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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May 13. 2021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아

너희는 엄마의 약점이 아닌 강점이야

잠이 오지 않는 새벽시간, 일기장을 들춰봤다. 10년 전 나부터 오늘의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일들이 있었고, 글 위에서 과거의 나는 살아 숨 쉬었다. 울고 웃으며 일기장을 읽다 2016년 2월2일에 쓴 글을 읽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계획에도 없던 임신 사실을 알고 난 직후에 쓴 일기였다.



아이가 내게로 왔다.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다. 내가 꿈꾸던 인생의 계획들이 무너져 내렸다. 난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모래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 갈 것만 같은 불안감에 분한 마음이 든다. 난 행복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나밖에 모르는 내가 누군가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다니. 나의 빛나는 삶은?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고, 억울하다. 부주의했던 나의 탓. 모든 책임은 내게로… 이 과정을 잘 이겨나갈 수 있을지. 난 현명하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 꿈도 지키고 아이도 지킬 수 있을까. 받아들이자… 받아들이자… There is no other choice…





5년 전 내가 느꼈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시 난 대학원생이었다. 그해 대학원을 수료하고, 졸업논문을 쓰며 언론고시를 준비하려던 게 나의 새해 계획이었다. 새해가 고작 1개월 지난 후 알차게 세워둔 새해 계획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신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길이었다. 결혼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을 뿐더러 난 직업도 없는 학생 신분이었다. 지난 7년간 유학생활, 대학원 과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기자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꿈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엄마로서 기자생활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내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이까지 딸린 유부녀로서 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수나 있을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안에 잠식했다. 이제서야 되돌아보면 조금 더 어려울 뿐 취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지레 겁먹고 모든 것을 아이 탓으로 되돌렸던 것 같다.



임신 5개월 차의 어느 날, 남편이 다시 미국에 가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라고 물었다. 남편은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그 물음에 선뜻 그래, 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건 당시의 내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왠지 미국에서라면 애를 낳고도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한국에서는 막막했던 길이 미국에서는 풀리지 않을까, 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내 아이를 교육하고 싶다는 욕심도 함께 딸려왔다. 유학생활 내내 그토록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일기장에 쓰고 또 썼으면서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건 100% 내가 임신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감사하게도 아이를 낳고도 석사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내 인생에서 계속 약점처럼 작용했다. 유치원에 있는 아이를 픽업 가야 했기 때문에 야근 취재는 하지 못했다. 가고 싶은 취재가 있어도 저녁 시간 취재일 경우 국장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아이 때문에 ‘워라밸’은 저 세상 이야기였고, 일과 육아로만 반복된 삶을 살았다. 그토록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몸이 피곤하니, 정신도 피폐해졌다. ‘육아 없이 오로지 내 일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참 자주 곱씹었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다. 둘째까지 낳고 워킹맘으로 살아가며 몸이 몹시도 지쳐있던 시기였다. 지난해 2월에는 감기를 한 달 동안 달고 살고, 인어공주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갔다. 정말 성대가 제대로 고장 나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전화 취재, 현장 취재 모든 과정에서 곤란함을 겪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제가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 이해를 해주세요’라고 적어 보여주는데, 상대방의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취재를 어떻게 하나… 일주일 후 목소리는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한 달간 감기약을 먹으며, 꾸역꾸역 아이와 함께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내 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고 지난해 3월부터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그것도 격주로. 한 주는 일하고, 한 주는 쉬는 꿈 같은 스케줄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내 삶에 여유가 생기다 보니 새삼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라 준 거니 너희들. 아이들과 집에서 지지고 볶는 생활이 이어졌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이제서야 내가 진짜 엄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퇴근 후 아이들을 잠시 보는 일 조차도 피곤하게 느껴져서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저 얼른 애들을 재우고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싶었고, 육아는 퇴근 후 빨리 해치워야 하는 숙제 쯤으로 여겼다.



이제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코로나19 시기 단 하나 좋은 게 있다면 재택근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엄마’로 살 수 있었다는 사실. 여전히 육아는 힘들고, 내 시간은 간절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더 이상 내 이상의 약점이 아닌 강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다. 엄마가 되어 보지 못했더라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철부지로 영영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전화 취재를 하던 중 취재원이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서는 묻는다.


“아, 기자님 아이가 있으세요?”


“네, 있어요. 두 명이나.”



자랑스럽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취재원이 엄마이거나 아빠일 경우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서로 ‘육아가 뭔지 안다’는 그 느낌.



나는 내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좋다. 


아이들의 존재로 인해 원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주어진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덕분에 과거의 나보다 유연하게 그리고 소소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일기장 속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 없어.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니까, 슬퍼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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