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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ul 24. 2018

나혜석의 말과 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2 (민음사, 2018)


*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민음사






 나혜석의 말과 글


<경희>, <<여자계>>,1918

이 작품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여성 경희에 대한 주변의 시선에 경희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신여성에 대한 세간의 풍문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경희를 두고 경희의 어머니, 아버지, 사돈 마님, 떡장사, 시월이가 하는 말은 모두 그 풍문을 반영하고 있다. 경희는, 그리고 나혜석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나혜석은 <경희>에서 여성의 고정된 성 역할에 만족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여자이기 전에 사람임을, 배우고 아는 것이 사람임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집안일을 잘하고, 얌전히 집안에 앉아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지식인이 봉건적 가부장제의 구시대적 인습에 맞서 싸우며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을 담고 있다. 


"경희의 입술은 간질간질하였다. '먹고 입고만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알아야 사람이에요. 당신 댁처럼 영감 아들 간에 첩이 넷이나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가 시집가서 시앗(첩)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고 싶었다."(31쪽)



근대 교육을 받았고 주체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혜석 그 자신도 조선의 사회와 조선의 가정에서 자라온 1910년대 여성이기에 한계도 있었다. 경희가 아버지의 말대로 결혼을 해야 할지, 그간 배운 것들이 과연 쓸모는 있을지, 자신의 발악을 알아줄 이는 있을지, 결국 자신도 그저 조금 더 배운 여자, 그렇지만 결코 남자를 넘어설 수 없는 여자에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모습에서 나혜석 그 자신의 고뇌를 알 수 있다. 주인공 경희의 내적 갈등은 나혜석을 비롯한 당시 여성 지식인들의 것이기도 했다. 이는 <경희>의 불분명한 결말이라는 한계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희>는 분명 의미 있는 성취라는 것이다. 여성 교육에 대한 강조와 자기 인식의 필요성, 여성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특히 그러하다. <경희>의 담론과 비슷한 담론은 그 후 1937년 나혜석이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이라는 글에도 잘 드러난다. 


"어렵기야 어렵지만 잘만 하면 좋지. 영애는 독서를 많이 해서 문학을 하면 좋을 터이야. 사람은 개인적으로 사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사는 것이 사는 맛이 있으니까. 좋은 창작을 발표하여 사회적으로 한 사람이 된다면 더 기쁜 것이 없는 것이야."(80쪽)







<이혼 고백장>, <<삼천리>>, 1934

나혜석은 시인 최승구와 연애를 했다. 그러나 최승구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실의에 빠진 나혜석은 김우영을 만나게 된다. 김우영은 적극적으로 청혼을 했다. 나혜석은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자신을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할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승낙한다. 그들은 결혼 후 파리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혼을 둘러싼 소문은 커져갔다. 나혜석은 오랜 침묵 끝에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며 자신의 입장을 공개했다.


1930년, 인사동에서 열린 한 회담에서 나혜석은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하나 한다. 바로 '시험 결혼'이다. 그는 이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결혼 생활이 과연 행복한 결과로 갈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험 결혼이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혜석에 의하면 시험 결혼은 일단 시험을 전제로 하기에 남자든 여자든 절대적인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혼한다 하더라도 위자료니 정조 유린이니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남녀 간의 근본적인 도덕 사상에 계몽이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공식적으로 김우영과 이혼하기 몇 달 전 열린 회담에서 한 말이다. 시험 결혼은 나혜석 자신이 직접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이라는 사건을 겪어본 후 제시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컸다. 이 파격적인 제안에는 나혜석이 겪은 고통과 갈등이 고스란히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이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늘 화제였기에, 이혼 역시 화제가 되었다. 이 둘의 이혼을 둘러싼 소문이 무성해지자 나혜석이 글을 통해 입을 열었다. 잡지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에서 나혜석은 약혼까지의 내력, 11년간의 부부 생활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여성으로서 또 화가로서 느낀 점, 시어머니와의 갈등, 최린과의 관계, 어머니로서의 역할, 김우영의 외도, 이혼 후 가정과 사회의 냉대,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고민 등 이혼 과정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관과 예술관 그리고 한계에 관한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전 남편 김우영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이혼 고백장>의 부제는 '청구 씨에게'이다. 


