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소년과 1
1로 회귀하는 소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
놀이터, 일몰
소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진실성과 사랑, 그리고 소녀라는 단어
소년이 처음으로 소녀를 발견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첫 수업이 끝난 방과후 학교. 학교 뒷문 뒤로 위치한 허름한 놀이터에서 소녀는 쭈그리고 앉아 작고 긴 나뭇가지로 모래를 긁고 있었다. 소녀는 말이 없고 저녁이 오면 일몰처럼 사라져 버릴 것처럼 왜소했다. 미끄럼틀보다 길고 소녀의 몸보다 굵은 놀이터의 나무들이 만드는 그림자가 곧 소녀의 작은 세상을 넘을 것만 같을 때
소년은 슬며시 소녀의 뒤로 다가가
고양이?
아니다. 저건 개야.
소녀가 긁고 있는 것은 아니 그리고 있던 것은 작은 강아지의 얼굴.
강아지를.. 왜 ..
소녀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귀여운 그림과는 달리 진지하게, 너무도 무심한 표정으로 맹렬히 땅을 긁고 있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소녀가 만드는 예술과 그 예술을 만드는 또 다른 예술을 지켜보았다. 미묘한 시간들이 차츰 지나면서 소년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그림 위를 덮기 시작하자 소녀는 손목을 멈췄다. 소년은 소녀가 굴리던 작은 세계를 멈춰낸 최초의 인간.
소녀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거기서 뭐해?
내가 보이긴 하는구나. 소년은 생각했다 마치 투명인간의 초능력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처럼. 그냥 서있지 뭐. 그냥 왔어. 그런 대답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그냥이라는 단어가 소년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녀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단지 메아리를 바랐다.
너 되게 웃기다
소녀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무엇이 웃기다는 것일까. 이 순간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는 앉은 채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자신을 쳐다보는 소녀의 무표정에 가까운 미소를 보게 되었다. 소년은 웃기다는 말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됐다
이야기
다른 인연이 그렇듯 소년과 소녀 또한 서로를 운명이라 믿으며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믿음 이전에 사실이기도 했다.
간판이 기운 분식집. 해석할 수 없는 네 개의 눈웃음. 차도의 축구공을 쫓는 그림자. 서로의 머리를 툭툭 다듬는 방식. 모래에 누운 검은 머리카락들. 숨을 맞대는 눈 코 입. 따뜻한 햇살과 바람. 나뭇잎과 넓은 운동장. 소년과 소녀가 만들어낸 것들. 시간을 스치듯 달려가며, 그리고 지나가는 여름과 다가오는 겨울. 지나갔던 여름과 지나가는 겨울. 몇 번의 봄과 가을. 그런 무수한 장면들을 거치고. 행복의 난발. 이런 날이 우리에게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소년과 소녀가 기도처럼 살아가기 익숙해질 때. 어느 날 눈부신 주말 오전 운동장에 어제와 사뭇 다른 소녀가 소년 앞에 불쑥 나타났다.
도훈아..
소년은 운동장 바닥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소녀를 봤다. 약속 시간보다 늦었네 말하려다 말았다. 무슨 일 있구나. 소녀는 분명 아프고 화난 것 같은데 소년에게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의 머리는 누군가 잘랐을 것이다. 그 너머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소녀는 떨고 있다. 무서워. 입술을 다물고 말하고 있다. 입술을 이로 물고 있잖아.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떨구고. 고양이를 개처럼 그리던 아이였는데. 고양이를 개처럼.
소년은 소녀를 따라 떨기 시작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둘은 몇 분을 말없이 서 있었다. 소년은 소녀가 차라리 울기 바랐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명확한 무언가가 생길 것 같았다. 그 전에는,그 전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소년은 단지 소년이었다. 소녀도 소년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질문은 표현과 같아서 대답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소녀는 역시 소녀일 뿐이었다.
울지마. 아니. 울어달라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할지. 소년은 고민했다. 너의 곁에 있을 것이란 확신 대신 소년이 소녀에게 보여왔던 것은 꼬집고 놀리기, 가끔 함께 달리고 마주보고 웃기와 같은 사소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면 소녀는 이따금 웃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녀를 꼬집을 수도, 놀릴 수도, 마주보고 웃을 수도 없다. 소년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소년의 머리에서 생각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년은 지금 해야 한다고 느껴지는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자.
