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떠나자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로드 트립

by Ronald

하늘과 산, 그리고 도로.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곤 이 세 가지가 전부인 평화로운 풍경이 창밖으로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마침 라디오에선 좋아하는 Ed Sheeran의 노래가 흘러나오고요.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컵홀더에 놓인 따뜻한 차이 라떼를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한 음료가 천천히 온몸에 온기를 더해줍니다. 출발 전에 부지런히 동네 카페에 들른 보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죠. 친구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말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속도 제한 100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막 시드니 도심을 벗어났다는 싸인이죠. 제한 속도에 맞춰 자동차는 속도를 올리고 구글맵에 남은 시간을 확인합니다. 목적지까지는 110km. 앞으로 이렇게 한 시간 가량을 더 달리면 목적지에 도착하겠네요.


예약한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구글맵을 노려보는 눈동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주소상으론 분명 이쯤인데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숙소 사진과 비슷한 외형의 건물을 찾기 위해 핸드폰과 바깥을 분주하게 번갈아 보기 시작하죠. "저기다!" 확신에 찬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립니다. 제대로 찾아왔단 걸 확인한 뒤에는 잠시 동안 마음껏 기뻐하는 시간을 갖고 신속하게 주차를 마칩니다. 이제는 트렁크를 열어 양손 가득 캐리어와 식량을 들고 숙소 안으로 들어갈 시간. 사진으로 봤을 때도 마음에 들긴 했지만 직접 공간으로 들어서니 너른 공간이 주는 분위기와 확 트인 전망에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대박. 완전 좋은데?"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친구들의 감탄과 칭찬에 숙소를 찾아 예약을 마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갑니다.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방을 배정하고 트렁크는 각자의 방에, 음식물은 냉장고에 넣어둔 뒤 테이블에 앉아 일단 커피 타임을 갖기로 합니다. 저희에겐 롱 위켄드라는 넉넉한 시간이 있고 뭐 하나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일만 남았으니까요.


처음 로드 트립을 시작했을 때 북으로는 Forster, 남쪽으론 Jervis Bay를 다닐 정도로 기운과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 곳 모두 쉬지 않고 4시간 정도를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만만치 않은 거리를 자랑했죠. 연휴 때마다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도시들을 부지런히 다녔으니 이제는 차로 갈 수 있는 곳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것도 재밌겠는데? 그렇다면 일단 그중에 잘 알려진 곳들을 먼저 다녀오자 라고 생각한 게 로드 트립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공항에 가지 않으니 아무래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안 난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한두 차례 다녀보니 오히려 로드 트립의 장점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공항을 가는 건 분명 설레는 일이지만 비행기 티켓팅, 시드니 공항 택시 혹은 공항 주차장 예약, 미리 공항에 도착하기, 목적지에 도착해서 시내로 가는 공항 택시 예약 같은 여러 개의 과정은 항상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함께 딸려왔습니다. 그런데 로드 트립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고 가서 먹을 한식을 포장해가는 건 물론 없어도 괜찮지만 있으면 좋은 물건들(이를테면 여러 권의 책)을 마음껏 가져가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7kg의 기내용 캐리어와 달리 자동차 트렁크와 뒷 좌석에는 한없이 넉넉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죠.


Forster로 로드 트립을 갔을 때는 이동 수단이 바뀌었을 뿐 머릿속에 '가서 해야 할 것'이라고 명령어라도 입력된 사람처럼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여행 가는 지역의 볼거리들을 검색해보고 인기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 유명 비치들을 찾아본 뒤에 일별로 계획을 세우는 식이었죠. 첫째 날은 가볍게 중심가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폭립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에는 로컬 카페에 갔다가 비치와 수영장을 가는 식으로 꽤나 빡빡한 스케줄로 구성된 계획표였습니다. 늘상 여행을 가면 하던 것처럼 시간을 잘게 쪼개서 최대한 많은 것을 하려고 애썼고 최선을 다해 놀았습니다. 매 연휴마다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너무 열심히 놀았던 탓인지 롱 위켄드를 보내고 나면 항상 체력적으로 피로함을 느끼기도 하면서요.