"미증유의 불상사,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에게도 비탄, 절망이 적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직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을 바라고 자실하여 할 뿐입니다."(157쪽)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을 통해 김우영과 자신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 상황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혼의 발단이 된 최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자신은 끝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아이를 키우고 싶어 했던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시댁과의 갈등과 김우영의 외도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물론, 글의 목적 중 하나는 자기변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나혜석은 문단에서도 화단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그 존재를 바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를 두고 문란하고 도덕적이지 않은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자격 박탈이라며 수군거렸다. 그는 이 글을 통해 부풀어져 가는 자신에 대한 그릇된 소문을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날 밤 여관에서 잠이 안 와서 엎치락뒤치락할 때 사랑에서는 기생을 불러다가 '흥이냐 흥이냐.' 놀며 때때로 껄껄 웃는 소리가 스며들어 왔나이다. 이 어이한 모순이냐.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든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나이다."(178쪽)



그러나 사회는 김우영의 외도, 양육권과 재산권 분쟁에 있어 나혜석이 받았던 억압과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또다시 그의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가며 트집을 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혜석이 글 속에서 이야기 한 '정조'에 대해 떠들썩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200쪽)



나혜석의 이러한 문제 제기에 역시나 사회는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여 '문란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만드는 데 바빴다. 나혜석이 겪은,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겪은 불합리함에 대한 동조는 없었다.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면, 하나같이 이렇게 흘러간다. 이는 1930년대나 2010년대나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언제나 여성이 결정권을 갖는 것에,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편하고 언짢은 태도를 보여 왔다. 나아가 그것을 거짓으로 매도하기까지 해왔다. 그런 방식으로 여성들의 발언권과 결정권을 박탈해왔다. 

1933년 김기진, 김억, 나혜석, 이광수가 함께 한 '만혼 타개 좌담회'에서 이혼한 여성에 대해 김기진은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듣건대 일단 딴 남성을 접한 여자에게는 그 신체 혈관의 어느 군데엔가 그 남성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대요. 그러기에 혈통의 순수를 보존하자면 역시 초혼이 좋은 모양이라 하더군요."(144쪽)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김억은 "제 자식 속에 딴 녀석의 피가 섞였거니 하면 상당히 불쾌한 일일걸요. 여자 측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144쪽)라는 말을 했다. 

위와 같이 이혼한 여성에게 다른 남자의 피가 섞였느니 순수하지 않느니 하는 것만 보아도 1930년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글을 쓰고 말을 한 나혜석이 어떠한 취급을 받았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쉽사리 바뀌지 않은 사회의 풍토에 수없이 절망하고 분노해야 했다. 여성들은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처사가 될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익혀 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늘 그 존립 자체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웠기에 침묵하는 것이 도리어 안전했다. 그들의 용기 어린 고백은 위로와 박수, 아니 그에 합당한 수사와 처벌로 이어지기는커녕 조롱당하고 왜곡되고 다시 억압되었다. 



"그 생활은 각국 대신으로 더불어 연회하던 극상 계급으로부터 남의 집 건넌방 구석에 굴러다니게 되고, 그 경제는 기차, 기선에 1등, 연극, 활동사진에 특등석이던 것이 전당국 출입을 하게 되고, 그 건강은 쾌활 씩씩하던 것이 거의 마비까지 이르렀고, 그 정신은 총명하고 천재라던 것이 천치 바보가 되고 말았다. 누구에게든지 호감을 주던 내가 인제는 사람이 무섭고 사람 만나기가 겁이 나고 사람이 싫다. 내가 남을 대할 때 그러하니 그들도 나를 대할 때 그럴 것이다."(<신생활에 들면서>, 219쪽)



결국은 입 다물고 살라는 거다. 나혜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백의 최후가 그토록 비참한 것이었음을 몸소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쓰고 말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혹독했던 대가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모순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생'을 온전히 이야기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고난과 비통함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다음 해 같은 잡지 <<삼천리>>에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정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 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모 된 감상기>, <<동명>>, 1923