소녀의 팔을 잡아 끌고 앞서 걸어갔다. 스스로와 소녀를 망친 세상에 대한 분노가 그와 그가 사랑하는 소녀를 뒤에서 떠밀고 있는 듯했다. 소년이 이따금 뒤돌아볼 때면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소년이 자신의 얼굴을 온전히 보지 못하도록 했다. 소년은 책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소녀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주말에는 운영하지 않는다는 공지문을 뒤로하고 소년은 도서관 현관문의 위아래 잠금을 차례대로 풀었다.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는 평소보다 둔탁하고 무거웠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차가웠다. 초록색 문 뒤로 어둡고 길다란 복도가 보이고 소녀는 생각했다. 두려운 것은 안에도 밖에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을 때, 어디로든 가는 것이나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은 똑같다고. 소녀에게는 갈 곳이 있었으며 동시에 없기도 하다고. 소년이 가야 할 곳은 소녀가 있는 곳이었으므로 소년은 어쩌면 소녀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선택할 수도 선택을 당할 수도 없다면, 운명에 맡길 수도 운명을 만들 수도 없다면 우리는 함께 있어야 한다. 소년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립 도서관
두 개의 그림자가 서가의 왼쪽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일몰의 빛 일부 속에서 얼룩처럼 일렁인다. 그 날 소녀는 여태까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던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소녀가 무언가를 기르겠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이 고양이였는지 개였는지,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TV가 있는 집의 소파. 그게 소녀의 진짜 꿈이었다. 소녀는 어쩌면 실제로 소파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조그만 입술만을 중얼거리며 이야기했으므로 소년은 소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소녀가 말하는 TV가 물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과 소파가 위치한 바닥에 크고 검은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을 소년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소녀가 사실이라고 명확히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을 긁어내다 보면 기쁨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슬픔을 파내다 보니 어느 순간에 바닥이 보이더라고 (사이) (소년은 말없이 듣고 있고) 그때 알게 됐어. 나에게는 쌓아 놓은 기쁨이 조금도 없었구나. 그렇다면 공허한 바닥대신 부스러기 같은 슬픔이라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슬픔을 없애지 말자고
소녀가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순간 소년에게 불현듯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소녀가 느끼기에 소녀에게 기쁨이란 전혀 없었던, 또한 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과연 소년과 소녀가 여태까지 만들어온 날들 또한 소녀에게 기쁨이 아니었다는 뜻일까?
그럼 우리가 했던 일들은..
그것도 슬픔에 가까운 것들.. 인가..?
소년이 희미하게 웃으며 소녀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어떤 위로의 말보다 앞서가서.
아니야 그런건 아니야..
그렇지만..
소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물었다. 그리곤 멍하니 서가 너머로 도서관의 빈 천장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도 뒤따랐다. 공유하던 세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하는 듯 서로의 등에 기대어 멍하니 함께 위를 응시했다. 그 뒤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주황색 램프등을 두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하루가 지난다.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소녀와 그를 구원처럼 끌어안은 소년. 서로를 쓰다듬고. 몇 번의 눈 마주침.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들과 동시에 떠나고 싶다는 마음들. 작은 등의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청춘. 잠과 숨소리. 살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소녀의 혼잣말. 살 수 있다고 믿는 소년의 포옹. 그런 것들과 밤이 함께 뒤엉켜 지나가면
서가 사이로 혼자 남은 소년이 누워 있다. 그 날 아침을 끝으로 소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소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일어서며 소녀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소녀가 끌어안고 자던 빨간색 책을 주워들었다. ‘무너지는 폐허’라는 제목의 장편소설. 카운터 목록표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대출 기계에 책의 바코드를 찍었다. 언젠가는 책을 찾으러 오겠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면서도 소년은 문 밖으로 나섰다
앞으로 펼쳐질 것은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억을 시간과 또 다르게 생겨나는 에피소드들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이후 수많은 사건들을 지나가며 점차 소녀를 잊어갈 것이다. 소년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정확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년에게는 이제 소녀가 없으므로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잊기 위해 남은 생의 모든 시간을 바치게 되겠지. 구원의 반대편에는 너무도 길고 가혹한 길이 있었구나
소년이 하는 생각은 주관적으로만 시간을 되돌릴 뿐
진정한 사랑이란 세상에게 단지 사소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소년은 서울로 이사를 갔고 중학생이라는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소년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시나, 소설, 희극을 배우는 국어시간에 종종 소녀가 생각나고는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사회 수업과 철학수업에서, 이성 간의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시간에서, 전쟁통에서도 남녀가 사랑했다는 사담을 던지는 선생님의 역사시간에도 가끔 그랬다. 그 외의 시간에는 엎드려 있거나 대다수의 청춘들이 그렇듯 의미 없는 진로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소년에게는 사실상 창 밖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다. 그러한 삶의 방식에서는 시간은 느려도 숫자는 빨랐다. 달력은 파도를 만난 모래처럼 휩쓸려 넘어갔다. 매일 똑같은 옷, 똑같은 등교시간, 똑같은 점심과 아침을 먹으며 서서히 기억을 잊어갔다. 잊어갔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소년은 소녀의 기억을 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소년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수록 비참해진다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쉽고 잊어버리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바라지 않은 척을 평생 하다 보면 실제로 바라지 않게 되겠지 생각했다.
