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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un 25. 2024

바다보며 멍 때리기

평소 멍 때리기를 즐기지 않는다. 아니, 사실대로 고하자면 멍 때릴 여유 조차 없거니와 설령 멍 때릴 시간이 생긴다해도 요즘은 휴대폰에 중독이 돼 '도파민의 노예'로 살고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멍 때릴 시간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일, 육아, 가사노동을 반복하다 보면 월요일에서 금요일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건 한 순간이다.


그런데 지지난 주말 실로 오랜만에 멍- 때리는 시간을 누려봤다. 속세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는 기분이란, 한마디로 끝내줬다!


우리 가족은 둘째 아들의 유치원 졸업과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을 맞아 근교 해안가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비행기를 제시간에 타야 한다거나 하는 걱정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스케줄이 여유롭다.


친구 중 한 명이 얼마 전 남가주 바닷가 중 샌클레멘테(San Clemente)가 가장 좋다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나서 이번 여행지는 샌클라멘테 해안가로 정했다. 트래픽이 가장 심한 금요일이란 것을 망각하고 낮잠까지 자고 출발한 탓에 차가 막혔다. 평소 1시간30분이면 도착할 곳을 2시간 40분에 걸쳐 겨우 도착했다. 그래도 바닷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이곳까지 오느라 차에서 고생한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직장생활을 하며 알게 모르게 내면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 순간에 밖으로 표출되는 것만 같았다. 바다를 보며 '하, 살 것 같네'란 말이 절로 나왔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본격적으로 바다를 즐겨보기로 했다. 지난 겨울 하와이에 가서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았던 기억이 남편과 아이들의 뇌리에 크게 각인이 된 모양인지 남편과 아이들은 유독 바다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나만 제외하면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가 바다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셈이다.


나도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바다를 참 좋아했다. 물놀이라는 물놀이는 다 좋아했으니, 바다가 싫었을리 없다. 바다에서 튜브를 타고 둥둥 떠있는 느낌이 얼마나 좋았던지? 여름철이 되면 계곡, 바다로 예쁜 튜브를 사서 가족 휴가를 가던게 떠오른다. 바닷가 근처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튜브만 보던 설레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엄마 말에 따르면 바다에서 수영하다 파도에 휩쓸려 죽을뻔한 적도 있다고 하던데, 다행스럽게도 내겐 기억이 없다.


내가 삼십대에 들어서고 나서 바다를 그닥 좋아하지 않게 된 건 아마도 이제 내가 나만 챙겨도 되는 입장이 아니라서다.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된 지금은 바다에서 놀고난 후 '후처치'에 대한 고민이 늘 뒤따른다.


저 모래는 어디서 털지, 제대로 모래가 털리긴 하려나? 어디서 씻지? 위생상태는 괜찮나? 등등...이런 처치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바다에서 놀고시다는 감정이 딱 사라졌다. 오히려 이제는 바다를 바라보며 모래사장 위에 앉아있는게 훨씬 더 좋다. 말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리기!



오전 10시께 호텔 앞 바다에 도착하자 마자 남편과 아이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시 위에 스웨터를 입었는데도 몸이 파르르 떨릴 만큼 아직은 서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우리집 남자들은 바다를 보자 마자 추운 날씨 따위는 전혀 상관없는지 겁도 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게는 없는 저들의 패기가 부럽기도 해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모래사장 위에 깔아놓은 돗자리 위에 앉아 챙겨온 책을 꺼냈다. 주변에는 나말고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미국에서 해변가나 수영장을 갈 때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같이 활자를 읽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시대에 쉽사리 보기 힘든 풍경인데, 그런 모습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모든게 빠르게 변해가는 이 사회에서 여전히 아날로그 취미를 지향하는 사람을 만났다는게 좋아서다.


남편이 본격적인 수영을 하러 간다기에 책 읽기를 멈추고 모래놀이를 하던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이들 너머로 보이는 바다도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와 사랑하는 두 아이를 번갈아 보며, 그간 사회생활을 하며 상처입고 지쳤던 내 영혼을 토닥인다. 잘 하고 있어... 힘든 순간을 참고 나면 이렇게 살만한 순간도 찾아오니까, 힘을 내보자...그런 식의 자기 위로를 속으로 되뇌이며, 긍정의 에너지로 몸을 감쌌다.



파도 소리, 바다 냄새, 낙관적이고 들뜬 분위기.


바다 멍을 때리던 평화로운 그 순간이 지금도 마음 속 한 구석에 선명히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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