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휴가
금요일 오후 5시. 퇴근 시간, 아니 휴가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30분. 중요한 일인데 빠뜨린 건 없는지 아니면 복잡한 사연이 얽힌 스타일이라 백업해 줄 팀원에게 꼭 히스토리를 설명했어야 했는데 깜빡하진 않았는지 체크 리스트를 점검하다가 이제 휴가까지 겨우 30분이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메일이 오면 자동으로 휴가 중임을 알리는 답장을 세팅해놓고 각종 리포트와 계산기, 여러 개의 펜이 널브러져 있는 책상을 정리하면 비로소 휴가 갈 준비가 완료되죠. 물론 집에 가서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만 공식적으로 회사 업무가 종료되면 그제야 비로소 휴가를 간다는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배실배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2주 후에 봬요-"라고 세상 인자한 얼굴로 인사를 한 뒤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옵니다. 금요일 오후 5시 31분, 2주 간의 휴가가 시작되는 시점이죠.
호주에선 1년에 약 4주간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입사를 하고 처음에는 휴가가 한 달이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을 감출 수 없었죠. 항상 주어진 시간이 충분하지 않게 느껴져 빡빡한 일정을 고수하던 한국에서의 여름휴가와 달리 2~3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행지에서 신나게 놀고 여유롭게 재충전까지 하고 돌아올 수 있겠단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퇴사를 하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던 유럽 여행이나 평소에는 너무 멀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던 여행지들이 선택지로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휴가 기간에 유럽이나 쿠바 같은 곳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주기적으로 가장 열심히 휴가를 간 곳은 의외로 한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곳에 소중한 휴가를 쓰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이고 해외 생활이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한국은 가장 매력적인 휴가지로 부상하였습니다. 그곳엔 보고 싶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음식, 익숙한 장소들이 가득한, 그야말로 확실한 행복이 있는 휴가지였기 때문이죠.
휴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로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휴가 가기 직전을 꼽습니다. 보장된 즐거움이 코앞에 와있는 시점이기도 하고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에 설레는 상태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MBTI의 끝자리가 J로 끝나는 사람으로서 계획하는 것 자체를 무척 즐긴다는 게 또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처럼 계획하는 단계를 가장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계획 광인만 있었다면 친구들과 함께 휴가 일정을 타협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거란 결론에 다다르자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해보니 밤늦은 시간에 여행 계획을 공유하겠다고 친구들에게 계획표를 읊고 있으면 "좋아 좋아~"라며 그저 맞장구를 쳐주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여행과 달리 한국 휴가의 특이점은 밀린 방학 숙제를 해치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호주에 비해 한국의 의료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간의 의료 기록이 있는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받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놓였고 무엇보다 홀로 해외살이를 하는 동안 절대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에 들어올 때마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체크하고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건강 검진, 안과/치과 정기 검진, 한의원 방문 같은 일정을 한 달 전에 미리 예약하고 그 사이사이 가족, 친구들과의 약속을 끼워 넣었습니다. 새벽부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조식을 챙겨 먹는 여행자처럼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휴가가 특별히 널널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겠죠.
필요한 예약을 완료하고 나면 메모장 어플을 켜는 것으로 본격적인 휴가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닭갈비, 곱창, 즉석 떡볶이, 짬뽕과 탕수육, 순대볶음, 치킨, 참치회 등등.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미리 준비라도 하는 사람처럼 생각나는 것들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고향의 맛을 찾아 꽤 먼 지역에 위치한 한식당을 일부러 찾아갔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거나 늦은 밤 SNS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에 아니면 그냥 먹고 싶어서 등등 이유도 다양했습니다. '맞다 맞다, 이걸 빼먹을 뻔했네. 클날 뻔!' 하며 추가에 추가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제법 긴 리스트가 완성됐죠. 동네에서 즐겨 찾던 중국집부터 너무나도 유명한 명동교자나 하동관 같은 곳 또는 프랜차이즈 특유의 '아는 맛'이 그리워 유가네 닭갈비 같은 곳을 적기도 했습니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맛집이나 기분을 내기 위해 일 년에 한 두 차례 갔던 곳도 좋지만 무엇보다 질리는 줄도 모르고 자주 방문하던 곳들이 가장 많이 생각나는 법이니까요.
