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소년과 소녀
짧은 청춘의 사랑
노을은 불타고 있다. 바다를 앞에 두고 해변에 소년과 소녀가 나란히 등을 보인 채 앉아있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소녀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닳을 수 있는 데까지 그녀의 곁에 앉아있을 것이라 다짐했다. 소녀는 깊은 관계를 낯설어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러한 소년의 희생이 어렴풋이 느껴졌고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닷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년의 검은 속눈썹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만 같은 대목을 말할 때 더듬는 입술에서,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어두워지는 턱과 인중을 이따금 손등으로 수줍게 가리는 모습에서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인식했다. 소녀는 세상이 말하는 진정한 남자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수줍은 눈 앞의 어린 소년에게서 남자라는 단어를 이끌어내고는 그러한 자신을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어른이 된 것만 같아 뿌듯해진 그녀는 자신이 유치한 행동 뒤에 따르는 분위기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소년과 소녀는 동갑이었지만 소녀가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인식하자 동급이었던 관계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소년은 지금 이 관계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무엇인가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나 나쁜 것임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약간은 두려워진 소년은 이제 마음이 앞으로 나서는 것은 잠시 유보할 단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년이 앞으로 그녀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 대신 다소 낯설고 굳건한 수컷의 날 것인 이미지였다. 소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소녀의 눈코입은 소년의 오른쪽 뺨 바로 옆까지 서서히 다가왔다. 정확한 거리는 소녀의 얼굴로 초점이 가있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어느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이 현실보다는 상상이나 재현에 가까운 장면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반응하지 나는 아까부터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하는 약간의 조바심까지
소년 : 아..
소녀 : 바보같이, 뭐야..
소년은 무수한 고민들을 한마디 감탄사로 치환하여 조용히 그리고 쑥스러이 내뱉었다. 소녀는 약간은 실망한듯 하면서도 예상치못한 소년의 반응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듯, 그를 어느정도 귀엽게 바라보며 그러나 상체를 살짝 소년의 반대 방향으로 젖혔다. 소년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려 할 때 두 청춘의 입은 이미 맞닿아 있었다
어느덧 더욱이 밤
소년 : 노을때문에..
나란히 지평선의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믿으며 말없이 앉아있던 소년이 입을 뗐다
소년 : 빨간거야..
소녀 : ..뭐가?
소년 : 아 내 볼..
소녀의 마음은 더이상 볼과 노을을 구별할 수 없었지만 소년의 볼과 노을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눈 앞의 바다를 보고 있었고 바다도 소년을 보고 있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영원처럼 잠시 지켜보았다 자신의 얼굴에도 벌건 노을이 생긴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예전에 창고로 쓰이던 오래된 헛간의 모습
두 남녀는 그 안에 있다. 사랑이 있다면 이런 형태일까 소년은 텐트장 안에서 모기향을 피우고 있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까보다는 따뜻한 기분이 든다. 소녀의 어깨가 저렇게 가늘었던가 하는 생각도 했다. 모기향을 피우는 그녀가 꽤나 어른같다고 느낀다. 첫 사건 이후 우리를 위해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소녀는 모기향을 텐트 앞에 두고 비스듬히 앉아있는 소년의 옆에 피곤하다는 듯이 누웠다. 소녀는 곡선으로 만들어진 인형같다. 지금이 그녀에게 한 여자에 관해 내가 가진 생각을 모두 말할 때일까? 기회일까? 소년은 하나의 어린 인간이 남성으로서 그러나 가장 예의적인 방식을 통해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애정을 전하고 확인하고픈 충동이 들었다. 남자와 소년 사이에 하나의 인간이 있었고 소년은 이제 소년이라는 존재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그의 세계에선 옳은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소년으로 하여금
소녀 : 너 되게 사람같다 야..
소녀가 누운 채로 나직히 그러나 꽤나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살짝 웃으며 말했다 (소년에게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 : 사람?
소녀 : 응 사람
소년 : ..그게 무슨 말인데?
노란 전구가 멈춘다 헛간을 슬며시 밝혀오던.
소년의 생각이 소녀에게는 보이는 것일까? 소년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실제로 멈춘 것은 아니다
소녀 : 외롭다는 뜻이지
외롭다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덧붙이며 소녀가 말했다. 그곳에 마치 소년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 음성은 소년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어느 둘 사이를 오가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그를 다독이는 말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구원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소년과 소녀는 어떠한 선택의 영역에 다다르는 대신 서로를 오가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눈빛이었겠지. 그 다음으로는 미성숙한 몸이, 그리고 마지막엔 성숙해진 영혼이 오갔을 것이다. 피워둔 모기향의 연기 때문에 두 남녀의 실루엣이 점차 어두워진다. 텐트의 가림막이 그물처럼 그들을 덮칠 때 이 초등학교 여름방학 같은 소설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