교실
혼자 다니는 중학생 3학년의 소년을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또래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친구들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소년은 그들을 인간들 혹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아니 그 여자애 내가 만지니까 팍 하고
아주 그냥 (사이) 스읍.. 어?
둘러싸인 무리 틈에서 가장 키가 큰 인간이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소년 쪽을 본다. 인간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소년에게 다가온다.
야 도훈아
너는 뭐.. 저기 (웃음) 뭐 아무것도 없냐?
소년은 아무 말없이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소년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지쳐 있었고 또다른 무언가를 더 이상 사랑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정이나 친구 같은 건 아직까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맞이해본 적도 없었지만.
에이 됐다 야 .. (사이)
쟤는 끝까지 저러네
청년이 키득거리는 인간들 틈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동안 소년은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또 다른 인간을 – 그녀는 앞자리에 앉아있었는데 - 발견했다. 소년은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모습에서 소녀와의 첫만남이 생각났다. 소년은 창밖을 보는 것처럼 잠시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잠시동안 그녀와 소녀를 구별할 수 없었다. 교실에 일몰이 드리웠고 그곳엔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 커다란 나무가 존재했다. 널브러진 나뭇가지가 그녀의 책상에 난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실눈으로 소녀 주변의 풍경을 고쳐 보며 소년의 상상은 실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망상이 아니었으면. 소년은 중얼거리고 일어서서 그녀에게로 걸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인간들은 재밌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는 듯이 소년을 본다.
야,
소년이 부르면 그녀가 기다렸지만 의아하다는 듯 뒤돌아보고
3학년 건물 입구 옆 벤치, 방과후
나는 너가 말하는 거 처음 봐 크크
그녀가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말했다. (있잖아 나는 너가 먼저 말을 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근데 오늘 받은 거 그거 장래희망에 뭐 써서 낼 거야? 나는 디자이너 같은 거 쓰려고. 멋있잖아. 근데 아직 모르겠어. 너는?) 그녀는 도무지 끊임없이 말하는 아이였다. 소년은 피식 웃음이 났다. 재밌는 친구구나. 소녀만큼은 아니지만 그 모습이 꽤나 귀엽다고 느껴졌다. 소녀 말고 다른 이에게도 그러한 친절한 단어를 써도 되는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럼으로써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잊을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소년은 아직은 자신이 그녀를 보는 것인지 소녀와의 기억을 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냥.. (숨을 들이쉬며) 뭐.. 차차 생각해보려고..
소년은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앞으로 숙였던 상체를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어
야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녀가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털어 넣으며 웅얼거리며 말했다. 해맑게 웃으며. 그 모습이 꼭 그녀가 근심걱정없이 자라온 사람 같다는 생각을 심어주지는 않았다. 단지 맑은 사람이구나. 소년이 건너온 세상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여자일 것이다. 생각했다.
됐어 야 들어가자.
소녀는 학교 도서관으로 가는 통로를 지나쳐 교실이 있는 현관 입구로 뛰어 들어가며 소년에게 손짓했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고 과거 소녀와 도서관으로 뛰어갔던 그날의 풍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여전히 눈에 겹쳐 보였기 때문에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사는 사람 같았다. 소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해맑게 뛰어가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그랬어야만 했다. 소년은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행복해진다면 느끼게 될 죄책감을 버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년과 그녀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둘은 몇 년간 꽤나 사이좋은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타인이 보았을 때 그저 평범한 친구 혹은 연인사이에 불과해 보이는 수준이었지만, 소년이 어릴 적에 잃었던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 구축해낸 세계 또한 상실했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이며,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느정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들의 우정 혹은 사랑이 부족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게, 끝
야.. 너.. 대학은?
