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ndaleena Jul 15. 2018

기억되고 되물림되는 아픔의 구조,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

전혜진,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 책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민음사




딸과 딸의 동성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요양 보호소에서 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시각에서 전개한 『딸에 대하여』는 제도가 부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소수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그린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딸에 대하여』는 그 방식을 달리했기에 지금, 그리고 다시 언급될 필요가 있다. 

수치와 통계라는 담보 없이도 확보되는 사실성과 구체성은 교류 가능한 다수의 경험 위에서 실현되었고, 경계인의 위치를 선택한 서술은 정답의 제시 없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종종 사려 깊은 공감과 배려가 필연인 것처럼 다뤄지고는 한다. 그러나 엄마와 딸은 세상 그 누구보다 닮았으면서도, 때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멀다.  털어놓는 만큼 감추는 것이 많고, 서로를 염려하면서 외면하기도 한다.

화자인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엄마를, 알고 싶지 않아 했던 엄마를 대변했다. 함부로 독해질 수도 못되질 수 없는 엄마를 말이다. 딸에 대한 원망이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딸에 대한 비난이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딸에 대한 분노가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 ‘나’는 정말이지 엄마였다. 나는 때로 그런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했고 불편해했다. 에리카 종의 그것처럼 엄마의 성향이 나의 창의적이고 반항적인 표출 기회를 막아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나를 배우게 될 것이 두려웠고, 그렇게 자란 내가 영영 나 자신을 어딘가에 묻어 두고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나와 닮은, 나를 아끼는, 내가 전부인 엄마에게 사랑과 배려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엄마와 딸이란 관계가 이토록 어렵고 이상하다는 점에서 『딸에 대하여』는 더욱더 엄마 화자를 고집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자주 ‘엄마들’의 가치와 결정을 방관이자 도피라 여겼다. 엄마도 딸이면서, 또 딸을 가진 엄마이면서, 그리고 여자이면서 왜 목소리를 내지 않는지, 어쩌면 저렇게 무심한지 실망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엄마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은 역으로 분개하고, 공감하고, 나서는 이들에 대한 동경을 강화하기도 했다. 내심, 그들처럼 화자가 더 넓은 시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렸고, 걱정도 겁도 지나치게 많은 나의 엄마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나의 기대와 편견은 그렇게 ‘엄마들’을 향해 끊임없이 작용했다. 

화자가 도통 알고 싶지 않은, 그러면서도 알고 싶은 딸을 관찰해 나갈수록 내게는 ‘엄마들’이 또 다른 관찰 대상이 되어갔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인지 모를 엄마의 마음에 다가가는 건 낯설기만 했다. 





 배우자와 부양자의 역할을 지워낸 여성은 독립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을까 

‘돈’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영향력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혹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수단을 상실한 부모는 비참하다. 권력을 상실한 부모가 되었다는 씁쓸함과 필요를 상실한 부모가 되었다는 통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상황이 그렇다. 너무 배워버린 딸은 허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녀를 떠났고 세상은 이를 독립이라 말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딸은, 그녀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을 흡수하겠다는 듯이 바뀌어 버렸다. 가르친 적 없는 것들을 배웠고, 가르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았다. 예상에 없던, 혹은 계획에 없던 딸의 정체에 혼란과 배신을 느낀 엄마는 잘나고 못난 딸을 통제할 수 있는 설득과 부정의 최후 보루로 경제적 우위성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마저도 불가능한 현실에 비참해해야 했다.  

엄마는 삶의 유지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새댁도 교수 부인도 딸도 딸의 연인도, 마치 그것이 숙명인 것처럼 일한다. 근무시간과 휴식시간의 엉클어짐, 보호받아야 할 대상들의 폭력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친 손놀림, 잦지는 않으나 적지도 않은 아픈 말, 어딘가 귀찮음이 역력한 대우. 이들의 노동은 금방이라도 그 명백한 고난과 부당한 인내라는 흔적을 지워버릴 수 있을 것처럼 위태로이 느껴졌다. 나이 많은, 가난한, 능력 없는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도맡아 하게 될 거라는 일은 보살핌과 존중의 영역에서 어딘가 비켜나 있었다. 

