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가난과 이혼이 한 아이의 삶에 끼친 영향

‘내면 아이’ 같은 소리

by 이로소

내 나이 한 살에 엄마는 첫 번째 이혼을 했다.

일곱 살에는 두 번째 이혼을 했고, 나는 성이 다른 동생을 품에 안고 외할머니댁 옆 집 작은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의 방은 그 집 가장 구석진 곳에 있어 어두 컴컴했다. 일곱 살이 살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마치 지구에서 가장 구석진 곳인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곳에서 행복한 기억도 많다. 그러나 가난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아주 세밀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가난은 엄마와 아이를 떨어트려놓고, 아이의 순수한 마음 안에 걱정과 불안을 심어 놓는다.

두 번의 이혼은 정상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들에게 외로움과 배척감을 가르친다.

부모, 즉 세상에 대한 애착은 제대로 형성될 틈이 없었고,

반대로 결핍은 아이의 키처럼 작은 먹이를 먹고도 쑥쑥 잘만 자라났다.


- <내 슬픔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서>


내가 나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부끄러운 짓을 해보려고 한다. 나의 세계관에서는 이보다 더 가난과 이혼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형틀

가난은 나를 빚어내는 형틀이었고, 나는 절대로 나의 가난보다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대로.

어릴 적에 엄마는 나에게 무척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꾸밀 줄 알았고, 자신감도 넘쳤으며, 여자 혼자서 열심히 일해서 두 아이를 먹여 살리는 원더우먼이었다. 사춘기가 오면서 나는 엄마에게 하나의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엄마는 왜 저렇게 살까?”

엄마의 동년배 여성들은 엄마가 입고, 하고, 먹고, 마시는 것에 참 관심이 많았다. 음식도 곧잘 해서 친척들이 다 엄마에게 음식 비결을 묻곤 했다. 주는 거 없이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아서 엄마를 자꾸 찾아댔다. 엄마는 늘 그런 사람들을 거절하느라 바빴다. 내 눈에 엄마는 가지고 있는 재능과 장점이 너무나 많은데, 공장에서 부품 조립 일을 하는 건 엄마에게 잘 맞지 않는 일인 것 같았다. 저렇게 옷이나 꾸미는 걸 좋아하면 옷가게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 저렇게 음식을 잘하고 좋아하면 식당이나 반찬가게를 해보면 어떨까? 그때마다 엄마는 이 일은 이래서 싫고, 저 일은 저래서 싫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일도 절대 만만치 않은 것 있다. 매일 손톱과 손끝 피부가 갈라져 피가 났고, 충분히 밝지 않은 환경에서 작은 부품들을 계속 보다가 눈이 나빠졌다. 폐쇄적인 분위기에서 일하니 사람들 간의 문제도 많았다. 평생 어떤 직급에도 오르지 못했고, 더 열심히 일해도 더 얻는 건 없었다.

그런 일을 엄마는 25년 동안 군말 없이 해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은퇴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고, 얼마 전 마지막 회사를 나왔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일하고 싶어 한다. “‘요양보호사’만은 정말 하기 싫었는데…”라고 말했지만 결국 당신에게 남은 길이 그것밖에 없다고 채념한 눈치다. 그게 엄마 눈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일들이 돈이 될 거라 믿는 것’보다 쉬운 모양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엄마의 삶이 ‘가난’ 같았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시작한 생산직 일을 평생의 과업처럼 여기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자신의 더 큰 가능성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 조금이라도 삶의 궤도를 벗어나면 소스라치게 두려운 것. 지금 살고 누리는 세상에 애써 만족하지 않으면, 감히 개선을, 나아지기를 꿈꾸면 안 되는 것. 완전히 망할지 모른다는 망상 때문에 모든 희망조차 동시에 차단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가난인 것이다.

그런 진절머리 나는 ‘안주함’을 보고 자란 나라고, 뭐 대단히 다른 삶을 사고 있다는 건 아니다. 엄마가 갇혀있던 형틀에서 나라고 도망칠 길이 있었겠나. 똑같이 잡혀, 갇혀서. 우리 모녀는 어쩜 그리도 닮아있다. 작은 곳에 나를 눌러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은 안전하지만 답답하고, 막막하지만 아늑하다.

