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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ul 24. 2018

다시 볼 기회, 우리는 신여성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1 (민음사, 2018)

* 책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민음사





민음사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고전 읽기’라는 소제를 갖고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출간했다. 한국의 페미니즘 고전 읽기 시리즈의 첫 시작이 ‘정월 나혜석’인 셈이다. 지금, 나혜석의 말과 글을 한 데 모아 다시 읽는 행위에는 나혜석 그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보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나혜석의 말과 글은 때로 왜곡되고, 굴절되고, 해석되고, 전달되어 왔다. 그러한 과정은 우리가 그를 회상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논란이 많은 신여성, 문란했던 젊은 시절,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잃은 채 무연고자로 사망한 그의 비참한 최후처럼 말이다. 

우리는 나혜석의 말과 글을, 진짜 나혜석의 이야기를 그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붙잡아 그의 성취와 좌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신여성을 식민지 사회에서 특이하고도 신선했던 볼거리 대상으로 접근하고 소비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과 담론은 언제나 여성을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냈을 뿐이다. 그녀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제 그녀들의 삶과 사상, 성취와 좌절을 그녀들의 말과 글을 통해 알아보고 싶다.”

- 엮은이 장영은, 서문 중에서






▶ 1920년대 근대의 신여성과 자유연애 


‘자유연애’는 1920년대 초반 근대의 표상과도 같았다. 이 행위에서는 ‘나’라는 개인이 ‘구조’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근대는 “나를 세계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으로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강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소수의 지식인들은 근대의 관심과 근대의 과제를 현실에서 수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로 자유연애를 채택했다. 근대적 사상을 설파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자유연애를 수단화한 것이다. 

당시에 흔히 “자유연애를 하자”라는 말은 곧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하자"라는 말과도 같았다고 한다. 즉, 근대 초기 자유연애와 사랑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 특히 근대화의 표상으로서 중요한 이슈로 다뤄졌다. 

유학을 떠난 남성들은 교육을 통해 자유연애를 배웠다. 그들에게 자유연애는 근대적 요소로서 실천해야 할 존재였다. 그들은 자유연애의 대상으로 신여성을 택했다. 자신들과 같이 교육을 받은 근대화된 여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근대적 맥락에서 신여성을 필요로 했던 남성들은 신여성과의 연애를 통해 근대의 쾌락을 맛봤다. 

확실히 연애의 대상일 때 신여성은 자신의 이념을 확인시켜주는 동반자였다. 그러나 결혼의 대상일 때 신여성은 봉건적 맥락에서 아내와 어머니, 가정을 지켜야 하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이는 신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이분법적인 시선이었다. 그 결과 신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한 선정적 대상이 되었고, 가정파탄범이 되었다. 

당시 신문과 잡지와 같은 매체는 자주 유명한 신여성의 연애 가십을 다뤘다. 남성이 신여성과 연애를 하면서 부인을 버리는 일이 사회적으로 이슈였고, 이를 신여성과 관련된 새로운 사회 풍토로 전달한 것이다. 신여성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가정 파탄범이라는 부정적 인식은 여기에서 확대되었다. 


여성과 구여성의 대립에 집중하는 매체와 신여성을 묘사하는 소설은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도식화하고 재생산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익에 맞게 입맛에 맞게 자유로운 선택을 취하고도 모든 책임과 원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남성들에게 있었다. 




▶ 신여성을 향한 시선 


문학은 보편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문학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이뤄진 개인의 현실을 선택적으로 재현해 보편적으로 구현한다. 이러한 구현의 과정에는 일정한 이데올로기가 포함되고, 문학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것을 내재화하게 한다. 그것은 문학이 가진 일종의 권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여성’에 대한 매체의 담론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사회가 신여성을 얼마나 유린하기 쉬운 대상으로 보았는가는 많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신여성이 특별히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임을 강조했다. 



"여자 예술가라는 천하의 잡것들이 혼인 전에 신랑을 몇 사람씩 갈어 살어도 재조가 귀엽다고 사회라는 독갑이가 떠받치고 내여세우니까 고갯짓 궁둥잇짓을 한꺼번에 하고 다니지만..."

- <신여성>, 1926년 7월호 은파리


"어찌 신 여자를 지적으로 각성한 자라 칭하리오. 이 어찌 사회적으로 자아를 분변하는 자라 칭하리오."

- <신 여자에게 충고: 자아를 몰각한 그 행동>, 매일신보, 1920년 8월 14일 자 사설



김동인의 『김연실전』은 대표적이었다. 김동인은 『김연실전』에서 전면으로 '나쁜 피' 모티프를 드러냈다. 작품 속 연실은 기생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서녀로, 그 기질이 애초부터 방탕한 여자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연실이 어떤 신여성이 되는가에 그녀의 타고난 기질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작품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신여성 연실의 문란한 삶의 원인이 연실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나쁜 피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김동인이 동료 작가 ‘김명순’을 겨냥한 작품이었다. 김명순은 실제 서녀 출신으로 1920년대 많은 남성 작가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김연실전』은 김동인만이 아니라, 많은 남성 동료들의 시각이었다. 




▶ 신여성, 나혜석



1896년 부유하고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에서 서양 미술을 전공했다. 그는 시, 소설, 논설, 수필,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전개한 작가였으며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선구자라고 평하기에 적절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이론가이기도 했다. 정조에 대한 조선 남성들의 이중적인 시각을 비판하며 여성의 육체 해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자신을 비롯해 모든 여성들이 여자이기 전에 사람임을 강조했다. 

나혜석은 김일엽과 일본 유학시절, 잡지 <<청탑>>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엽은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페미니즘 잡지 <<신여자>> 창간 및 발간 작업에 함께하기도 했다. <<신여자>>는 여성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정신을 담고 있는데, 이 가운데 김일엽이 나혜석을 "정신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선각자"라고 표현한 <이 사람을 보라>라는 평전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마지막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집안에서 버림받았고, 문단에서도 버림받았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다 무연고자로 병동에서 사망했다. 누구도 그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나혜석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혜석의 삶은 다사다난했다. 그의 삶은 한 인간이 생이 이토록 많은 일을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간의 시선과 손가락질, 결국은 소문일 것들이 누군가의 삶을 파멸로 이르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연애, 결혼, 불륜, 이혼 등 나혜석을 둘러싼 수많은 가십과 대중의 부정적 시선이 형성되는 데에는 동료 남성 작가들의 회고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나혜석의 작품에 대해, 문인 나혜석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종종 그를 둘러싼 스캔들만을 부각했고, 그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논외시 했다. 


“나혜석은 정신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선각자이다. 나혜석의 철저한 몰락은 여성의 정조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한 시대를 선도할 의식과 재능을 지닌 여성을 어떻게 파멸시켰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김일엽,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의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 사건, 구미 만유 사건, 이혼 사건, 이혼 고백서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

-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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