소년과 그녀는 명찰이 달린 교복을 입고 이전보다 길어진 몸으로 햄버거 가게 안에서 마주 앉아있다. 소년은 수능을 치며 옮겨 놓은 숫자가 적힌 작은 종이와 휴대폰 화면속의 정답표를 번갈아 보며 종이 위에 펜으로 O, X 표시를 하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됐다. 말을 말자.
그녀가 첫만남에서 먹었던 샌드위치를 연상시키는 햄버거의 빵을 손으로 조금씩 때어먹으며 툴툴거리며 말했다. 있잖아, 도훈아 나는 너가.. 아니 우리가.. 그녀답지 않게, 혹은 그녀답게 아주 가끔씩 우울해져 들뜬 목소리 뒤로 칭얼거리며 했던 말처럼 웅얼거리며 그녀가 이어 말하려 할 때
우리 그만 만나자
도훈은 마지막으로 표기된 번호에 X를 그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 허리를 등받이 쪽으로 기대면서.
그녀는 울지 않았다. 어.. 와 같은 짧은 단어나 어?와 같은 놀람의 표현 또한 뱉지 않았다. 단지 눈을 여러 차례 끔뻑거렸고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다. 앞으로 당긴 고개를 뒤로 뺐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그 모습이 그녀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가장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와 소년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 첫만남의 장면을 연상시키려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그래 알겠어
해맑으며 동시에 아픈 웃음을 보이고 그녀는 떠났다. 소녀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영원히 소년 곁을 떠난 것이다. 과연 정말 영원히 떠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소년은 영원이라는 단어를 느끼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가 떠나고도 오랜 기간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옛날 소녀에게서 약간의 눈물을 보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제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 눈물이 정말 있었던 것인지도 의문스러웠지만, 중요한 것은 좀 전 그녀와 헤어질 때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역시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소녀만큼이나 나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어. 소년은 실제로는 자신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했다.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몇 년에 걸쳐 지켜본 그녀는 소녀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당연했다. 둘은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나 소년은 거의 3년에 걸친 시간동안 그녀를 단지 성숙해진 소녀로 여겼다. 그녀에게 ‘야’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했고 되도록 그녀의 이름도 잘 불러주지 않았다. 그녀도 그녀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소년에게 있다는 것을 느껴왔을 것이다. 그것이 소녀이든, 어떤 기억이든 간에 말이다.
그녀는 치킨을 좋아했다. 치킨을 매우 싫어하는 소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녀가 치킨을 먹을 때면 그녀가 소녀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 – 그녀가 소녀의 성숙한 버전이 아니라는 사실 - 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소년은 그녀와 교제할 동안 치킨과 치킨을 먹는 그녀를 싫어했다. 치킨은 둘 사이의 결별을 예견하는 사소한 비유이자 시작이었고, 나아가 그녀와 소녀가 일치하지 않는 모든 선호와 취향을 확인 당하며 소년은 괴로워했다.
그녀는 소녀와 달리 도서관과 책을 싫어했으며 독서를 할 짓이 없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안타까운 취미로 취급했다. 또한 소녀가 좋아했던 인디 밴드나 발라드 음악 대신 힙합과 락을 즐겨 들었다. 소녀와 다르게 산책을 싫어했으며 사색이나 휴식보다 페스티벌과 파티를 좋아했다. 소년에게는 오로지 둘의 다른 부분만이 거슬렸다.
사랑과 우정은 그 자체로 생성부터 소멸까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지 비교의 대상으로써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소년에게 그녀와의 기억들이 바로 그러했다. 소년은 지금은 과거가 된 그녀와의 기억과 더 과거에 있었던 소녀와의 기억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그녀와 교제하는 내내 사랑의 정도를 따졌다. 물론 소년의 인식 속에서만 이루어졌던 일이므로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잘못한 점은 없었다. 단지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재수
좁은 세계에 나를 가두면
모두 잊혀지지 않을까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곧 자기 자신을 기숙학원에 등록했다. 청년 한 명, 유일한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소녀이 떠난 뒤로 20살까지 모아둔 돈을 모두 학원비에 썼다. 나머지는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몰두했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입시 제도에 자신을 완벽히 끼워 넣었다.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과 강박증을 가진 환자를 구별할 수 없었다.
소년은 매일 똑같은 허리 각도로, 똑같은 목의 높낮이로 앉아서, 매일 똑같은 샤프로, 똑같은 표정으로 책을 보고 문제를 풀었다. 마치 자신 내부의 의문점을 풀려는 사람처럼.
