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Tea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단 사실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전국 한파 특보'같은 뉴스 헤드라인을 본 것 같은데 침구 교체를 깜빡하곤 간밤에 코끝이 시려서 잠에서 깬 날이라든가 이불속이 너무 포근해, 이불 바깥으로 나가는 게 너무 위험하게 느껴지는 날, 혹은 아침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일단 따뜻한 무언가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바로 그렇습니다. 긴급 처방으로 진한 커피를 내려서 카페인을 들이붓는 방법도 있지만 모처럼 주말에는 조금 느긋한 방법으로 아침을 맞이해 보기로 합니다. 이럴 때는 머그컵에 팔팔 끓는 물을 가득 부어서 내린 뜨거운 티가 제격이죠.
"이거"
부활절 연휴를 마치고 만난 S가 다짜고짜 제게 쇼핑백을 건넸습니다. 지난번에 S에게 부탁한 게 있는데 깜박 잊은 게 있나 싶어 재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자 이번에는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릅니다. '뭐지?'. 이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S가 설명을 덧붙이죠. "선물. 이스터 쇼 갔다가 쇼백 하나 사 왔지." 아하, 그제야 머리 위에 둥둥 떠있던 물음표가 재빨리 느낌표로 바뀝니다. S가 부활절 연휴에 친구들과 이스터 쇼를 보러 간다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죠.
이스터 쇼는 부활절 연휴를 맞아 매년 시드니 올림픽 파크에서 개최되는 페스티벌입니다. 쉽게 말해 기간 한정 놀이동산인데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부터 통나무 자르기, 승마 같은 각종 프로그램과 동물에게 먹이 주기 등 다양한 놀이와 문화 행사로 구성된 대규모 쇼입니다. 시드니에서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축제이다 보니 여러 브랜드가 참가해 다양한 구성과 저렴한 가격으로 선물 세트를 내놓는데 이걸 바로 쇼백이라고 부르죠. (럭키백과 비슷하지만 쇼백은 구성이 모두 동일하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불 이하의 저렴한 것도 있지만 평균 20~30불로 가격 대비 빵빵한 구성을 자랑하다 보니 일부 쇼백은 조기 품절되는 경우도 있어 갖고 싶은 쇼백을 구입하기 위해 서둘러 이스터 쇼에 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상품입니다. 해리포터, 어벤져스 같은 매니아 층을 거느린 쇼백부터 애니메이션 Frozen, Dora, Peppa Pig 그리고 Cadburys, Kitkat, Oreo 같은 초콜릿 브랜드까지 매년 100여 개가 넘는 쇼백이 나오다 보니 정말 눈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죠. 처음 시드니 이스터 쇼에 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쇼백이 쌓여있는 광경을 보고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S가 선물로 준 쇼백이 저에겐 첫 쇼백이었던 셈이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뜯어본 쇼백의 구성은 꽤 다양했습니다. 어떤 브랜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Tea를 메인으로 한 쇼백이었던 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안에 커다란 티팟과 여러 종류의 티백이 들어있었거든요. 그런데 다소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티팟보다 더 눈길이 갔던 건 티백이었습니다. 녹차 같은 일반적인 것도 있었지만 고춧가루와 후추가 들어간 이색적인 티가 있었기 때문이죠. 내용물을 보고 처음엔 두 눈을 의심했지만 아무리 봐도 고춧가루가 들어간 차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가장 먼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그 티백을 꺼내어 티를 우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다행히 차로 마시기 어려울 만큼 맵거나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여러 차례 갸웃거리며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묘한 차였습니다.
다소 획기적인 고춧가루가 들어간 티백을 선물 받은 이후로도 S에게 꽤 여러 차례, 차를 선물 받았습니다. 여행 가서 마시라며 티 트레이너와 여행용 컵이 포함된 Travel Kit부터 여름에 냉침해서 마시기 좋은 여러 가지 과일이 들어간 티백 세트, 런던으로 출장을 갔다가 해롯에서 구입한 얼 그레이까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꽤나 차에 집중된 선물이었죠. 그러다가 한국으로 휴가를 온 S가 저에게 꽤 묵직한 쇼핑백을 건넸고 신나게 포장을 뜯자 그 안에는 Remedy Tea Pack이라고 써진 다섯 종류의 찻잎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페퍼민트, 레몬 그라스&진저 같은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좋은 차로 구성된 티 세트였죠. 그리고 그 순간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다'라고요.
이스터 쇼백에 대한 S의 버전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이스터 쇼에 갔다가 티가 들어간 선물을 해줬을 때 제가 너무 좋아했다고요.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 자신이 미처 몰랐지만 제가 차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저렇게 뛸 듯이 기뻐하는 걸 보니 이제부터라도 여러 가지 차를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마침 호주에는 유명 차 브랜드인 T2를 비롯해 티를 마시는 게 꽤 보편화되어 있다 보니 '지난번에는 과일차 위주로 구성된 티를 선물했으니 이번에는 잠 자기 전에 마시기 좋은 티가 어떨까'. 이런 식으로 S는 매번 매우 새롭고 알찬 티 세트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반면 제가 기억하는 쇼백은 이랬습니다. S의 말대로 그날 저는 분명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해외로 멀리 휴가를 간 것도 아니었고 그저 연휴에 시드니에서 열린 페스티벌에 갔다가 제 생각이 나서 소소한 선물을 챙겨 온 마음씨가 고마웠기 때문이죠.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되면 주변인들에게 카드를 쓰고 작은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시드니 근교로 여행을 가거나 호주 내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갔을 때 친구들의 선물을 챙긴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S가 불쑥 쇼백을 건넸고 저는 여기에 왕창 감동을 받아버린 거죠. 쇼백에 들어있던 티가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챙기는 배려심과 세심함 때문에요. 그런데 연속으로 5번 정도 Tea 선물을 받은 뒤에야 저는 S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한국으로 휴가를 온 S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했던 것 같습니다. "오, 정말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
때로는 오해가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친구의 오해 덕분에, 꽤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차를 두루두루 시도해 볼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입맛에 맞는 티도 하나둘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제 감기 기운이 있는 날이면 저는 레몬 그라스&진저를 우려 달콤한 꿀을 넣어 마시고 좋아하는 몽블랑 케이크를 사 온 날에는 커다란 머그잔에 얼 그레이를 잔뜩 우립니다. 그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는 T2의 Tummy Tea라는 차인데 민트 베이스라 상쾌한 맛을 자랑하지만 끝 맛이 은은하게 달아 말 그대로 누군가가 따뜻한 손으로 배를 스윽스윽 쓸어주는 기분이 들게 하는 차입니다. 언젠가 모로코에서 마셨던 모로칸 민트 티가 꽤 비슷한 맛이었는데 그 차의 맛이 잊혀지지 않아 만들어보려고 레시피를 찾아본 적도 있었던 저에겐 너무 안성맞춤의 선물이었던 거죠. 지금도 Tummy Tea를 호로록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는 말처럼 오해는 가능하면 빠른 시간 안에 푸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해가 오해를 낳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그걸 해결하는 일도 퍽 재밌다는 생각을 이 사건을 통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문장을 저는 조금 다른 버전으로,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다. 하지만 때론 어떤 오해가 뜻밖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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