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낮술》 시리즈를 읽고
"술 얘기하니까 눈 반짝반짝한 것 봐."
며칠 전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술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시간, 그날 내 위장이 원하는 음식과 그 메뉴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취미인지라 음식과 술에 관심도 열망도 가득가득한 편이다. 자연스레 소설 《낮술》에도 손이 갔다.
《낮술》은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로 표지마다 그려져 있는 귀여운 음식 일러스트레이션이 눈에 띈다. 해산물 덮밥, 함박스테이크, 교자, 그리고 함께 놓인 맥주. (맛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 쇼코는 '밤의 지킴이' 일을 하는 여성이다. 쇼코는 밤부터 아침까지 지켜보는 지킴이 일을 마친 뒤에 하루의 마지막 식사로 점심을 먹는데, 그녀에겐 점심 메뉴를 고르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술과 궁합이 맞느냐 안 맞느냐.
쇼코는 점심 식사에 술을 꼭 곁들어 최선을 다해 즐긴다.
이렇게 보면 쇼코가 자칫 불안정한 직장에 다니며 한가로이 낮술이나 즐기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30대 초중반인 그녀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짧은 교제 기간에 예상치 못한 임신을 하고, 상대를 잘 모르는 채 결혼해 시부모와 함께 살았고, 시어머니와도 남편과도 잘 지내지 못해 결국 이혼한 뒤 그 집에 딸을 맡기고 홀로 나왔다. 그리고 딸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댁에 딸을 맡기고, 자신의 마음을 꾹 누른 채 음식과 술로 속을 달래며 다시금 힘을 얻는다.
'나는 살아 있고 건강하다. 기운 내자. 주저앉아 있을 수 없지.'
자, 오늘도 꿋꿋이 살아가자.
쇼코는 나지막이 말하고 덮밥을 마주했다.
───《낮술》 열번째 술, 가라아게 덮밥, 아키하바라
음식은 삶을 지탱해주는 귀중한 연료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은 위장을 넘어 마음까지 달래주기도 한다. 쇼코는 누구보다 음식이란 연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잘 이용하는 사람이다. 아이의 '맛있다'는 말과 미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살아 있으면 뭔가가 변하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실제로 그녀는 지킴이 일을 하며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사람들, 그들의 다양한 삶을 마주하며 변해간다.
타인의 영역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쇼코 스스로 규칙을 정해뒀던 것과 달리, 그녀는 점점 의뢰인과 서로의 '영역 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안에는 고민이 담겨있고 쇼코와 의뢰인은 위로를 나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시작은 쇼코의 따스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 아닐까 싶다. 쇼코는 심야에 자신을 불러준 고독한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지킴이를 부르는 의뢰인의 마음을 '외로워서 그런가 보지' 정도로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쇼코의 생각처럼 그들의 감정을 '외롭다' 이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 너머의 말들은 전부 차단해버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한 공간에 존재하며 밤새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들여다본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서는 누군가를 상처입은 상태로 방치하고 싶지 않아.'
───《낮술2: 한 잔 더 생각나는 날》 두번째 술, 가쿠니덮밥, 아키하바라
《낮술》 시리즈엔 맛있는 음식과 술뿐만 아니라, 주인공 쇼코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어떤 식으로 나아가려고 하는지가 담겨 있다. 쇼코는 지킴이 일을 점점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도 시간에 지남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한다. 자신의 딸과 소꿉친구, 그리고 의뢰인들까지 늘 타인의 행복만을 바라고 응원하던 쇼코가 나중에는 본인도 그 행복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자신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
쇼코는 타워형 아파트에 사는 그 의뢰인의 얘기를 듣고, 사람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진심으로 함께 있고 싶어하는 시간이 극히 짧다는 걸 깨달았다. 언젠가는 시들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작은 의혹에 집착하기보다 지금의 감정에 솔직해지자고.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낮술3: 오늘도 배부르게》 열다섯번째 술, 방어 정어리 덮밥, 신바시
읽고 보니 흥청망청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성의 삶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던 이 소설. 이 책은 술이든 음식이든 사랑이든 뭐든 간에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세 권이라는 분량이 아무렇지 않게 술술 읽히는 비결은 작가의 남다른 묘사력 덕분일 것이다. 줄글로 펼쳐진 음식 묘사가 어찌나 생동감 넘치는지. 읽는 내내 그 모습도, 맛도 절로 떠오르고 군침이 났다.
튀겨진 달걀이 소스와 함께 밥에 올려져 나왔다.
먼저 흰자 부분과 튀김 부스러기를 밥과 함께 입안 가득 넣었다. 부스러기의 바삭함에 달걀과 달짝지근한 간장이 휘감긴다.
튀김용 맛간장과 다른 양념이다.
'달걀 하나로도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되는구나.'
몇 입을 먹은 다음, 노른자를 터뜨릴 결심이 섰다. 젓가락 끝으로 콕콕 찌르자 노른자가 탱글탱글하게 움직인다. 좋은 느낌이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젓가락을 꽂는다.
주르륵 노른자가 흘러 흰밥 위에 퍼진다.
(중략)
이것 또한 술에 어울린다. 진한 감칠맛이 감도는 기름진 입안을 술로 씻어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낮술3: 오늘도 배부르게》 고엔지에서 튀김과 차가운 청주를 만끽하는 쇼코
집요하다, 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지는 저자의 섬세한 묘사는 넘치는 생동감 덕분인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줄글이 동영상처럼 틀어지는 생생함이다. 드라마 각본 공모전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방송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소설가다운 위력적인 능력이다. 줄글로 쓴 '먹방'이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쇼코와 비슷한 취미를 지닌 한 사람으로 한 마디(변명을) 덧붙이자면, 혼자 술과 밥을 먹는 것이 궁상맞고 슬픈 일만은 아니다. 작품 속 쇼코나 나처럼 그날의 피로를 기분 좋게 씻어내는 ‘소확행’ 내지는 자신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도 분명 많으리라 생각한다. 술에게 잡아먹혀 끌려다니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술도 삶도 주도권을 잃지만 않으면, 끌려다니지만 않으면 즐거운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