그러는 동안에 소녀를 만난 시점 이후의 시간들이 지워졌다. 샌드위치를 잊었다. 그녀와 갔던 시끄러운 파티장과 그녀의 명쾌한 성격에 잠시 설레었던 기억도 사라졌다. 그녀와 관련된 것들을 간단히 잊었다. 3년의 지속성이 비참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떤 졸업과 입학도, 대부분의 인간들도, 교실과 창문의 햇빛, 고등학교의 벤치와 풍경들도 모두 사라졌다. 소녀 이전의 기억들도 잇따라 없어졌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의 명칭만 어렴풋이 남았다. 나중엔 이 마저도 기억나지 않게 될 것이다. 유아기의 기억도, 친구라고 불리는 이들과 다투었던 기억도, 부모에게 혼났던 기억도, 담임선생님의 이름도, 심지어 그 당시의 소년의 취향과 이상까지도 모두 잊었다.
소녀를 제외한 모든 기억을 소멸시키며 소년은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무표정했다. 이 또한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의 마음에도 눈코입은 없을 것 같다. 소년에게 진실성이란 당연히 지켜야만 하는 마음이었다. 조금만 행복해지면 거짓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소년을 괴롭혔다. 이겨내고 자신 안에 거짓 없는 삶을 이뤄내겠다 다짐했다.
소년에게 남은 것은 샤프와 시험지, 그리고 소녀에 대한 잔상 뿐이었다. 대입이라는 결과 또한 목표가 아닌 수단에 불과한 것. 좁은 세계로의 투신을 통한 과거로부터의 이별이 당시 소년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대학에만 입시원서를 넣었다. 모든 사람들이 소년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소녀가 있었다면 그를 유일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귀하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소년의 손에 합격통지서가 들려있다. 소년은 곧바로 학원에서 모든 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쟤가 원서 하나만 넣은 애라며?. 대박이다. 야 도훈아 축하한다. 잘됐어 임마. 소문은 학원 밖으로도 퍼졌다. 먼저 성인이 되어있던 한 청년의 전화도 받았다. 때문에 잠시 그녀가 문득 생각났지만 곧 있었다. 부모의 진심 어린 기쁨은 자기 자신에게는 소홀하게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전화와 형식적인 대화를 거쳤다. 그리고 1시간 가량의 인터뷰를 몇 개. PD의 요청에 따라 기억을 잊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다는 대답은 편집되었다. 소년의 1년의 노력과 그 이전의 시간들은 이제 몇MHz의 주파수로 치환됐다.
실내 스튜디오, 적막
소년만을 비추는 탑 라이트. 소년의 등에는 수십가지 종류의 나뭇가지가 아름답게 자라나고 있다. 어떤 곳에서도 열매를 찾아볼 수 없는. (소년 MHz: 최선을 다했습니다… 치직.. 하하 목표가 있다면 노력하는 거죠… 치지직… 고생많으셨습니다…) 가지의 뿌리는 소년의 피부 아래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소년의 살은 균열됐으며 찢어졌고 사막처럼 등은 갈라졌다. 푸석하고 삭막한 살 사이로 가시처럼 나무가. 고통스러울 텐데 소년은 왜 울지 않나. 뿌리의 근원은 여전히 하나의 기억이니까. 눈물없이 모아둔 수분은 풍성한 나무가 자라는데 쓰일 것이다. 그것이 가짜일지라도
편의점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청년이 말했다.
야 괜찮냐? 그러게 술 좀 일찍 배우라니까
아.. 나도 몰라 이럴 줄 알았나..
그래도 너 뭐 이제 인생 폈지 잘됐다
소년은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슬며시 웃다가 테이블과 함께 옆으로 엎어진다. 소주잔과 액체, 여러 개의 술병과 과자들이 함께 무너진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제와 오늘의 삶. 내일이란 현재의 배경처럼 어디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것.
나 잘된 걸까. 통속적인 대화들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어. 너의 흔적이 없는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어. 사람들은 내가 시작부터 성공했대. 모두가 잘 될 거래. 난 처음부터 실패했고 숨어 살고 싶었을 뿐이야. 이젠 모두가 나를 아는 것 같아. 아무것도 지우지 못하고 다시 살고 있어.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살아는 있니. 너를 지우고 싶어. 사실은 지우지 못해. 너를 죽을 만큼 원망하고 미워해. 살아있다면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변화가 있었으면, 내가 알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나는 더 이상.. 나는..
