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벌스데이!

생일 선물

by Ronald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건 여전히 제게 어려운 미션 중 하나로 꼽힙니다.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르면 잘 몰라서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고 잘 아는 사람이면 그만큼 상대의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찾고 싶어 발을 동동거리게 되기 때문이죠. 매년 선택지를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점점 옵션은 줄어드는데 생일은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어김없이 돌아온다는 점에서도요.


2년 전 8월에도 친한 친구의 생일을 앞둔 저는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물로 뭐가 좋을지를 저울질해보다가 생각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결국 친구가 어떤 캐릭터였는지 따져보기 시작했죠. H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뭐든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는 타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악착같음과는 거리가 먼 타입인데 의외로 실행력이 굉장히 좋아서 거의 아이디어가 떠오름과 동시에 생각한 걸 행동으로 옮기는 액션형이기도 하죠. 에너지 총량 자체가 많진 않지만 그걸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사용할 줄 아는 친구. 그런 H가 당시 종종 언급했지만 좀처럼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단어가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식물이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이었기 때문에 지금 만큼 실내 인테리어가 유행은 아니었지만 몬스테라 같은 식물들이 막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이리저리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새하얀 도자기 화분에 담긴 중형의 몬스테라를 발견하곤 저거 하나만 들여놔도 집 분위기가 확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화분이라면 직접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크기도 무게도 감당이 안돼서 친구에게 집주소를 물었고 생일날 이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주문을 마쳤습니다. 직접 선물을 전해주진 못하니 카드라도 신경을 써야겠다 싶어 전해에 다녀온 일본에서 구입한 비장의 카드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A5 사이즈의 고양이 캐릭터 카드였는데 고양이가 들고 있는 마이크를 누르면 엔카풍으로 생일 축하송을 불러주는 카드였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고양이의 목소리가 너무 익살맞아서 몇 차례 버튼을 눌러가며 카드에 부지런히 메시지를 적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H는 생일 전날 도착한 선물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않았고 아낌없이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생일 카드를 전달하자 깜짝 놀라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와, 진짜 감동이다. 요즘 한국에선 이렇게 안 하고 대부분 '선물하기'로 축하해주거든. 이렇게 선물이랑 카드 받는 거 오랜만이야. 고마워 정말". 당시에는 호주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오, 그래?"하고 대충 넘겼지만 어플에 접속하면 예전보다 복잡하고 다양해진 기능들이 그제야 떠올랐습니다. 새롭게 무언가를 익히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하는 게 익숙하고 좋아서 좀처럼 손이 잘 가지 않는 메뉴였죠. 하여간 그날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카페 영업이 종료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해피 벌스데이~ 투우우우 유우우우~"하고 구성지게 한가락을 뽑는 생일 축하송을 중간중간 들으면서요.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세요!"

친구의 말을 현실로 확인하게 된 건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일상을 주고받을 정도로 자주 연락을 하진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둘 온라인 선물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카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케이크와 음료 쿠폰, 베이커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케이크 쿠폰이 주를 이루었죠. 무엇보다 간편하고 받는 이가 부담을 덜 느낄 수 있는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선물과 카드를 선물하는 건 좀 오버인 것 같고 대신 간단하게 점심이나 사주려고 했더니 시간이 잘 맞지 않을 때는 꽤 유용한 방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낯설긴 했지만 이렇게 온라인으로라도 마음을 표현해준 이들 덕분에 심심하면 한 번씩 선물함을 열어 부지런히 카페와 베이커리를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호주에선 카드와 선물을 직접 선물하는 문화가 아직까지 보편적입니다. 아무래도 딜리버리 문화가 한국만큼 발달하지 않아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는 것보단 쇼핑몰에 가서 선물을 구입하는 게 일반적이고 연말이 되면 선물 코너로 새 단장하는 백화점 Myer의 꽤 넓은 면적이 카드 섹션으로 구성될 만큼 아직까지 손으로 카드를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직접 포장을 하는 문화도요.


친구의 생일을 맞아 Myer로 선물을 사러 갔다가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물할 것이니 포장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직원도 자신 있게 "Okay"라고 대답했는데 포장지로 제품을 포장하는 손놀림이 어딘가 조금 엉성해 보였습니다. 포장의 하이라이트인 리본 단계에 이르자 의심은 결국 확신이 되었고 리본을 잘 묶지 못해 어설프게 매듭짓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매장에선 보지 못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이죠. 포장해달라고 하면 스태프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포장지와 리본을 이용해 순식간에 포장을 마쳤고 그렇게 야무지게 포장된 제품을 받아 든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날 집에 와서 엉성하게 포장된 패키지를 바라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리본을 풀고 다시 묶었습니다. 그동안 손재주가 좋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어쩌면 이곳에서 저는 평균 이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죠.


