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포비아가 있습니다

자동차

by Ronald

제가 본격적으로 운전을 시작한 건 시드니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뚜벅이로 시드니에서 2년 넘게 생활을 한 후,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이 도시에서의 삶이 그려지기 시작했을 때 저는 진지하게 자동차 구입을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찍이 회사를 통해 자동차가 없으면 생활이 얼마나 불편할지, 인사 담당자에게 자동차가 없는 시드니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을 듣기도 했지만 당시 호주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있던 저는 어느새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생활에 꽤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버스에 탑승하려면 경기도민처럼 버스 기사에게 구애의 춤을 춰야 하단 사실을 몰라서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적도 있지만 몇 차례의 실수 후, 저 멀리서부터 버스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면 신나게 손을 흔들며 탑승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했지만 사실상 운전을 하지 않았던 저는 시드니에서 자동차를 구입하기로 결심한 후 연수부터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운전 연수를 해준다는 한국인의 핸드폰 번호를 받고 퇴근 시간에 맞춰 연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연수 구간은 당연히 집-회사 코스였습니다. 회사에서 멀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이 가능한 곳으로 거처를 구했기 때문에 집에서 회사까지는 5km가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고 퇴근 후 한 시간 동안 이 구간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감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시드니의 운전 환경은 인구 밀집도가 높은 서울에 비해 도로 환경이나 운전자들의 매너가 좋은 편이었고 때문에 초보 운전자로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호주 중고차 거래 사이트인 Carsales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당시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던 저는 집주인이자 자동차 애호가인 G의 도움을 받아 인스펙션을 함께 다녔습니다. 하루는 G가 Gumtree(한국의 당근 마켓 같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끝내주는 차를 발견했다며 이 차라면 초보 운전자가 마음껏 운전을 하기에(=긁고 찌그러져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가격) 좋은 선택 아니겠냐는 말에 결국 주말에 30km가 넘는 교외까지 차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차는 연식이 무척 오래되었지만 전 주인의 지극한 정성과 관리로 인해 컨디션이 양호한 편이었는데 당시 차보다도 더 눈에 들어왔던 건 개성 가득한 오너의 집이었습니다. 앨비스 프레슬리의 골수팬인 50대의 오너는 집은 물론 차고에 까지 앨비스 프레슬리 관련 각종 굿즈가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저희는 "WOW...!"를 연발하며 엘비스의 액자와 LP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지명도 생각나지 않는 먼 곳으로 차를 보러 갔다가 30분 정도 엘비스의 이야기를 하다 돌아온 건 아직까지도 신기하고 재밌는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한두 주쯤 더 매물을 찾아보다가 Darling Point로 VW Polo를 보러 갔고 나이에 비해 주행거리가 적고 컨디션이 깔끔한 것에 반해 그 자리에서 차를 구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인생의 첫 차였죠.


오너드라이버가 됐단 사실에 감격하며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게도 차가 생기다니...!!'를 외치며 쓸고 닦으며 시간이 생길 때마다 은은한 눈빛으로 제 Polo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단 말이 자동차에도 해당될 줄은 몰랐죠. 운전으로 인해 생긴 생활의 편리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쇼핑몰에 갔다가 한 번에 후방 주차에 성공하거나 집 앞에서 혼자 평행 주차 연습을 하다가 인도와 자동차가 완벽하게 평행을 이뤘을 때, 세차를 한 날에는 내 차가 너무 반짝반짝해서 등등 감탄할 일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좋은 걸 왜 진작에 사지 않았을까 과거의 나를 꾸짖으면서 말이죠.


무엇보다 가장 좋아했던 건 밤늦은 시간에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 일이었습니다. 퇴근 후 9시 30분쯤 시작하는 영화를 관람하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영화관을 빠져나오면 텅 빈 도로를 마주할 수 있었는데 이때가 가장 자유롭고, 느슨한 마음으로 편히 운전할 수 있는 시간대였기 때문이죠. 집까지 약 10킬로 정도의 거리를 달리는 동안 마주치는 차들은 눈에 띄게 적었고 가끔 앞뒤로 다른 차량의 라이트 하나 보이지 않을 때면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십여분을 달리면 익숙한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스피커 볼륨을 줄이고 시동을 끈 뒤 가방을 챙겨 작고 아늑한 나만의 공간을 빠져나와 마지막으로 "삐빅-" 하고 도어록 버튼을 누르면 오늘 하루도 알차게 보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제게 운전 포비아가 생긴 건 출근길에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8시 30분쯤 익숙한 풍경을 지나 늘 지나던 도로를 따라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커브가 있는 내리막 길을 가던 와중에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제게 돌진하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두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무엇을 어찌해야겠단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에어백이 부풀어 있었고 자동차에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출동한 앰뷸런스에 실려 저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심하게 파손된 제 차는 그 자리에서 폐차되었습니다. 시드니에서 운전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후에는 회사 동료와 카풀을 하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비록 차는 없지만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차가 없는 시드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를 기준으로 하면 <시드니 생활> 시즌 3 정도 되려나요. 무언가의 존재감은 그 존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말처럼 겨우 1년 6개월이었지만 늘상 있던 차가 없어지니 처음에는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나고 나니 친구와의 카풀도, 차가 없는 생활도 또 적응이 되더군요.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 놀라운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시기였습니다.


사고 후에 의외로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건 주변에 존재하는 운전 포비아들이었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운전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과 저처럼 사고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케이스, 이렇게 두 타입으로 나뉘었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운전이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인 시드니 생활은 주변에 생각보다 운전포비아가 꽤 많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게 알게 해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중교통이 발달해 마음만 먹으면 운전을 안 할 수 있는 서울과 달리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만 하는 시드니 생활은 운전포비아가 자연스레 노출되는 환경이기도 했으니까요. 주변인들을 보면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운전포비아의 비율은 꽤 높았는데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25%,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시키면 하는 비율이 60%, 그리고 운전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15%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운전포비아들은 차를 가지고 시티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출퇴근 길을 제외하면 운전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주차 문제로 한 대의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운전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단골로 운전대를 잡곤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드라이버를 자처하는 친구들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드니에서 살지 않았다면 제게 운전포비아가 생길 일도 없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제가 밤늦은 시간에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단 사실도 발견하지 못했겠죠. 여전히 운전은 무섭지만 운전을 할 때만 느낄 수 있었던 어떤 감각은 아직까지 제게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새로운 환경에서 발견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이 한두 개쯤 있으실까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다시 운전대를 잡지 않았지만 가끔은 예전처럼 혼자 고요한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아마 제게 꽤 기념할 만한 날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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