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갈 수 없다고?

Power J의 치명적 실수

by 이룸

"트래블 카드는 있으시죠?"


쿠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체크인을 하던 중 지상직 승무원의 질문에 3초간 멍해진다. 이 질문 하나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음을 순식간에 직감하면서 공포가 급습했다.


"아니요.. 없는데요? 항공사에서 제공한다고 하던데.."

"네? 저희가 따로 제공하지 않아요.. 대사관에서 미리 받아오셨어야 하는데.."


그 순간 나를 쿠바로 보내줄 거라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고 있었다.


상황은 이렇다. 쿠바에 여행자로 입국을 하려면 여행자 비자 격인 트래블 카드가 있어야 한다. 내가 구입했던 여행 가이드북이나 블로그에서 모두 "항공사에서 제공하니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중요한 항목이라 나름 크로스체크를 했다. 가이드북에서 그 내용을 보고도 블로그 여행 후기에서 재차 확인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예약한 KLM은 이번에 새롭게 쿠바행을 취항한 항공사였고, 그전까지는 정보는 에어 캐나다 기준이었다. 하바나를 취항하는 항공사가 에어 캐나다 뿐이던 시기의 보편적 사실일 뿐이었던 것이다.


Power J라고 자부했던 나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나는 쿠바에 갈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플랜비를 위해 체크인 카운터에서 머리를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공항을 가기 전 스마트폰으로 찍어둔 쿠바 가이드북. 이 때는 못 갈 줄 꿈에도 몰랐다.


플랜 B. 하바나만 안 가면 되잖아?


원래 계획은 암스테르담 - 하바나 - 파리 - 인천이었다. 황당한 일정 같지만 쿠바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보니 어느 방향으로 돌던지 걸리는 시간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KLM을 이용한 이유도 하바나와 함께 유럽도 여행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여행에 하바나와 파리를 조합해 버리는 창의적인 계획 앞에 스스로 뿌듯했었으나, 한걸음 떼보지도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하바나 안 가고, 암스테르담 인 / 파리 아웃만 하면 안 될까요?"


나름 합리적인 제안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하바나만 안 가면 그만 아닌가. 항공사에서도 손해 볼 것 없었다. 손해는 하바나를 못 가는 나만 보는 거였다. 하바나 대신 유럽을 여행한다면 아쉬움도 크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이게 또 쉽지 않았다. 승무원의 말로는 체크인 카운터 단말기로는 처리가 불가능했다. 원하는 대로 하바나행만 취소하려면 본사에 문의해야 했다.


영어 울렁증도 상황이 급하다 보니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본사로 연락을 했다. 다행히 내 상황을 알아들은 것 같은데 본사의 답변은 체크인 카운터에서 하면 된다였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안된다고 했다는데도 답변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제 암스테르담행 탑승 수속은 거의 끝나서 체크인 카운터는 한산했다. 기다림 없이 카운터로 가서 본사의 얘기를 전했다. 나에게 안내를 해줬던 승무원은 답답해했다. 여기 단말기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답변이 다시 돌아왔다. 느낌상 승무원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다시 본사에 연락을 했고 이번에는 체크인 카운터를 벗어나지 않고 통화를 했다. 역시나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이번엔 지상직 승무원이 내 전화를 이어받아 대화를 했다. 그러고 나서야 본사에서 확인해보겠다고 한다. 하...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골든 타임의 끝은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제 체크인 카운터에 있는 여행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극적으로 몇 분 안에 처리가 돼야만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체크인 카운터의 승무원들은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야속하게 시간만 흘러가면서 슬슬 체념을 하기 시작했다. 더 할 수 없는 것이 없었기에 기적을 바라며 기다렸을 뿐이다.


결국 원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탈감이 정신을 지배하기 전에 또 각성해야 했다. 티켓을 환불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출국 시간 전까지는 환불이 가능했는데 이제 그마저도 시간이 촉박했다.