소년은 충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배설했다. 말과 생각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한 소년은 한참을 방황하고 괴로워하다 시간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눈을 떴다. 어두운 천장의 찌그러진 조명과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 붙잡히는 책상의 모서리, 그리고 그 위의 잡다한 필기구들의 촉감을 통해 소년은 자신이 있는 곳이 자취방 위의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해방되지 못한 것이었다. 소년은 아무리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는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너무도 선명한 현재라는 시간이 소년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소년의 뒤로 스쳐 지나가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데 소년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우두커니 살아있다. 소년은 단 하나만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기억과 시간, 추억, 미래, 기쁨과 같은 관념이 마침내 천장과 함께 돌기 시작할 때 소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눈동자에서 출발한 물은 분노와 슬픔은 구별할 수 없다는 듯 용암이 되어 소년의 몸을 감싸고 바닥으로 흘러간다. 모든 것이 타오르고 불길에 휩싸인다. 책상과 필기구, 청년과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과 참고서와 교재들, 소년이 즐겨 읽던 책들, 햇빛을 가리던 커튼과 달력, 벽지와 옷걸이, 침대와 침대 밑으로 버려 두었던 물건들. 모두 재가 될 것이다. 재가 되면 다시 불을 붙일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까지. 소년은 잊지 못하는 장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절규처럼 타오르는 배경과 자신을 보며 울부짖는다. 자신과 눈물을, 물과 불을, 현재와 과거를 그리고 현실과 상상을 구별할 수 없었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무너지는 폐허라는 제목을 가진 큼지막한 소설 한 권 외에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무너져 있었다. 소년은 며칠에 걸쳐 주변을 정리하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전했다. 청년이 그에게 앞으로도 고생하라고 악수를 건넸다. 소년은 곧 합격한 대학교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대학교
문이 열리고 소년이 들어온다. 기숙사는 2인실이다. 먼저 온 남학생은 책상에 앉아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식물이 나오는 영화였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소년은 짐을 풀고 자신의 책상 위에 앉아 무너지는 폐허 책을 놓았다. 꽤나 늦은 밤이라 스탠드 조도를 두어 단계를 높였다. 떨어지는 노란 빛 안에 우두커니 위치한 책의 커버를 지켜보았다. 다홍빛 단색 배경에 흰 글자로 된 제목을 가진 그 책을 소년은 단 한번도 펼쳐본 적 없었다. 다 읽게 되면 소년의 이야기도 끝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책을 읽은 뒤 소녀의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소년의 등을 툭 쳤다. 그 남학생이었다.
같이 가자
소년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야
남학생은 쭈그려 앉아 주사기를 나무의 뿌리가 있는 땅 깊숙이 꼽으며 말했다. 나무 잎사귀들이 달빛을 가리고 있어 모든 대상들이 다소 어두워 보였다. 그럼에도 주사기 안 액체가 차츰 줄어들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흡입의 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일어선 채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학생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과연 이 같은 행위가 실질적으로 나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남학생의 행동은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었으므로 소년은 더 이상의 의문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왜 하필 나무인데?
그야 아무도 해치지 않으니까..
소년이 물을 때 남학생은 옆 자리의 나무로 엉덩이를 옮기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주사기를 들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무를 기르는 거대한 공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소년이 생각했다. 먼저 돌아가도 좋아. 남학생이 슬쩍 뒤돌며 말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 기숙사로 돌아갔다.
소년은 그날 새벽 동안에 나무와 그 남학생에 대해 생각했다. 나무를 기르다니 신기한 사람이다. 소년은 소녀 이후 자신이 사람에게 약간의 호기심이라도 생긴 것에 대해 신기함을 느꼈다.
기숙사로 돌아온 소년은 무너지는 폐허의 첫 페이지 -1- 을 펼쳤는데 그곳엔 편집자의 실수로 인한 것인지 공허하게 텅 비어 있는 종이만 존재했다. 두려워진 소년은 곧바로 책을 덮고 간단한 샤워를 한 후 잠에 들었다. 꿈을 꾼 것인지 창문밖으로 우연히 본 것인지 정확하게 소년이 기억해내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상록수 나무의 뿌리 근처에 수십개의 주사기를 둥글게 꽂아 놓고 흙바닥에 엎드려 있는 남학생의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자신에게 주었어야 하는 물을 나무에게 준 것은 아닐까. 소년은 그런 상상을 하다 늦게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남학생은 기숙사에 없었고 소년은 대학교의 첫 교양수업의 OT를 들으러 강의실 뒷자리에 가 앉았다. 소년에게 캠퍼스에 대한 기대와 성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수업이 끝난 후 기숙사로 돌아가 남학생에게 어제의 일에 대해 할 질문들이 남아있었기에 소년은 약간 즐거웠다. 그리고는 자신이 꽤나 오랜 시간동안 소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라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은 소녀가 떠난 뒤로 소년에게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다림과 감각을 즐길 여유도 없이 갑자기 앞자리에 앉아있는 한 여자가 일어나 창밖을 가르키며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동요되기 시작했고, 교수가 급하게 사람을 부르겠다며 자리를 떠났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난잡하게 들리며 교실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창 밖의 나뭇가지에 어제 기숙사의 그 남학생이 길다랗게 걸려있었다.