나혜석이 아이를 갖게 되면서 느낀 기쁨, 슬픔, 절망, 두려움 등의 감정을 상세하게 묘사한 수필이다. 나혜석은 모성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며 모성에 대한 판타지에 반대하는 의도를 이 글에 담았다. 여성의 입장에서 솔직하고 꾸밈없이 풀어나간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였다. <모 된 감상기> 발표 이후 나혜석은 많은 남성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그들은 나혜석이 어머니가 될 자격이 없으며 모성애가 근본적으로 없는 여자라고 비난했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다. 그러나 모성은 어머니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가져야 마땅한 본능의 한 영역처럼 여겨졌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편견이 형성되고 발전하고 확산되었던 것처럼, 모성 역시 일종의 판타지로서 형성되고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케이트 밀렛은 『성의 정치학』에서 모성 본능을 '문화적 구조물'이라고 표현했다. 양육으로 대표되는 어머니의 역할은 사회적 성 역할, 즉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가부장제가 생물학적 차이를 과장해 성 역할을 고정하고 확장한다면서 출산과 달리 양육은 결코 여성만의 역할이 아님을 지적했다. 『제2의 성』의 저자 시몬느 드 보봐르 역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뿐"이라며 생물학적 성에 대한 사회의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출산율이 문제라고 한다. 가임기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임기 여성 분포를 표현한 전국 지도까지 만들어 배포한다. 낙태는 중죄라고 말한다. 태아의 생명권은 존엄하고 소중한 것이라 그 누구도 함부로 해칠 수 없으며 만약 그것을 해칠 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를 두고 일하러 다니는 엄마는 아이의 정서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아이가 클 때까지는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임신과 출산은 언제나 신비롭고 신성한 여성 고유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왔다. 아이를 만드는 것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도 길러내는 것도 여성만의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사회는 그간 어머니, 양육자, 보호자, 모성애 등 온갖 수식어로 임신과 출산과 양육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해왔다. 이는 과도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낳았고, 여성들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과 비난을 견디게 했다. 나의 육체와 나의 커리어에 지분을 가진 것도 아닌 이들이, 어떠한 일말의 소유를 주장할 권리도 없는 이들이 왈가왈부 말은 또 그렇게 잘할 수가 없다. 

나혜석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며 출산을 하기까지 겪은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모 된 감상기>에 상세하게 적어 내려갔다. 아이를 갖게 된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억울하다고 했다. 남편을 원망하기도, 친구들을 원망하기도, 자기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신체에 변화가 오는 것이 두려웠고 무섭다고도 했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자신이 태교를 잘 하지 못해 아이가 잘못될까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의 옷을 만들며 기뻐하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아이를 양육하며 얻는 고통을 "정신의 광증"이라고 표현하며 그 고됨에 대해 이야기했다.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256쪽)며 그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을 "원수" 또는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나혜석은 모성이 본능이 아니라 경험임을 글의 말미에 분명히 했다.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사랑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 있다 하면 2차부터 모 될 때에야 있을 수 있다. 즉 경험과 시간을 경하여야만 있는 듯싶다. 속담에 '자식은 내리사랑이라.' 하는 말에 진리가 있는 듯싶다."(260쪽)



나혜석은 <모 된 감상기> 발표 이후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특히 백결생이라는 논객은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라는 글을 통해 "육아라는 신성한 의무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나혜석은 무책임하다"라며 나혜석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나혜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백결생에게 답함>이라는 글을 통해 백결생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그리고 모든 여성들과 어머니의 입장을 공고히 했다. 

나혜석은 무릇 감상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를 솔직하게 적은 글인데 그것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맥락에 맞지 않으며, 더군다나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신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자신을 신여자의 대표로 두고 그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내 감상기가 신여자의 사상계를 대표한 논문으로 자처한 일이 없는 동시에 씨는 불고염치하고 나를 대표적 인물로 잡아 세워 놓고 소위 "구설로는 해방을 극력 절규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예속적 생활에서 초탈하지 못함이 현재 신여자의 실상이니......."란 것은 너무 실례에 과하다. 일반 여자 독자 제자에게 질문하기를 요구한 바이다."(269쪽)



또한 <모 된 감상기>에서 자신이 할 말을 두고 백결생이 무책임하다고 비판한 것에 대해 그 무책임하고, 유치하고, 거슬리는 말이 진정으로 자신의 정직하고 용감한 말이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백결생의 반박문은 결국 자신의 감상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일반 여성, 조선 여성, 나아가 신여성에 대한 어떠한 악감정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혜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로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꼭 믿는다. 내 <모 된 감상기>가 일부의 모 중에 공명할 자가 있는 줄 믿는다. 만일 이것을 부인하는 모가 있다 하면 불원간 그의 마음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불가피할 필연적 동감이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나는 꼭 있기를 바란다. 조금 있는 것보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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