알고 보니 크리스마스, 부활절, 어머니의 날 같은 대형 시즌에는 규격화된 선물 세트가 출시되었습니다. 1층 화장품 코너 중간중간에 탑처럼 Gift Set가 쌓여있었고 '선물할 거면 여기 포장까지 된 이거를 사면 돼!'라고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았죠. 물론 티 전문 브랜드 T2나 Lush, Loccitane 같은 익숙한 브랜드들은 한국과 비슷한 퀄리티의 포장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앞서 이야기한 화장품 브랜드와 비슷한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레 직접 포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이렇게 마음을 먹고 보니 카드만큼 포장지 디자인도 무척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느낀 게 저뿐만이 아니었는지 친구들도 하나둘 직접 포장한 선물을 들고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잘하면 잘한 대로 친구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포장해 온 걸 보는 건 생일 파티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왠지 모르게 그들을 닮은 포장된 선물과 카드를 들고 생일 파티에 등장하곤 했기 때문이죠.


막상 제가 이 과정 중에 가장 재미를 들린 건 카드를 고르고 메시지를 적는 일이었습니다.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뿐만 아니라 작은 서점이나 동네에 있는 선물 가게에 가면 항상 재치 있고 귀여운 카드가 가득했습니다. 매장에 있는 카드를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받는 이를 떠올리며 어울릴 법한 카드를 골라서 때론 듬성듬성하게, 갑자기 할 말이 쏟아지는 날에는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카드 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일날에 선물과 카드를 전달하면 서둘러 선물 포장을 뜯기보단 전날 밤에 열심히 카드 썼단 걸 알고 있다는 듯 가장 먼저 카드를 찾아 두 눈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훑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어떨 때는 선물이 오히려 덤으로 느껴질 정도로요.


쓰지모토 : 베를린에 다녀왔는데, 독일은 지금 국가 방침으로 '탈원전'을 결정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모두가 조금씩 전기를 아껴 써야 하니까 밤에는 일찍 자거나 하겠죠. 베를린에는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 없어요. 24시간 편의점은 밤에도 물건을 살 수 있어 편리한 건 사실이지만, 없다고 해서 죽지는 않죠. 독일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조금 불편해질지도 모르지만, 없어도 되는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라고 말하더군요. 편리함인가 불편함인가 하는 기준으로 말하면, 조금 불편한 건 확실해도 참을 수 있는 건 참겠다는 거죠.

마리 : 편리함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을 제거하고, 그 부분을 상품화시키는 셈이죠. 그 점과 우리에게 남는 능동적인 행동은 오로지 돈을 지불하는 것뿐이에요.

-『언어감각 기르기』, 요네하라 마리


드물게 온라인 쇼핑으로 선물을 고를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부지런함이 필요했습니다. 호주 내 배송일 경우 보통 10-15 business days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죠. 생각보다 배송지가 가깝고 판매자가 빠르게 처리를 해줄 경우에는 한국에서와 같이 2-3일이면 배송이 완료되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다른 주State에서 배송이 오는 경우에는 정말 일주일이 넘어서 배송이 되는 경우도 많아서 무조건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나라는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왜 이렇게 모든 업무처리가 느린 건지 조금 이해가 안 됐는데 이렇게 해서 주 5일 38시간의 업무 시간이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2년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레 호주의 속도에 적응하게 되어 일주일 이상 걸리는 배송 시스템에도 커다란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면 주어진 시간에 맞춰 조금 서두르면 될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얼마나 놀라운지요.


지난주에는 멀리 시드니에서 보낸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평소 주변인들을 잘 챙기고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친구가 9월 말인 제 생일에 맞춰 미리 보낸 생일 선물이었죠. 몇 달 동안 록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도 제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할 것 같은 물품들을 다람쥐처럼 부지런히 사모았을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박스를 열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먼 곳에서도 신경을 써주는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아 그날은 하루 종일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것 같습니다. 박스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다가 갈색 봉투에 담긴 카드를 발견했습니다. 'to my favourite person'이라고 써진 카드를 열어 친구의 손글씨를 보자마자 마음이 말랑말랑 해졌습니다. 맨 끝에는 '한국에서든 호주에서든 조만간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건강 잘 챙기고 많이 웃고 행복합시다. 인생은 짧으니까'라는 문장이 쓰여있었죠.


저는 앞으로도 손편지를 쓰고 온라인으로 선물을 보내기보단 가능하면 직접 전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싶습니다.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하더라도요. 물론 사정이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때에는 간편한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겠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만 전달할 수 있는 마음도 있고 친구의 말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함을 한껏 표현하기에도 인생은 짧으니까요. 좋아하는 이들의 생일에는 마음 닿는 만큼 축하를 해주고 싶습니다. 큰소리로 힘껏, "해피 벌스데이!" 하고요.




이전 11화운전 포비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