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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Oct 06. 2023

반팔 입혀 보냈습니다.

멀티태스킹과 슈퍼맘

사진: Unsplash의Markus Winkler


둘째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남편의 전화입니다.

"여보. 내일은 꼭 긴팔 입혀 보내. 우리 애만 반팔이야."

매일 무심결에 옷을 챙겨주던 것이

결국 한가을이 된 오늘까지 반팔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둘째는 기관지염까지 있는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제 출근복은 긴팔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하....

출근길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집니다.

이렇게 출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무엇 때문에 돈을 버나

그 돈 때문에 무엇을 놓치고 사나.

너무나 불편한 맘에 이걸 재빠르게 벗어날 갖가지 변명을 떠올립니다.

'낮 되면 또 더워질 거야.'

'원래 땀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놓치면 아빠인 자기가 좀 긴팔 챙겨줬으면 되잖아.'

위안 삼아 변명을 늘어놓지만,

제가 입은 긴팔을 보니 떠올린 갖자기 변명들이 죄다 힘을 잃습니다.





오래된 신화 하나가 있습니다.

멀티태스킹입니다.

단언컨대 이 신화가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은 바로 엄마영역입니다.

전화하면서 애들 밥 먹이고...

옷 입으면서 애들 밥 먹이고...

밥 먹으며 애들 응가 닦고...





이 멀티태스킹이 슈퍼맘 환상으로도 연결됩니다.

'아이도 잘 키우고',

'일도 잘하고',

'게다가 몸매도 예쁜'

옆집 엄마.

슈퍼맘은 그 수많은 일들을 동시에 해내는

멀티태스킹의 달인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 이 멀티태스킹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멀티태스킹이란 용어는 원래 컴퓨터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컴퓨터 과학자들이  프로세서가 여러 개라 

이걸 동시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성능을 가진 것에다가 멀티태스킹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걸 어쩌다가 인간에다 붙이게 된 걸까요?

사람도 기계처럼 한번 일해 보라는 걸까요?

멀티태스킹이라는 용어가 생긴 지 60여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의 뇌의 크기는 4만 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코 지치지도 않을 컴퓨터나 가능할 멀티태스킹의 경지를

인간은 숨 가쁘게도 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도달 못할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 믿는 순간에도

실은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을 하면서 카톡을 확인하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하는 와중에 잠시 멈춰서 카톡을 확인하고

다시 카톡을 멈추고 일에 다시 집중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던 것을 멈추고 뒤이어 다른 것을 하는 것으로

재빠르게 '전환'하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해요.

뇌가 그 사실을 가려서 의식에서는 아주 매끄러운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면서

순간 순간 뇌를 재설정하고 있는 겁니다."

-도둑맞은 집중력






공 3개로 저글링을 합니다.

공 3개를 한 손에 다 쥐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 어느 순간도

단번에 공 3개를 동시에 손에 쥔 적은 없습니다.

하나씩 재빠르게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는

잦은 전환으로 공 3개가 땅에 떨어지는 것만 면할 뿐이죠.

저글링을 하는 동안

우리는 공 3개를 한 손으로 동시에 쥐고 있는 듯한

멀티태스킹의 착각을 하는 겁니다.






멀티태스킹은 균형을 전제로 합니다.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완벽한 균형은

컴퓨터에서나 가능합니다.

균형이 깨지지 않고서는

결코 집중, 몰입을 할 수 없습니다.







잘 해내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하려면 균형은 깨져야 합니다.

균형이 깨지면 멀티태스킹이 아닙니다.

결국 잘 해내려면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둘 다를 잘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둘을 놓칠 수 없다면

일단 이것 먼저 집중해서 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을 집중해서 합니다.

그냥 저글링을 잘하는 겁니다.ㅎ






이때 중요한 것은 저글링을 하는 공이

모두 다 똑같은 소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땅으로 떨어지면 다시 튀어 오르지 않고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 건강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공은 소중히 다뤄줍니다.

보다 오래 깊이 내 손위에 머물도록 해줍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둘 다를 다 잘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에게

괜한 핀잔과 역정은 내지 않는 것입니다.






출근을 했으니 이제 그만 일을 하렵니다.

퇴근 후 집에 가서는

둘째에게 엄마의 실수를 고백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한번 세게 안아주고 싶습니다.

아니 안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미뤄뒀던 아이들 옷장 정리를 하렵니다.




#멀티태스킹 #슈퍼맘 #도둑맞은집중력 #워킹맘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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