비행시간 10분 전쯤에 꽤 비싼 수수료를 내고 나는 안내대로 티켓을 환불했다. 이제 상황은 끝났다. 다만 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시간에 공항 입국장에 홀로 남아 있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 순간에도 한 가지는 확고했다. 집으로는 가지 않겠다. 그래서 근처 숙소를 알아봤다. 오피스텔형 숙소였는데 공항까지 픽업도 해주는 곳이었다.


숙소에서 보내준 밴을 타고 가면서 하바나 숙소를 취소했다. 에어비엔비를 열고 예약 페이지를 클릭하니 올드 하바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숙소의 테라스 사진이 보인다. 이 사진을 보면서 취소를 하려니 못 가게 된 사실이 실감돼서 슬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하바나의 구시가지를 바라보고 싶었던 그 테라스. 취소를 하면서 주인에게 내 마음 있는 그대로 아쉬움과 미안함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를 가야 할까.'

나를 가장 설레게 하던 질문이 그 순간엔 나를 심란하게 하는 잔인한 질문이었다. 사실 갈 곳은 하나였다. 파리였다.


플랜 C. 출국 전 날 파리행 비행기 끊기


원래 계획은 하바나에서 돌아와 파리를 2박 3일 정도 여행할 생각이었다. 파리에서 혼자 하는 여행도 아니었다. 내가 파리에 오면 이미 유럽 여행 중이던 친구가 파리로 합류하기로 했었다. 그 친구도 고민하다가 나랑 여행하고 싶어서 여행 일정을 바꿨기 때문에 사실 나는 그 당시 어디를 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숙소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알아봤다. 당장 내일 가는 비행기라서 요금은 당연히 비쌌다. 위로가 되는 건 쿠바 가는 비행기가 워낙 비쌌기 때문에 그거보다는 쌌다.


숙소도 원래 예약했던 곳을 검색하니 나머지 날도 예약이 가능했다. 그래서 더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이미 그 시각, 새벽 2시가 넘었다. 정신적인 피로는 극에 달했지만 몇 시간 동안 과도하게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여파로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다음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공항에 왔다. 파리 일정을 급하게 4일 정도 보강해야 했기에 e북으로 가이드북도 샀다. 그리고 이성의 끈을 놓은 채 되는 대로 폭풍 예약을 시작했다.


물랑 루주. 제일 좋은 자리 오케이.

리도쇼. 밤에 할 거 없으니까 이것도 볼까. 제일 좋은 자리 오케이.

몽생미셸 투어. 파리 오래 있을 거니까 오케이.


어제 그토록 가고 싶었던 탑승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나는 여행 계획을 되는 대로 채워 넣고 있었다. 헛헛한 마음을 과도한 지출로 채웠다. 드디어 출발. 인천을 떠났다.

전 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비행기



에필로그


보통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몇 달의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유럽까지 가는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짧았다. 계속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여행 일정을 짜다 보니 금세 파리에 도착했다.


낮이 짧은 겨울이라 파리에 도착하니 저녁이 되기도 전에 깜깜해져 있었다.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내려 지친 마음과 몸을 이끌고 파리 시내로 향했다.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느끼지만 장거리 여행의 피로감에 가장 효과가 빠른 약은 '랜드마크'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캐리어를 들고 밖에 나오는 순간 나는 샹젤리제 거리 위에 있었고, 멀리 개선문이 보였다.


일주일간 파리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원래 가려던 곳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쿠바를 못 가게 됐다는 사실에 상심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개선문이 보이자 많은 것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숙소 덕에 매일 여행의 시작과 끝마다 개선문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일주일 동안 파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서 평소 좋아하던 미술관 구경도 실컷 하고,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소도시 Semur-en-Auxois에도 가봤다. 에펠탑 야경을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서 에펠탑을 봤다. 직장을 다니면서 여행을 하다 보니 항상 제한된 시간에 쫓기듯이 다니는 여행을 많이 했었는데 처음으로 한 도시에 일주일을 머무르면서 나름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기어코 쿠바를 갔다. 그때는 에어 캐나다를 이용했기 때문에 평소에 가고 싶었던 퀘벡과 하바나를 일정 안에 조합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때 쿠바를 못 간 것은 평생 못 갔을지 모를 퀘벡을 가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이제는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