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릴 때마다 원하던 내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20대 중반이 지날 무렵, 사회생활을 활발히 할 나이에 카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벌이보다 큰 소비벽 때문이었다. 무엇인가 갖고 싶으면 참는 법이 없었다. 옷은 이미 충분히 많은데도 계속해서 사들여서 서랍과 행거에서 흘러넘칠 정도로 꽉 찼다. TV에서 보던 예쁜 집을 가질 수는 없어서, 어디서 주워본 인테리어 소품으로 대리만족했다. 다이소에 가면 자질구레하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도 끊임없이 사들였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틈만 나면 약속을 잡고 술자리를 만들었다. 어릴 적 친척들에게 의지해야만 갈 수 있었던 여행을 내 선택으로 갈 수 있게 되자 무리하게 다니며 계산 없이 돈을 썼다. 특히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 더 심해졌다.
퇴근길에 다이소에 들러 뭐라도 사고 나면 숨통이 트이는 그 기분. 예쁜 옷을 사면 마치 가치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 택배를 기다릴 때의 초조함과 설렘. 주문한 온갖 옷을 입어볼 때의 격앙감. 잘 맞지 않는다며 반품할 때 느꼈던 안도감. SNS에 올라오는 광고를 보면 당장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긴장감. 세일 때를 놓치면, 품절되기 전 타이밍을 놓치면 손해 본다는 압박감. 결제를 누르고 나서야 해소되던 불안들. 그런 생활을 몇 년간 반복하니 내 인생은 두 가지로 점철되었다. 독촉과 청구서. 카드사에서 수도 없이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도 카드값을 연체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족에게 도움도 청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너 달을 보내고 나니, 자려고 누우면 눈물이 흘렀다. 매일 밤 몰래 훌쩍였다. 어느 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공포를 알아봐 준 질문에 눈물이 터져 대답도 못 하고 하염없이 울다가, 결국 고백을 했다. 얼마 간의 카드값을 갚지 못해 매일 독촉 전화를 받고 있다고. 엄마는 카드값을 대신 갚아주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엄마의 장부에 오늘 ‘딸의 카드값’이 올라가 있을 거란 걸. 그 후로 몇 년간 엄마는 그날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때 내준 카드값은 갚지도 않고…”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만한 여윳돈이 생긴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여자 혼자 두 아이를 키웠다. 친척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엄마가 나를 낳고 희생한 시간에 상응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내가 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가는 한 늘 엄마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할머니와 친척들도 엄마를 보고 생각했다. 저 불쌍한 집안. 불쌍한 딸이자 여동생, 누나. 보상받아 마땅한 사람. 그리고 나에게는 이렇게 화살을 던졌다.
“엄마에게 잘해야지. 너희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한펀, 집안에서 엄마와 나, 동생 세 식구는 언제나 깍두기였다. 명절에 제사를 지낼 때,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갈 때,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온 가족이 휴가를 갈 때 비용은 모두 큰외삼촌이나 이모 댁에서 부담했다. 엄마는 설날에 사촌들에게 세뱃돈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대신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명절이면 바쁜 며느리들을 대신해 할머니와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할머니는 자잘한 일에도 늘 엄마를 소환했다. 남편 없는 딸의 딸은 더 편했는지, 나보다 더 어린 사촌 동생들을 두고도 꼭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자꾸 이름을 불러 대는 게 좋아서.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친척들과 모이면 혼자 빈 방에 들어가 우는 날이 많아졌다. 콩쥐처럼 미움과 구박을 받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애틋하게 여겨주셨다. 용돈을 주고, 졸업식에 와주고, 자전거며 MP3며 핸드폰을 사주셨다. 하지만 그들의 예쁨을 받는 동안 나는 자꾸 남의 것을 훔치는 기분이었다. 나의 시간이, 나의 사춘기이, 사유가, 취향이, 자존심이 모두 산산히 부서진 것 같았던 이유가 뭔지 설명할 수 없다. 때때로 갖고 싶은 물건을 엄마에게 사달라고 하면 “삼촌한테 졸라 봐”라는 말을 들었다. 의식주 외의 대부분은 내 부모가 아닌 주변인들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정말 갖고 싶었던 것, 무엇 하나 당당하게 갖지 못했다. 내게 너무 과분한 것 같아 눈치를 봐야 했다. 정말 싫었다. 거부권이 없었다. 불쑥 사서 내미는 것들을 받아내며 마음속 거대한 청구서 항목이 채워졌다.
그래, 어쩌면 태어난 자체로 ‘빚’을 진 것은 아닐까?
