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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Jul 21. 2018

시기적절한 물음

사적인 영화일기, 매기스 플랜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매기스 플랜>



사적인 영화일기, <매기스 플랜>


<매기스 플랜>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30대 여성 이야기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남편이라는 존재 없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고, 그 결정을 충분히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 말이다. 영화는 이혼과 재혼의 반복이 인생사의 별난 구석이 되지 않은 오늘날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이야기한다. 결혼이라는 약속만이 결코 사랑의 끝맺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땠냐고 묻는다면, 좋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삶을 그리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따르는, 자신만의 플랜을 스스로 그려낼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꽤나 진지하고 냉소적 물음. 비록 그것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괜찮다. 다소 산만하게, 열도 받게, 그렇지만 어딘가 유쾌하게. <매기스 플랜>은 조화롭다.




매기의 플랜 A


'매기'는 6개월 이상 누군가와 지속적인 연애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결혼이나 남편과 별개로 그녀는 아이를 원했고, 파트너 없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매기의 첫 번째 계획이다.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매기는 확실히 취향에 부합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매력적이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호한 결단력에 있었다. 

매기는 대학 동창으로부터 정자를 받는 데 성공했고, 가임 확률과 체온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러나 이 거침없는 계획은 '존'이라는 남자의 등장으로 틀어져 버린다. 틈틈이 소설도 쓴다는 이 남자는 매기의 새로운 대화 상대가 되어 곁을 맴돈다. 매기는 그를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모두 흥미 있고 그의 글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매기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존에게는 아내가 있다. 존은 언제나 매기에게 자신의 부인 '조젯'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학계의 잘 나가는 유명인사인 조젯은 늘 바쁘고 자신과 아이들은 언제나 2등이라며 투덜대기도 했다. 둘의 관계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해 소설에 녹이기도 했다. 

존은 매기에게 구애한다. 매기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며 무릎 꿇고 사랑을 속삭인다. 매기는 부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의 아픔도, 자신을 향한 존의 사랑도 모두 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존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불륜으로 시작된 이 사랑이 매기의 모든 계획을 틀어 버렸다. 



매기의 플랜 B


언제나 힘차게 거리를 활보하는 매기는 활력이 넘친다. 빈티지 블라우스에 체크무늬 원피스를 즐겨 입는 매기는 충분히 사랑스럽다. 단호함과 패기도 있다. 존과 함께하지 않는 매기는 그렇다. 하지만 존과 함께 있는 매기는 어떠한가. 그녀는 육아와 일에 찌들어 피곤을 달고 살아가고 사랑과 포용이라는 족쇄에 자신의 자유와 커리어를 희생한다. 존이라는 남자는 매기에게서 빛나는 주체성과 단호한 결단력을 앗아갔다.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했던 매기는 점점 지쳐갔다. 둘 사이에 사랑스러운 딸 '릴리'가 태어났지만, 육아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경제 활동까지 매기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심지어 조젯과 존 사이의 아이들 문제까지도 떠맡아야 했고, 존의 소설은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존은 이혼한 전 아내 조젯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바빴다. 조젯과 이혼하고 매기와 살지만 언제나 조젯을 우선으로 두는 존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매하고 모호하고 괘씸하다. 매기는 이 남자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다. 게다가 실제로 만나본 조젯은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와는 무척 달랐다. 조젯은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고 유능하고 매력적이었다. 매기는 결국 '플랜 B'를 가동한다. 플랜 B는 조젯과 존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타인의 관계에 직접 참견하고, 그 참견을 발판 삼아 모든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것. 어쩌면 매기의 플랜 B는 다소 오만하고 성급하고 지나친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내 남편과 그의 전 아내를 다시 이어준다는 발상 자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매기의 계획에 쉽사리 이의를 제기하고 반기를 드는 것은 어렵다. 매기가 전하는 삶의 궤적을 말미암아 짐작해 보았을 때, 그녀의 포용력과 결단력이 결코 매 순간 충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존이라는 남자


존은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다. 똑똑하고 잘생겼고 유능하다. 그러나 전처를 가시가 가득한 장미에, 자신을 정원사에 비유하던 이 남자의 첫인상이 좋을 리 만무하다. 자신과 부인 간의 사이가 어떠하든 타인에게 부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남자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매기를 향한 존의 애정은 끊임없이 보살핌을 갈구하는 형태이다. 존은 매기의 포용력 속에 들어가 보살핌 받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을 보살펴줄 수 있는 여성 앞에서는 놀랄만치 이기적이고 욕 나올 만큼 제멋대로이다. 모든 걸 인정하고 이해하고 순응해주리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치를 떨며 헐뜯지 못해 안달이 난 전처 조젯과 있을 때 존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완벽주의자 조젯과의 관계에 있어 존은 보살피는 역할을 자처한다. 매기의 말대로 그는 "남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만 생각하는 남자"이다. 존에게는 조젯이 필요하다. 

얄미움과는 별개로 존은 어딘가 신경이 갈 수밖에 없는 남자이다. 존에게서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떠한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이기적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선택적으로 어리광쟁이가 되기도, 또 선택적으로 대인배가 되기도 하는 존은 나와 닮았다. 



기승전 피클맨


피클맨 '가이'가 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시간은 채 3분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매기스 플랜>의 시작과 끝에 가이가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는 한여름 밤의 꿈같이 허무하고 복잡한 이 모든 관계 속에서 단 한순간도 빛을 잃지 않는 유일한 존재이다. 

분석과 발견, 반성과 감흥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피클맨은 위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그가 수학자가 되지 않은 이유는 <매기스 플랜>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화장실에 들어가 작고 멸균된 플라스틱 통 안에 정액을 담아내던 그는 왜 수학자가 되지 않았냐는 매기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가이는 매기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그 모든 풍부한 것들의 중심체이다. 진리에 도달하는데 집중하느라 자주 놓치고는 했던 주변의 그 모든 풍부한 것들 중 하나이다. 늘 쓰고 다니는 털모자와 덥수룩하게 기른 턱수염, 종아리를 드러낸 겅중하게 짧은 바지까지 취향인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가이의 재등장은 정말이지 반갑다. 

매기의 시선이 가이를 향하는 순간, 그녀의 새로운 계획은 이미 시작되고 있을 거다. 매기는 오랜 시간 돌고 돌았던 자신의 계획이 결국은 시작점을 향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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