시체다. 시체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은 남학생에게 시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남학생으로부터 멎은 숨소리도, 뛰지 않는 맥박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단지 무표정하게 나무에 걸려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시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단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 그에게 주사기와 물에 대해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있어서도 아니었다. 소년은 바로 자신이 여전히 잊지 못하는 단 하나 – 소녀와 기억 – 로 인한 비참함을 그 남학생에게 투여하고 있었다. 왠지 그의 죽음이 소녀의 부활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그 이미지를 목격했던 몇 명의 사람들처럼 구토를 시작했다. 그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소년은 그날 특별한 사건 즉, 누군가의 괴상한 죽음마저도 과거의 기억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 당했다. 잊을 수 있다는 희망은 창밖의 나뭇가지처럼 꺾였다. 공허한 남학생의 눈이 소년에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너는 벗어날 수 없어.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어.
소년은 마치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네모난 창문은 프레임이고 남학생은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배우일 것이다. 남학생은 주인공이었고 그가 죽었으므로 영화는 끝났다. 엔딩 크레딧은 언젠가 나타날 것이지만 소년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소년이다. 영화에 대한 예의가 없는 관객들만이 소란을 피우며 극장을 떠났다. 여전히 토를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시간이 얼만큼 흘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체는 이미 엔딩 크레딧에 박힌 활자들처럼 미끄럽게 흘러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영화관에 남아있는 소년에게 허리가 구부러진 청소부 노파가 다가와 버릴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놀랍지도 않으세요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소년은 생각했다. 이런 일은 너무 흔하단다 아가 소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노파가 웃으며 대답했다. 소년은 노파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본 것만 같았다. 꿈틀거리는 노파의 주름에서 예약된 것만 같은 재앙을 느꼈다. 소년은 두려움에 뒷걸음질쳤다
후기
소년에게는 그날 있었던 기이한 일들 전체가 상상 속의 사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실제로 망상에 불과한 장면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죽음은 분명 가상의 것이 아니었다. 사건 이후 남학생의 의문스러운 자살을 학교 바깥으로 퍼트리자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 사람들을 반대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자보가 붙었고, 얼마되지 않아 대자보는 훼손되었다. 학교의 복도와 산책로, 교실, 식당 모든 곳에서 남학생의 이야기가 들렸다.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며 화를 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며 화를 냈다. 소년은 이제는 1인실이 된 기숙사에서 이따금 남학생이 자던 침대 위에 누워 조용히 그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진정 어린 추모의 한 방식이었고 그 외에는 남들처럼 특정한 행동이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학교 앞 꽃집에서 작은 선인장 화분을 하나 사 그의 머리맡 자리에 놓아 두었다.
죽음 이후로 소년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대학 생활을 거쳤다. 성적으로써 알파벳이 난무하는 학교의 다양한 수업들을 들었으며 몇 개의 자격증 준비와 언어공부를 했다. 몇 명의 형식적인 친구들을 만났고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의 주기적인 모임 술자리를 가졌다. 깊게 취할 때면 이따금 청년에게 전화를 걸었고 서로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군대에 있기 때문에 이전만큼 자신에게 재밌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가끔은 칭찬을 들었다. 애정의 표현으로써 과감하게 신체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성들과 몇 번의 만남도 가졌다. 기점과 기점들이 모여 시간은 끊임없이 소년을 떠밀었다. 어떤 것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소년은 어쩌면 이미 잊은 것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함으로써 특정한 기억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더 이상 소녀의 얼굴이 선명하지 않았다. 이젠 소녀가 건넸던 수많은 말들이 그가 지나온 거리만큼이나 까마득했다. 소녀가 그리던 것이 개였는지, 고양이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녀가 앉아있던 놀이터의 모양새가, 소년 자신과 나무 그림자의 길이가, 공립 도서관의 입구가, 그 날 함께 보냈던 새벽의 모습이.