맡겨 놓은 거 없이 받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반대로 나에게 맡겨 놓은 것이다. 맡겨 놓은 것들을 돌려줄 차례가 자꾸, 자꾸 돌아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운해하거나 나를 괘씸해 하는 것 같았다. 그 감정이 날아와 독촉이 되었다. 그중에는 피해망상이 만들어낸 거짓된 독촉도 있었다. 내가 나를 가장 닦달하고 있었기에.
돈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반드시 어떻게든 빠져나갔다. 엄마는 지금도 본가에 가면 꼭 한 번 이상 돈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보일러 기름값이 얼마가 올랐다, 월급이 밀렸다. 곧 거리에 나앉을 거라는 말까지. 엄마는 내 얼굴을 보면 돈이 떠오르는 듯했다. 엄마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여서 그렇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곧바로 빚꾸러기가 된다.
‘맡겨놨어?’ 라는 질문이 떠오르지만… 그래, 이미 많이 맡겨 놓았다. 단 몇 만원이라도 가진 것을 털어 넘긴다. 그렇게 빈털터리가 된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엄마 생일, 동생 생일, 설날, 어버이날, 여름이면 가족과 여름휴가, 가을이 오면 또 명절이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남들이 누리는 행복은 비슷한 흉내를 내서라도 누리고 싶어 했다. 해야 할 도리도 모두 수행해야 했다. 그것이 싫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살았기에 우리가 버틸 수 있었음을 안다. 내내 비참하리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다만 돌아서면 내가 원하던 내 모습이 저만치 멀어지고 있다.
이제 더는 엄마에게 카드 값을 갚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게 최선의 최선이었다. 나 하나만 잘 건사하는 삶. 그러나 그것도 현재에 한정된 이야기다. 당장 내일도 청구서에 깔려 죽을 수 있다. 아니, 언제라도. 내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엄마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내 것은 ‘물건과 경험’뿐이었다. 타인이 빼앗지 못하는 것은 경험이었다. 물건도 비슷했다. 내 취향이 묻은 물건들. 이상하게도, 이런 물건들은 쉽게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돈을 보면서 “이 돈, 소중한 거야?”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데 물건에는 의미 부여를 참 잘한다. 그 의미를 이용해서 물건들을 지켜냈다.
“그건 선물 받은 거야. 못 줘.”
반대로 말하면 그런 명분 없이는 내 것을 지켜내지 못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면 응당 줘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돈 대신 ‘내 소유물’을 만드는 것도 어쩌면 참 소극적인 방어였다.
‘이건 달라고 안 할 거지? 이건 너에게 필요한 물건도, 네 취향도 아니잖아?’라는 물음이다.
돌아보면 내 물건, 돈, 시간, 모든 것이 마치 공공재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빨리 쓰지 않으면, 누군가 먼저 써버릴 것이다. 실은 나도 나에게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돈을 아끼는 법도, 돈이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잘 모르게 된 것 같다. 돈이 있으면 그것을 빨리 주고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다. 사람들이 뺏어갈 수 없는 걸로. 엄마도 동생도 누구도 탐내지 않는 걸로. 그렇게 바꿔 놓고 나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영혼에는 무언가를 소유할 품이 없었다. 어설프게 받고 거의 돌려주지 못 했다. 어른답게 미래를 설계하기보다는 당장의 충족감을 좇으며 버텨냈다. ‘내가 원하단 나’가 되는 것보다, 살아있는 게 더 중요하다. 하지만 살아내는 것은 청구서를 받는 일이다. 그 대가는 자꾸 과거에 머물게 했고, 가끔은 전생의 빚을 갚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편 독촉이라는 ‘차가운 손’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발목을 잡곤 했다. 잠시나마 희망을 느끼려 할 때도, 스스로를 긍정하려던 순간에도 차가운 현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독촉의 무게는 단 한 순간도 놓아주지 않았다. 한걸음도 내딛기 어려웠다.
이 모든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숫자로 남는 것이 조금 서럽긴 해도,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임을 안다. 그래서 가끔 ‘어쩔 수 없었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반대로 ‘정신 차리자’고 다그치기도 하지만, 결코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존이었으니까.
오늘에 와서 후회 대신 자신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당장 멈추라거나 이제 충분하다 다그치는 내면의 목소리도, 달랜다. 고장난 물건처럼 고치려하는 세상의 시선도 거절한다. 이유를 발굴하고 이해해본다. 충분히 보듬어본다. 이 글을 쓰는데 아주 오래오래 걸렸듯이. 스스로를 기다려 준다. 당장 어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하던 대로 천천히 나아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을 다루는 일은 참으로 고행스럽지만.사람은 태어나서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고 또 울고 싶은 마음으로 울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아무리 작은 상처도 하루아침에 아물지 않듯이 신경 써주지 않으면 금세 덧나듯이. 조금 더 마음에게 마음을 쓰자. 이토록 잘 버텨준 나의 마음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