한 번은 정말 가깝고 한적한 동네로 로드 트립을 가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특별히 볼 건 없지만 숙소가 굉장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죠. 어느 정도였냐면 '저곳에선 3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행복할 것 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눈에 반해 일사천리로 예약을 마쳤고 숙소를 보고 결정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대한 기대는 당연히 적었습니다. '가서 해야 할 것 리스트'는 거의 백지에 가까웠지요. MBTI의 끝이 J로 끝나는 사람으로서 처음에는 이래도 되는 걸까 조바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단 가장 중요한 숙소 예약을 마쳤고 함께 하면 즐거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걱정의 그림자는 서서히 옅어졌습니다. '그래, 정 심심하면 거기 가서 검색해보고 다시 계획을 세워도 되는 거니까.'라고 제 스스로를 다독이면서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 여행에서 저희는 정말 3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숙소가 너무 좋았던 거 아니었냐고요?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


별다른 계획이 없다는 건 다른 말로 자유로움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가 다니던 여행은 '여행'이란 이름표를 두른 채, 연휴 내내 바쁘게 놀기를 의미했다는 것도요. 연휴뿐만 아니라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쪽같은 휴가를 내서 간 여행이었고 대부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조금 힘에 부칠지라도 무엇이든 해보고 후회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조금 쉬고 싶은데 내가 언제 또 파리에 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죠. 시간을 넉넉하게 쓰기보다는 쪼개고 쪼개서 한 군데라도 더 가보고, 하나라도 더 보고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죠. 그런데 비행기를 타지 않고 시드니에서 한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동네에 와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이 모든 압박감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는 다음 연휴에도 또 올 수 있는 곳이니 큰 부담 없구나. 그렇다면 애쓰지 말고 잘 쉬다 가야지 라고요.


제가 느긋한 연휴를 보내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주변을 온통 환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서 핸드폰을 집어 듭니다. 8시 7분. 시간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침대에 눕죠. 그렇게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맨 정신도 아닌, 중간 정도의 상태로 한 시간 정도를 누워있다가 9시가 되면 일어나서 느릿느릿 방을 나섭니다. 친구들은 아직 자는 중인지 거실은 고요하고 바깥에 펼쳐진 녹색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환해지죠. 키친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컬러의 캡슐을 골라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친구들도 하나둘 내려와 테이블에 앉습니다. 여행지의 아침은? 역시 컵라면이죠. 전기 포트에 물을 가득 올려 신라면 작은 컵을 먹기로 합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자연스레 과일을 꺼내 배를 마저 채우고요. 그렇게 계속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 꽤 오랫동안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블루투스 스피커에 핸드폰을 연결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오전에는 각자 시간을 보내기로 하죠. 누구는 책을 읽기도 하고 누구는 그저 소파에서 뒹굴거리면서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점심은 분위기를 바꿔 발코니에서 먹는 게 어떨지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만장일치. 메뉴는 한인 타운에서 사 온 쭈꾸미 삼겹살 볶음으로 하고 남은 재료에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볶아 먹습니다. 한국인의 디저트는 역시 볶음밥 아니겠어요. 식후에는 오랜만에 한국 티브이를 다 같이 보기로 하지만 집중해서 열심히 보다가도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잠이 들기도 합니다. (중략) 이렇게 크게 일상을 벗어나지 않은 선에서 긴 연휴를 보냅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흘러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요.


평범한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오고 나자 연휴 혹은 휴가와 일상의 경계가 예전보단 조금 흐릿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갈 때면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조금 뺄 수 있게 되었고요.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연휴를 보내든 시간 낭비라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게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거리는 여행이었을지라도요.


언젠가부터 연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나누는 끝인사가 바뀌었단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잘 놀다 왔네"가 아니라 "이번에도 잘 쉬다 왔네”. 잘 놀다 오는 것만큼 잘 쉬다 오는 여행의 진가를 알아 버렸기 때문이겠죠.




Photo by Luigi Mang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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