사람을 고향과 이어주는 끈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위대한 문화, 웅대한 국민, 명예로운 역사. 그러나 고향에서 뻗어 나온 가장 질긴 끈은 영혼에 닿아 있다. 아니, 위胃에 닿아 있다. 이렇게 되면 끈이 아니라 밧줄이요. 억센 동아줄이다. - <미식견문록>, 요네하라 마리
한국으로 휴가를 오면 한 끼 한 끼가 아쉬워 하루에 여섯 끼쯤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주어진 시간도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도 정해져 있단 사실이 아쉬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결책을 강구하다가 결국 주말 아침 9시부터 명동에서 친구들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주말 아침부터 영업을 하는 음식점은 흔치 않지만 명동 한복판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하동관이 있으니까요. 맑은 국물에 송송 썬 대파를 잔뜩 넣고 든든한 아침을 먹으며 친구들과 밀린 근황을 업데이트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곰탕 한 그릇을 뚝딱 비웠고 그 이후로도 먹고 먹고 또 먹는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까지 한국 음식에 진심일 일 인가 싶었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말처럼 제가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 중 음식은 분명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주로 이주한 후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인기는 날로 날로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맛집을 방문한 뒤 부지런히 인증샷을 올리는 친구들의 피드를 보고 있자면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죠. 그러다가 한 해는 작정하고 여행자 모드로 한국으로 휴가를 와서 친구들에게 가이드를 부탁한 적도 있습니다. 온라인으로나마 한국의 최신 트렌드를 따라잡아 보려고 했지만 역시 현지인의 정보력은 따라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죠. 대충 가보고 싶은 동네와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은지 미리 귀띔해두면 친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코스나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저를 안내해주었습니다. 덕분에 그해에는 말로만 듣던 연남동과 을지로 같은 동네들이 오랫동안 업데이트되지 않았던 저의 서울 지도에 추가되었습니다. 오픈 플랜을 가장한 노 플랜으로 서울을 방문했더니 친구들 덕분에 제가 알던 서울이 한층 더 풍부해진 기분이었죠.
서울에 가면 손에 쥐고 있던 카드들을 아낌없이 써주는 친구들을 차례차례 만나곤 했습니다. 여기서 손에 쥐고 있는 카드란 반차, 연차, 친정에 아이 맡기기 등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삶의 모습도, 각자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도 학창 시절 때나 사회 초년생 일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졌지만 멀리서 온 친구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겠다며 만사를 제쳐두고 일정을 맞춰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무엇보다 한국 휴가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봤는데도 성에 차지 않을 땐 점심시간에 맞춰 친구네 회사로 찾아간다든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퇴근 후에 얼굴을 또 보는 식으로 아쉬움을 달랬죠.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평일 오후에 역삼역 GFC몰에 있는 폴 바셋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이 시간에 일도 안 하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라며 호기심을 가져보신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옵션을 드리자면 어쩌면 그 사람은 한국으로 휴가를 온 해외 이주민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그랬기 때문이죠. 점심시간이 끝난 친구를 올려 보내 놓고 혼자 카페에 앉아 한낮의 서울 풍경을 보는 건 한국 휴가의 또 다른 묘미였습니다.
한국은 새로울 건 없지만 익숙함과 편안함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큰 만족감을 주는 휴가지였습니다. 삼십 대 중반이 되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 예전처럼 가슴 뛰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뒤 이제는 그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재밌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알고 보니 한국은 사람, 음식, 장소의 삼박자가 모두 잘 맞아떨어지는 휴가지였고요. 오랫동안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항상 행복을 찾으려 했는데 해외 생활을 몇 년 해보고 나서야 생각했던 것보다 행복이 먼 곳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 차례의 한국 휴가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 이것이야 말로 변치 않는 행복의 공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