내가 엄마보다 더 나쁜 상황에 놓였다고 믿는 이유는 ‘갈망’이라는 바이러스가 침입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갈망이 결여된 사람처럼 살아간 반면 나는 계속해서 뜨거워서 쥐지도 못할 무언가를 계속 다시, 다시 추구하고 만다는 것이다. 어릴 때 순정만화나 소년만화를 보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갈망이 가득한 사람들만 잔뜩 나온다. 나쁜 바이러스다. 나의 형틀은 찢어지지 않는데. 난 이미 무쇠 형틀 안에서 그렇게 태어났는데, 뭘 자꾸 떠나고 싶고, 가지고 싶고, 변하고 싶고,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상실이라는 균열, 이혼과 부재

이혼과 아버지의 부재는 나의 깊은 안 쪽에서부터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게 할,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 생채기 따위가 구멍이 되어 절대 채워지지 않았고. 나는 두 동강이 났다.

내 평생 동안 아버지는 없는 존재였다. 생후 1년도 되지 않아 이혼한 후 단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은 아버지는, 원망할 껀덕지조차 남지 않은 정말 ‘무無’의 존재였다. 원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여러 심리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아버지 이야기가 꽤 초반에 언급되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없는데 정말 그럴 수가 있나요?”

“네, 상실은 상실인 거죠. 부모 중 한쪽의 부재는 본인이 얼마나 인지하는지와 상관없이 큰 공허감을 남기는 거예요.”

공허함. 어딘가 텅 비어있는 듯한 마음이 고작 ‘아버지’의 빈자리 때문이었다니 억울했다. 사실 나는 아버지 따위 없어서 다행이라고 더 자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엄마의 입을 통해 들은 아버지는 이 세상에 다시없을 한량에, 마마보이에, 제 여자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하남자였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 입장’을 들어볼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한쪽의 일방적인 입장만 듣고 아버지를 ‘쓰레기’ 취급하며 살아간 30년의 세월이 휙 스쳐 지나갔다.

‘좀 억울하겠네.’

그때부터 이상한 병에 걸려 엄마에게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가 정말로 쓰레기라면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 확인하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그럴만한 사람이었군. 하고 확신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일말의 진심은…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면… 내 안에 나를 찢어버리고 싶던 마음이 좀 잠잠해질까 싶었다. 내가 나에게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줄까 싶었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 자식의 자녀’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아빠를 만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대학생 때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던 작은아버지가 더 이상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추측에 결정적인 사건은 친할머니가 돌아갔을 때였다. 친할머니의 장례식에 손녀가 왔으면 한다는 전화를 받은 엄마는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하지도 않은 채 거절했다. 그 이후 한 번은 내가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난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는데, 작은 아버지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연락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작은 아버지에게 정말 연락을 취해보긴 했을까? 아버지는 내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도 거부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진정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곁에 있는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도 조금은 외로웠을까? 엄마를 사랑하기가… 상상만 할 뿐이다. 그는 여전히 공허하고, ‘무無’의 존재이고, 나는 여전히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으로 수많은 것들이 빨려들어간다. 그러나 누구도 내 채워지지 않는 구멍에는 관심이 없다. 왜 자꾸 네 근처에 가면 무엇이든 다 사라지냐는 식이다. ‘나는 구멍이 있어서 그런데…’ 주장해본들 내 귀에도 핑계로 들릴 뿐이다.


이런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물음이다.

아니 중요한 건 물음이다.

물음에는 답변이 따라오니까.

나름대로 답변을 따라붙이려다보니 글을 쓰게 됐다.


절대 달라질 수 없다는 믿음을 요목저목 절망시키는 일 : 글쓰기

아, 가난과 이혼은 한 아이의 인생에 ‘절대’를 만들었나 보다.

내 이전까지의 삶은 그 ‘절대’를 거부하고, 거절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친 ‘행위 예술’ 그 자체였다.

내가 이 우중충한 이야기를 서두에 던지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절대’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내 마음의 늪을 어떻게 헤집고 나왔는지 알려주려면, 내가 빠진 늪이 어떤 곳이었는지 먼저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망이 가득했던 나의 삶은 ‘글쓰기’라는 동아줄을 잡고 겨우 구출당했다.

미끄러지고, 무너지고, 머리 끝까지 진흑이 차올라도 나는 이 줄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

그 간절한 움켜쥠이 나를 살렸다.

사실 ‘글쓰기’라는 말 안에 다 담기에는 너무 많은 노력과 고통과 희망이 있었다. 그래도 결국 나의 발버둥은 ‘글’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린다.

나의 투쟁은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존재할 때 나에게 가장 편했고, 가장 사랑스러웠다.


자, 이제 나의 치열한 ‘글쓰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