며 번역되었지만 국내만 하더라도 카프카의 <변신>만큼 여러 출판사, 여러 번역가 버전의 번역본이 존재하는 작품도 드물다. 그만큼 고전 중에서도 카프카의 작품, 그 중에서도 <변신>은 책의 첫 대목부터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이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바뀐 이 소설 속 기묘한 상황에 대한 묘한 흥미와 함께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시대를 뛰어넘은 고심의 흔적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동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그림: 루이스 스카파티



어느날 아침 고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 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변신>의 첫 대목은 너무도 강렬해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이 기이한 문장을 쉽사리 잊어버리긴 힘들다.

처음부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시작되는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날 아침 난데없이(그러나 실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한 마리의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통해 존재의 의의와 실존의 무게를 상실한 한 인물의 빈껍데기만 남은 내면을 비춘다.


그 방식은 몹시도 기묘한 것이어서 마치 현실이 아닌 판타지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한 마리의 징그러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그를 둘러싼 주변 세계의 풍경은 더없이 사실적이며 현실적이다.

마치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묘하게 공존하는 듯 한 이 기묘한 상황은 인간이 아닌 실제 자신을 벌레로 인식하기 시작한 그레고르의 자아를 통해 그와 그 주변 세계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 된다.


좌측: 프란츠 카프카의 모습을 그린 루이스 스카파티의 그림


존재의 가치와 실존의 무게를 상실한 도구화된 개인


출장 영업사원으로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첫 기차를 타고 출근을 해야했던 그의 일상은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한 순간부터 그 자체가  일종의 위협과 공포가 되어 그와 가족의 삶을 짓누른다.

딱딱한 등껍질을 바닥에 대고 배가 천장으로 뒤집어진 채 누워 가느다랗고 긴 다리를 아무리 허공에 허우적거려도 자신의 몸뚱아리 한 번 뒤집기에도 벅찬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의 변화는 곧 그레고르가 속해있는 이들 가족의 운명의 변화를 의미한다.

5년 전부터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한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아들의 노동력에 의지한 채 무력하고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살아왔고, 전 가족의 생계는 전적으로 그에 의해 유지되고 영위되어왔다.


하지만 대개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가족관계는 처음의 고마운 마음마저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그러는 사이 그레고르는 개인적 여유가 충만한 삶, 느긋하게 한 끼의 든든한 식사를 하는 삶, 누군가와 지속적이고도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는 삶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져 있다. 밥은 허겁지겁, 만남은 영업을 위한 목적성과 일회성,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동안 그 자신 역시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간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어느날 갑충의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아버지로부터 지팡이로 공격을 당하는 그레고르 잠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기는 그레고르 잠자


이런 그레고르의 모습은 마치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 35년을 폐지 압축공으로 살아온 주인공 '한탸'나 '김승옥'<무진기행> , 이름도 없이 직함으로만 존재하는 소설 속 인물과도 그대로 오버랩된다. 이 소설책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렇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기를 상실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의 비극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실존은 그들 이름을 대신해 붙은 직함이나 그들이 매달 벌어오는 돈의 액수, 날마다 부수고 압축한 폐지더미들의 무게와 그곳에서 주워온 책들의 무게로만 증명된다.


이는 곧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 자본이 몰고온 사회에서 살아가고 또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개개의 구성원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거기에 자신을 넘어 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양의 책임감마저 지워져있는 인물들의 삶은 실존의 무게보다 그런 책임감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온다.

그레고르란 인물은 그런 와중에도 어린 여동생이 재능을 살려 꼭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기를, 그런 그녀의 대학 학비를 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따뜻한 인물이기도 하다.



유리화된 가족 간의 단절


어쩌면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은 당연한 수순처럼 받아들여진다.

어떤 가족이 혹은 주변인이 흉측한 벌레로 변한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며 한 인간의 허물어진 실존의 무게를 헤아릴 것인가?

출근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그레고르의 상황은 안에서 그 와중에도 직장에서 영구 퇴출될까봐 (가족의 생계를 더이상 책임질 수 없을까봐, 아버지의 빚을 더이상 갚아나갈 수 없을까봐)출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온몸으로 발버둥치는 한 인물의 내면을 가족들이나 사람들이 알아볼 리가 민무하다.

결국 회사에서 나온 이와의 대면 끝에 그레고르의 변한 모습을 처음 마주한 가족들의 놀람과 혐오의 반응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


당신들의 아들이, 자신의 오빠가 하루 아침에 흉측한 벌레로 바뀌어있는 상황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평소 그레고르와 가장 애착관계가 깊었던 여동생이 그에게 우유를 내어주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치즈를 내어주는 것으로 그를 돌본다.

다른 가족들이 자신에 대해 나누는 모든 대화의 내용들을 들을 수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언어로 그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그레고르의 상황은 비자발적 고립의 세계로 그를 더욱 더 침잠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가 어떤 말을 내뱉더라도 그것은 더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라 벌레의 괴상한 울음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대화에, 그들과의 식사자리에 더이상 가족이란 이름으로 합류할 수 없으며,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가족들의 혐오와 냉대로 인한 그의 이런 고립은 더욱 깊어진다.