돌이켜보면 시간은 빠르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빨랐고, 느리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느렸다. 문학적 표현보다는 사실에 가까웠다. 대학교 3학년이 끝나갈 즈음 소년이 생각하기를 영원한 것은 몇 개 되지 않는구나.
이미지
‘노블리스’는 무너지는 폐허라는 소설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였다. 소년은 겨울방학을 코 앞에 앞둔 <이미지의 단상> 수업 마지막 차시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온 지 오래된 소설이지만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에서야 안목 있는 편집자에 의해서 발견되어 영상화 되었다고 했다. 각자들 편집해보세요.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영화의 원본을 각자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에 불러왔다. 이전에 다같이 관람했던 영화에는 없던 장면들이 몇 보였다. 소년은 머리가 헝클어진 한 소녀가 뜨거운 일몰 사이에 우뚝 서있는 숏을 반복 재생했다. 마치 소녀와 마주친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그 장면은 생생하게 소년의 눈을 뚫었다. 슬로우 모션이 걸린 클립의 편집효과처럼 소년만이 수많은 학생들 속에서 느리게 흘러갔다. 우연히 스치는 통상적인 일상들을 강박과도 같은 기억의 연장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전처럼 소년의 심장이나 머리에서 발생했던 울림이 이제는 없었다. 소년의 시신경은 마침내 현재에 존재하고 있있다.
모든 학생들의 의견이 달랐다. 어떤 이는 놀이터를 클로즈업했다. 또 어떤 이는 영화 속 소년이 나오는 장면을 모조리 잘라냈다. 누구 하나의 관점이 중요하지 않은 듯 교차편집을 시도한 학생도 있었다. 소년은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하나의 의견이었다. 교수는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모든 이들의 시선은 다를 수 밖에 없다고, 그리고 모두 마지막까지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고생이 많았다. 중얼거리며. 소년은 고향에 내려오는 기차에 머리를 기대고,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산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역에서 건 소년의 전화를 청년은 받지 않았다. 소년은 군대 동기들로 추정되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그의 단체사진을 SNS에서 본 적 있었다. 바쁜가 보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고향은 몇 년 만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날들을 건너왔네.
소년은 패딩 주머니에 양 손을 굳게 넣은 채 입김을 불며 운동장과 놀이터를 둘러보았다. 잊기에 평생이 걸릴 거라 다짐했던 이미지들은 느리고 침착하게, 그리고 순서대로 소년에게 들어왔다. 어느 곳에서도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중첩되는 이미지들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발과 흙 사이의 마찰 소리만을 순간에 간직하며 걷고 또 걸었다. 놀이터 나무에 기대어 가방에 넣고 온 책을 잠시 펼쳐볼까 싶었지만 끝내 열어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소년은 공립 도서관 카운터에 책을 놓으며 말했다. 소파에 앉아 조그마한 TV로 아침드라마를 보고 있던 사서가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왔다. 사서는 소년을 잠깐 쳐다봤고, 책의 바코드를 찍었고, 정말 오랫동안 읽으셨네요. 도훈님 맞으시죠 하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뭔가 기다리게 되더라구요. (웃음) 하도 특이한 기억이라.. 벌써 오래전 이야기네요
아 네…
이전에 책 찾는 분이 한 명 계셔서 안 그래도 하나 더 살까 싶었거든요. 그때 빌려 가신 걸 알고 ..
사서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옛날에 그 책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이미 빌려간 사람이 있다고 말하자 이름을 알 수 있느냐고 다시 되물었다는 것. 개인정보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하자 못내 아쉬워하다 돌아갔다는 것.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여자가 우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울지는 않았다는 것. 그 외에 것들은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이 일이 벌써 3, 4년 정도는 지난 일이라는 것이었다.
공립 도서관을 빠져나올 때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소년은 바닥에 주저앉아 늘어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고 대기는 서서히 차가워졌다. 마셔야 할 숨들은 모두 소년에게 곤두박질쳐 들러붙었다. 더 어두운 영역에는 점차 파란 빛들이 드리웠고 곧 시야의 가장자리에서부터 핏줄처럼 나뭇가지들이 생겨났다. 소년은 자라나고 있었다. 깊게 머금은 수분들은 눈동자 대신 더 아래로, 곧이어 소년의 발 밑의 땅을 향해 뻗어 나갔다. 세상은 일몰을 향하는 거대한 바다로 가득 찼다. 엉켜진 놀이터가 멀리 보였다. 소년은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갔다.
*
땀에 흠뻑 젖은 채 소년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둡고 고요한 새벽의 운동장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소년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분명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소년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