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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ul 08. 2024

사주풀이,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2024년 상반기 내내 시시때때로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에 빠져 지냈다. 올해 1월 기자에서 보좌관으로 이직을 한 후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될 때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기자라는 직업이 오랜 시간 내가 꿈꿔온 일이었다면 보좌관이라는 직업은 인생에서 염두에 조차 두지 않았던 일이다. 기자 일을 하며 정치인들의 취재를 위해 보좌관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됐을 뿐이다.


드라마 '보좌관' 조차 시청하지 않은 내가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색하기만 하다. 여전히 내 직업이 기자가 아닌 보좌관이라는 사실에 가끔씩은 아연실색할만큼 어리둥절하고 낯설어서 길을 잃은 아이같아질 때가 있다.


이직 후 첫 5개월은 정신없이 바빴고, 그랬기에 우울할 틈이 비교적 없었다. 선거 운동을 하고, 5월 '아시아계 달'과 관련한 행사들을 준비하며 스케줄러가 빼곡하게 채워진 바쁜 날들이 이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그 바쁨 속에서 아무 생각없이 지낼 수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육아와 가사를 하다 밤이 되면 곯아 떨어지는 일상은 단순명료했다. 몸은 지쳤지만 바쁨 속에서 정신은 평온함을 느꼈던 것 같다.


중요한 이벤트들을 하나씩 다 끝마치고 나니 2024년의 상반기가 저물었다. 그리고 비교적 한가해진 요즘,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고, 어디를 향해 항해하고 있나? 자꾸만 내 안에서 물음표가 나왔다. 스스로도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없어 답답하고, 때론 우울해지기도 했다. 목적지가 불투명한 인생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쯤 지인에게 소개받은 사주 선생님을 만나러 삼성동의 한 오피스텔을 찾은 적이 있다. 그곳은 과거에 가봤던 여느 다른 점집의 달리 '치과'에 온 것 같다는 인상을 풍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한 인테리어가 반겼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직원은 내가 사전에 예약된 손님인지를 확인했다. 그녀는 나보고 소파에서 기다리다 이름이 호명되면 상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설명했다. 10분쯤 기다렸을까, 이윽고 내 이름이 불렸다. 상담실 안에서는 정장을 빼입은 40대 여성이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중었는데, 저 나이가 돼도 커리어 고민은 계속되는구나 싶어 왠지 모를 안도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상담실 안으로 들어서자 말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생년월일, 태어난 시간 알려주세요."


그는 내가 불러주는대로 컴퓨터에 정보를 기입하더니, 자판 엔터 버튼을 힘주어 탁 눌렀다. 내겐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 나에 대한 사주 풀이가 쫙- 떴으리라. 그는 거침없이 내게 사주정보를 퍼부었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져도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면 불행한 운명이구나...


컴퓨터를 이용해 사주풀이를 해주는 곳은 실로 처음이었다. 현대 과학과 명리학을 묘하게 섞어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신박한 방식의 사주풀이는 내게도 먹혔다. 실로 그가 내게 전달하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맞는 말들이었고, 나는 쉴새없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 표시를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구절이 하나가 있다. 그 구절은 어쩌면 30대 내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무조건 직장에서 일을 하세요.

어차피 이 세상에 본인이 꿈꾸는 직장은
존재하지 않아요.

40살까지 쌓게 될 모든 경험들이
결국은 글의 소재가 될 거예요.

그러니 무조건 40살까지는
직장을 다니며 버텨야합니다.

지금도 저 말을 전하던 그의 단호함이 기억난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난 뜨끔할 수밖에 없었는데, 직장생활에서의 경험이 내가 쓸 글의 소재가 될 거라니? 난 그에게 내가 글을 쓰며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말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글을 쓰다뇨? 제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당신 인생에는 커뮤니케이션 밖에 없어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

그러니 모든 경험이 커뮤니케이션의
소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이날의 경험은 30대 직장생활에서 내가 방황할 때마다 내가 서있을 수 있게끔 지탱해 주는 지팡이가 되어 주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언젠가 내가 쓸 글의 소재가 된다고 생각하니 모든 일이 의미있게 여겨졌다. 특히 사회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경험할 때일 수록 위의 문구를 더욱 곱씹었다. 불행을 맛봐야 불행을 어루만지는 글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떤 상황이 와도 참을만 해지긴 했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에서도 어떻게서든 '잘' 지내보려고 한다. 실제로 매일이 불행한 날은 아니다. 하는 일에서 크게 의미를 가지고 자부심을 느끼는 날도 있었다.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대로 물러나면 지금의 경험은 실패처럼 여겨질테지만, 무언가 많은 경험을 성취한 후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지금의 나날들이 한평생 큰 의미로 다가올 것임을 안다.



내 경우를 보면 사주풀이를 썩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한평생 마음에 새기고 따라갈 길잡이를 제시해 주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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