어머니는 흉측한 그의 모습에 기겁하기 일쑤이니 한동안 아예 그와의 대면조차 부녀에 의해 차단된 상태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는 지팡이나 사과 따위로 그레고르의 등껍질을 공격하기도 한다. 처음에 먹을 것을 열심히 내어주고 그의 방을 깨끗이 치워주었던 여동생마저도 점점 더 그에게서 멀어져간다. 이미 딱딱한 껍데기만 존재하는 알멩이를 상실한 한 인간의 무너진 내면세계는 외부의 공격과 폭력, 냉대 속에서 그 껍데기마저 병들어간다.


그레고르를 향한 이런 냉대와 혐오의 시선은 가족을 넘어 심지어 가정부, 임시 파출부, 심지어 하숙인들에까지 유사한 모습으로 표출된다. 그나마 그에게 가장 우호적이었던 여동생마저 그레고르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의 부담을 나눠지게 된 이후로 급격히 냉랭해져가는 모습은 그가 더이상 그 벌레의 모습으로라도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가 온 방을 기어다니다가 다칠까봐 가구를 치워주고 그가 기어들어가 숨어있는 소파 밑으로 음식을 넣어주던 여동생의 보살핌도 시간이 지날수록 형식적이 되는 것을 넘어 급기야 저 벌레를 치워버려야 한다는 성가심으로 바뀐다.

그 속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점점 더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어지거나 점점 더 폭력에 상처입으며 기력을 상실해간다. 그리고 예정된 비극 속으로 영원히 침잠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점점 더 창백해져가는 그레고르 잠자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비극으로 일반화하긴 힘들다. 어쩌면 극단의 일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초에 쓰여진 이 작품이 한 세기를 넘어 지금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이 작품의 무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실존의 위험성이 결코 가볍지 않음에 대한 무언의 동의일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이 자본주의 사회에 의한 비자발적 측면의 변신이든, 아니면 한 개인을 무력화시키고 부품화시키는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로 대변된 현대인들의 자발적 변신이든 어떤 경우라해도 바람직하거나 긍정적이지 않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을 것이다.

자신을 증명할 길이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한 인간의 몸부림과 정체성이 벌레로 전락할 때 그 벌레를 향한 냉대와 혐오 속에서 말라가고 죽어가는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 실존의 비극을 극명하게 마주하게 된다.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프란츠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고향인 체코 프라하에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글을 썼다. 비교적 안정적인 가정과 환경에서 나온 그의 작품이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과 성찰, 그것이 무너진 인물의 비극에 주목했다는 점이 흥미로우면서도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많은 현대인들이 정도야 다르지만 그레고리 잠자와 같은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김 대리, 이 과장, 최 부장,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 아무개 며느리...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이름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우리 앞에 붙은 수식어들과 직함들 속에 어느날 딱딱한 껍데기를 가진 갑충의 벌레로 변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그저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인데)는 그 이유 하나가 그를 살인자와 동일시하는 단정-물론 뫼로소는 5번의 총알을 발사해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죽인 사건과 어머니 장례식에서 무감정이었다는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가 감정표출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가 살인을 저지렀다는 사건에 대한 논거가 될 수는 없다. 햇살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고 상대가 먼저 과도로 위협을 한 상황이었다 - 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폭력.

그래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뫼르소라는 인물 역시 잠재적 그레고르 잠자인 셈이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뫼르소이거나 그레고르 잠자가 아닐런지.

그레고르 잠자의 가장 큰 비극은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더이상 인간의 모습으로는 회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와 실존을 완전히 상실한 자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죽음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날카로운 통찰이 이 짧고도 기이한 소설을 뚫고나와 모든 두 발 달린 인간들의 실존의 위기와 유리화된 가족 관계의 단절을 그로테스크하게 더듬는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생의 최후를 맞는 그레고르 잠자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건 명백한 실수로 인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 주로 읽었었던 고

전에 대한 항수에 시달리다 신랑이 가지고 있던 문화상품권으로 책 몇 권을 사달라고 책 제목을 얘길 했었는데, 카프카의 변신이 워낙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며 여러차례 번역되다보니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하필? 신랑이 주문한 책이 이 책이었다.


받고나서 적잖이 당황해서 '아니 이건 엄마들이 애들이랑 같이 보려고 주문하는 책 아니냐?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면서 짜증 아닌 짜증도 좀 내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절하게 한 장 한 장 그림까지 그려져있는 이 낯선 고전을 받아들고 혼자 적잖이 당황했던 게다.ㅎㅎ


뭐 결과적으론 아이와 함께 보면 참 좋겠다 싶은 책이다. 고전 하면 대개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아이들 눈높이의 그림을 보여주며 엄마아빠가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구성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그림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이스 스카파티'란 사람이 그렸는데, 알고보니 굉장히 유명한 화가였다는...^^


좀 더 쉽고도 친숙하게 혹은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카프카의 <변신>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해드릴만한 책이다.

출판사는 문학동네이며 번역가는 이재황씨가 담당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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