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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룰때 Oct 29. 2023

어떤사람A 이야기

제가 일하는 부서는 38선 같은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앞 창구에는 젊고 빠릿빠릿한 활력 넘치는 젊은이들이 앉아있고,

그 선 넘어 뒷방에는 다소 나이가 많고 활력은 달리고 일만큼이나 가정이 중요한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앉아있습니다.

저는 단연코 뒷방입니다.




​​​​8년 전 휴직하기 전에는  분명 나는 젊은이, 아니 애기였더랬죠.

8년만에 복직했더니 훌쩍 뒷방 늙은이 신세입니다.

8년전의 기억만을 간직한 나는 뭐든 배우겠다는 애기의 자세로 복직을 했으나,

그 누구도 애기로, 젊은이로 나를 봐주지 않네요.

8년동안 냉동캡슐에 있다 해동되어 세상에 내던져진 듯

나와 그들 사이 인식의 크나큰 간극에 어찌할지 어리둥절합니다.








회사 내에 그 누구도 내 개인의 역사 따윈 큰 관심없습니다.

그저 마흔셋의, 아들 둘의 엄마이고, 단시간 근로를 하는 여직원.

이걸로 나란 사람에 대한 규정, 해석은 일찌감치 끝나버린 듯합니다.

더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서글픕니다.

아직도 제 맘에는 애기의 순수한 열정이 살아있는데 누구도 한번 들여다봐주려 하지 않네요.

그러나 좀 더 솔직해지자면, 한편으로는 이것이 편하기도 합니다.

사실 창구일은 긴장되고 힘든 일입니다. 뒷방 쪽이 훨씬 편하지요. 그래서 솔직히 창구근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렇게 나를 향한 편견 뒤에 숨어서 제 몸과 맘이 편한 쪽을 바라기도 합니다.

나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그리 치열하지 않아도 되니, 이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요.








편견을 깨부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무언가를 파괴하고자 한다면 그다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파괴가 의미 있어지니까요.

그러나 그다음을 향할 용기가 쉽사리 생기지 않습니다.

아직 아이 둘을 위한 체력도 아껴둬야 하고,

아직 건강도 더 돌봐야만 하고,

별 수 없이 지금은 제 커리어 사이클에서 지루한 평행선만을 긋고 있는 시기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창구에 앉아 반짝반짝 조명을 받으며 이곳 주인공들이 앉아있습니다.

저는 저 뒤쪽 조연석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 이 조연에도 나름 최선의 보람이 있고 성장의 기쁨도 존재합니다.

주인공에 가려져 몰랐던 주연의 즐거움입니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묵묵히 하는 것만으로 일단 나를 칭찬 먼저 해주고 싶습니다.

참으로 자랑하고 싶을 테지만 조용히 지나주는 내 자신이 기특합니다.

이제야 어른답게 일을 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 무대에 내려온 세상에서는 제 나름으로 주연으로 살기도 합니다.

이 사무실에서 내 모든 걸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무실에서 내 인생 전부를 승부보지 않아도 됩니다.

사무실 밖에서도 내 인생은 있고 내 승부처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 있습니다.

비록 어느 한 곳에서 내 승부가 시원찮더라도 그 승부 말고도 승리를 거둘 많은 승부가 아직 나에게 남아있습니다.








인생은 참 절묘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도 100프로 환희로만 가득 찬 순간은 없습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도 오로지 쓴 맛만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오늘 저녁처럼 잘 구워진 돼지고기 한주먹과 깍두기 몇 점으로 두 녀석들이 밥을 싹 다 비워주는 잠깐의 보람되고 달콤한 순간도 있습니다.

싹 비워진 식판을 보며 오늘 저녁의 승부는 대승했다 자평해 봅니다.

그렇게 무대 위 어떤사람A가 무대 밖에서 주인공 이룰때로 빛나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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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복직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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