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을 산다 하더라도

<두 인생을 살아봐>

by Iris S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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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두 인생을 살아봐’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임신 테스트기를 해보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임신을 했을 때와 임신을 하지 않았을 때 펼쳐질 상반된 두 삶의 모습을 대조해서 나란히 보여준다. 임신을 하지 않았을 경우, 주인공은 대학교 졸업 이후 꿈꾸던 LA로 이주해 디자인 회사에 취업한다. 직장 동료와 연애도 하며,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반면 임신을 한 경우, 주인공은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육아를 한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며 본래 꿈과는 먼 생활을 이어 나간다. 엄마로서의 삶에 현타가 올 때면 주인공은 마냥 서럽게 쇼파에 앉아 울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디자이너라는 학생 때부터 간직해온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가 잠든 밤이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세상 속에서 주인공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꿈을 향해 전진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세상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모두 자신이 꿈꾸던 삶에 가까워졌다. 영화에서 어떤 인생을 살든 주인공은 꿈과 사랑 모두를 쟁취할 수 있었다. 과정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두 세상 속에서 주인공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만은 같은 곳을 향했다. 즉, 영화의 결론은? 어떤 삶 속에서도 ‘You’re Okay.”



영화를 보고 띵했다. 나를 위한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나의 인생은 주인공이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임신 사실을 깨닫고 펑펑 울며 좌절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과거의 내가 떠올라 눈물이 차 올랐다. 나에게도 저 시절이 있었지. 아이의 존재로 인해 내 삶이 무너진 것만 같은,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온 모든 꿈들이 내 손에서 한줌 모래처럼 흩어져 버린 것만 같던 시절이.



7년 전 상상도 못 했던 첫 임신을 하고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아이가 내게로 왔다.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다. 내가 꿈꾸던 인생의 계획들이 무너져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난 행복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건은 운명에 순응하는 길 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꿈꾸던 빛나는 삶에 대해 상상하다 보면 분한 마음이 차오른다. 아깝고, 화가 나고, 억울하다. 과연 난 내 꿈도 지키고 아이도 지킬 수 있을까…?’



당시 난 대학원생이었다. 그해 대학원을 수료하고, 졸업논문을 쓰며 언론고시를 준비하려던 게 나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해 2월, 덜컥 임신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임신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선택지였다. 결혼한 지 4개월차에 접어든 당시의 난 불과 26살이었다. 출산보다는 취업이 어울리는 나이였다. 그랬기에 임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기이할 만큼 힘들었다. 친한 친구에게도 임신 6개월차가 될 때까지 임신사실을 밝히지 못했는데, 그건 내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취집’(취직+시집)을 한 여성으로 비춰지는 게 싫어서였다.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취업하기가 싫어 결혼으로 도망친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게 비참하게 여겨졌다. 당시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내가 너무도 오랜 시간 꿈을 갈망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꿈이 인생의 최우선 가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원하던 이상향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나는 그야말로 비관주의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첫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내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이까지 딸린 유부녀로서 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수나 있을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안에 잠식했다. 그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견딜 수 있게 했던 건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알량한 자부심이었다. 주변에서는 석사를 수료로 마치고, 육아를 열심히 하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그럴 수록 내 마음에는 기필코 논문을 써서 석사 졸업을 끝마치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내가 본래 꿈꾸던 길에서 이탈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시절을 버텼다. 동기들보다는 1년 늦게 논문을 완성시켜 졸업을 한 후, 28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워킹맘의 삶을 살게 된 지 어느덧 6년차. 이따금씩 아이가 없는 자유로운 몸으로 꿈을 향해서만 전진해 나갔을 저쪽 세상 인생에 대해 상상해보곤 한다.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없이, 그저 내 이름으로만 살아가는 삶. 그 세상 속 나는 오로지 나와 내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다. 주말에는 원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자기계발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그 삶을 상상하며 흠뻑 부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의 내 삶도 좋다. 내 삶을 싫어하고 부정하기 보다는 한껏 끌어안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비혼이거나 딩크족으로 살 마음은 없었으니, 육아를 하는 삶은 인생에서 한 번은 꼭 겪어야만 했다. 남들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육아를 하고 있으니, 40대, 50대의 나는 비로소 가벼운 몸으로 날개를 단 듯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일기장 속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 없어. 어떤 인생을 산다 하더라도, 넌 결국 원하는 길 위에 서 있을테니, 너 자신을 믿어줘. You’re ok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