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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daleena Oct 02. 2018

Driving the car and the story

사적인 영화일기, <델마와 루이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영화 <델마와 루이스>



사적인 영화일기, <델마와 루이스>


사회는 대게 알고 싶지 않은 대상 혹은 자신과 다르거나 잘 모르는 대상에 신비함, 미지의 세계와 같은 포장지를 덮어 씌우고 제멋대로 감상하는 경향이 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든다. 예를 들어 여성을 향한 시선이 그렇다. 성녀와 창녀에 대한 논쟁, 욕망의 성적 대상화와 탄생을 책임지는 기적이라는 육체의 모순. 나의 것과 너의 것의 구분이라는 잣대 속에 깔린 대상화와 소유 의식. 

     미안함이나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게 뒤따라야 할 행동은 아니다. 모두가 그러니까 이상할 게 전혀 없다. 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식과 행동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려 드는 것, 아니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조차 낯설기만 하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대화 주제나 매체의 기삿거리로 하루에도 수십수백 번 오르내리지만, 어쩌면 그중 대부분은 만들어진 환상, 진실이 아닌 거짓, 혹은 오해와 편견에 기인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종종 각종 범죄에 대한 항변으로 이용되거나, 핑계에 적합한 논리로 악용되고는 한다. 
세상은 성별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차이와 차별을 도입했고, 그릇된 오해와 환상을 생성, 그것들의 확산을 방치했다. 


     여기 사람을 총으로 쏴버리고 잡화점을 털어가며 범죄의 향연을 벌이는 두 여성이 있다. 보통의 여자들이다. 
두려움을 느끼고 불쾌함을 느끼고 호불호가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누구나 갖는 감정이 있고, 주관이 있고, 생각이 있고, 가치가 있다. 모두가 그렇듯 이 두 여성 역시 그렇다. 

     <델마와 루이스>는 자신들을 만들어진 성역 속에 가두어 제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유린하는 세상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1996년형 포드의 푸른색 선더버드로 가뿐히 즈려 밟고 달린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저 많고 많은 액션 로드무비 중 하나일 뿐이다. 눈에 띄는 것이라면 단지 두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녀들이 벌이는 행위가 불편하고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델마와 루이스가 제임스와 크리스였다면?





Me and a Gun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이 계획에 없던 범죄의 향연으로 이어지는 데에는 한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중 기분에 취해 펍에서 술을 마시게 된 델마와 루이스.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을 즐기던 델마는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는 델마를 강간하려 든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델마를 자동차 위에 눕히고 옷을 찢어 벗기는 남자, 울며 애원하는 델마, 반항하는 델마의 뺨을 내리치는 남자, 그리고 그에게 총을 겨누는 루이스. 

    떨리는 목소리와 손을 다잡으며 온 힘을 꾹꾹 눌러 담아 경고하는 루이스에게 돌아온 건 남자의 질 낮은 성적인 모욕뿐이었다. 결국 루이스 손에 들려있는 총은 그의 심장을 향해 입김을 내뿜었고, 델마와 루이스는 도주를 시작했다. 

     여성이 성적 대상화로 전락해 언어로, 시선으로, 물리적 행동으로 유린을 당하는 것은 결코 영화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델마가 당했고 루이스가 당했던 것과 같은 일들은 놀랍게도, 그리고 익숙하게도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벌어지고는 한다. 


     일부는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를 부풀려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일상에 대한 공포를 양산하는, 아니 선동하는 일반화의 오류 중 하나이자 성급한 우려라고 말한다. 그것이 성급한 우려인지, 일반화의 오류인지는 두고두고 지켜본 후에 판단해야 할 문제의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이다. 못 믿으시겠다면, 조금이라도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보시기를 간곡하게 권한다. 그 자신과 다른 '종'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 유린과 공포가 숨 쉬듯이 잦게 겪어야 하는 일임을, 알아보는 척이라도 해보기를 권한다.  


     델마와 루이스는 말한다. 
     "Just for the future, when a woman's crying like that, she's not having any fun."





Thelma&Louise


델마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 해보고 사는 여자이다.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다시 그의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을 만드는 것이 델마의 일상이다. 루이스는 평범한 웨이트리스이다. 멋들어진 선글라스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루이스는 확실히 델마에 비해 냉정하고 성숙하며 자유분방해 보이는 면이 있다. 

     분명 절친한 친구이지만 확연한 차이를 보이던 두 여성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로 변화하고 동시에  닮아간다. 루이스는 언제나 척척 상황을 주도한다. 살인을 저지르고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며 떨던 모습도 금방 지워버리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루이스는 확실히 언제나 델마에 비해 굳건하고 강인해 보였다. 그러던 중 예고 없이 나타난 사기꾼 '제이디'에게 수중의 돈을 모두 빼앗기게 되자 루이스는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제이디에게 빠져 그가 돈을 훔쳐 도망가 버린 줄도 몰랐던 델마를 원망하고 앞으로의 앞날을 걱정하며 절망에 빠진다. 

     그런 루이스를 다시 일으킨 건 델마였다. 언제나 해맑고 순수한, 냉정하게 말하면 어려운 상황을 언제나 웃음으로 무마하고 회피하려 드는 전형적인 '전 아무것도 몰라요' 인간형인 그 델마가 말이다. 델마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난폭한 현실을 겪어가며 변화하고 성장했다. 상점에 들어가 돈을 쓸어 모으기도, 자신들을 희롱하는 트럭 운전사의 트럭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나는 그녀들의 변화와 성장에 기뻐하며 그들이 벌이는 범죄의 향연에 쾌감을 느꼈다. 세상을 향한 그들의 거부의 몸짓에 통쾌함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이건 대리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인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만약 두 여성이 아닌 두 남성이 주인공이었다면, 사람들은 이들의 탈주를 발칙하고 통쾌하고 유쾌한 '특별함'으로 기억할까. 벼랑 끝에 몰린 두 여성이 취한 자기 파괴적이면서 완전한 해방이 되기도 하는, 이 모순적이고도 지독히 현실적인 결말을 두고두고 기억할까. 아마 아닐 거다. 남성 캐릭터가 사건을 주도하고 해결하는 영화는 많지만,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는 드물기 때문이다. 


     1991년 개봉한 <델마와 루이스>는 2018년인 현재까지도 '특별한' 영화로 회자된다. 영화의 묘미인 낯선 여성 주인공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는 여전히 신선하고 발칙하게 받아들여진다. 

     가령 "여자는 이래야 해"와 같은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겉모습만을 바꿔왔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제약과 조건, 편견과 차별의 속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991년에도, 2018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20년에도 그럴 것이다. 변하는 게 참 많은 이 세상에 영영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것이 있어 씁쓸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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