이들의 경제 행위가 이토록 불안하고 비정상적으로 그려지는 데에는 한국적 사회 구조가 깊게 관여한다. 그것이 선택적이든 아니든 남성의 존재가 결여된 여성의 경제적 자립성은 확고하지 못하다. 사별한 ‘나’가 그러하고, 레즈비언인 ‘그린’과 ‘레인’이 그러하며, 결혼하지 않은 ‘젠’ 역시 그럴 것이다. 엄마가 너무 많이 배운 딸, 그래서 ‘성공한 삶’을 기대하게 하는 딸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며, 동시에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남성의 곁에 서지 않는 여성의 삶을 안정으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적 안전망은 확고한 가부장제의 영향력 내에서 발전했고 존재했다. 남성의 그림자를 지워낸 혹은 그에서 벗어난 여성은 언제나 사회적 안전망에서 교묘하게 비켜난 위치에 서 있다. 엄마는 그러한 삶을 살아냈고, 겹겹이 쌓인 시간은 정직하게 흔적을 남겼다. 

『딸에 대하여』는 표출되지 못한 채 엄마의 몸에 기억된 차별과 불안, 상처를 순례처럼 짊어질 “직장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고 어디에서 이상한 여자애를 집안으로 끌고 온”(66쪽) 딸에 대한 염려와 연민, 이에서 기인한 부정과 부인을 세심하게 짚어낸다. 배우자와 부양자의 역할을 지워낸 여성이 독립적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가당키는 한 사회인가 되묻는다. 





▶ 죽음을 앞둔 젠과 생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있는 그린

『딸에 대하여』는 60대가 된 엄마의 관점에서 딸과의 갈등을 조망하며, 화자인 ‘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두 사회적 문제, 즉 젠의 문제와 그린의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노인’과 ‘복지’로 요약되는 젠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보편적이다. 반면, 대학으로부터 일방적 해고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 시간 강사의 처지와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은 나와 별개의 타인, 혹은 관계없는 세계의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작가는 접근의 성격에 차이가 있는 두 문제를 병렬 배치해 교차하면서, 해당 사건들에 대한 화자인 ‘나’의 심리 및 인식의 거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함께 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결론적으로 두 문제는 다를 바 없이 모두 존중되고 논의되어야 할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앞둔 이와 생의 가장 펄떡이는 때를 살아가는 이를 연결하는 지점은 사회적 안전망에서 교묘하게 비켜난 위치에 서 있는 여성, 그중에서도 또 다른 제3의 영역으로 다시 분류화되어 제외되고는 하는 ‘약점’이었다. 

지켜야 할 권위도 품위도 뭣도 상실한, 혹은 상실당한 늙어가는 인간, 아니 늙어버린 여자인 엄마는 종종 젠에게서 그린의 잔상을 발견했다. 엄마는 젊은 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말로를 보내는 젠의 삶에서 비치는 성 소수자 딸애의 미래를 부정하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젠의 젊은 날의 가치를 안다. 그래서 동시에 딸애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목소리 높이는지를,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지를 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는 것도 많은 딸이 보따리 가방을 등에 메고 거리를 전전하다 영영 자신과 같은 가난에, 그 고단함 속에 던져질 것이 염려스러워서.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소꿉장난을 전부라 여긴 젊은 날에는 결코 알 수 없을 고독과 상실이 염려스러워서 말이다. 






▶ 변화라는 결말, 이해와 인정을 구분하다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169쪽)

우리는 관계의 형성에서 이해라는 단어를 종종, 자주,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그를 이해했다는 표현으로 그와의 관계를 견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관용과 아량과 포용의 이미지로 점철된 이해라는 말은 어딘가 난해하고 무책임하다. 이해는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해는 단지 ‘나의 눈을 통해 보는 너’에 불과하다. 때로 우리는 이를 간과하고는, 나의 이해에서 멀어진 타인의 행동에 배신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다만 ‘그린’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은 이해와 다르다. 인정은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엄마들’에게는 강요받을, 변화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딸애가 존중받기를 바라는 엄마는, 동시에 엄마 자신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기도 했다. 

소설은 알게 모르게 작가를 대변하고, 또 알게 모르게 사회를 대변한다. 그런 소설에서 우리는 때로 낙관적 미래나 속 시원한 해결책을 찾는다. 해결되지 않는 현실에,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소설이 정면하기를 바라고, 허구라는 보호막 속에서 실현 가능성을 점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이나 희망을 이야기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소설이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하고 낙관적 미래를 그려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혹자의 말마따나 『딸에 대하여』는 “해결책이 우선이 아닌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에 가깝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대물림되고 생채기가 되어 남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아픔을 다룬 이 이야기는 기록되고 기억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이전글 아련하고 야릇한 향기를 남긴 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