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오늘 첫 잔은 내가 살게. 뭘로 마실래?"
친구의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이야기하려다가 오늘은 조금 다른 걸 시도해보기로 합니다. 여기는 어떤 맥주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이럴 땐 주문하러 가는 친구를 따라나서는 게 상책이죠. 오후 7시 17분, 이제 막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볍게 맥주를 마시기 위해 찾아든 손님들로 펍은 서서히 활기를 더합니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음악 소리에 저도 모르게 리듬에 맞춰 경쾌한 발걸음으로 쿵짝쿵짝 스텝을 밟으며 카운터에 도착하죠. 그리곤 눈앞에 놓인 생맥주 탭을 진지하게 바라봅니다. 4 Pines, Coopers, Little Creatures, Young Henrys 등 막상 열 종류가 넘는 맥주가 눈앞에 펼쳐지자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집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맛있는 맥주를 고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온 신경을 집중해 보기로 합니다. 오늘 기분은 어떤지, 이런 날은 어떤 맥주가 잘 어울릴지를 따져보자 생각보다 빨리, 정답이 두둥실하고 떠오릅니다. 4 Pines의 Pale Ale. 목 넘김이 시원하고 고소한 라거도 좋지만 무더운 여름날에는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나는 페일 에일을 마시는 것으로 또 다른 청량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One 4 Pines Pale Ale, Two Guinness, One Little Creatures Pacific Ale."
주문을 받자마자 정확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총 네 잔의 맥주잔을 만드는 바텐더의 현란한 스킬을 잠시 감상해보기로 합니다. 맥주가 흘러넘칠 때까지 탭을 열었다가 일부러 맥주를 조금 콸콸 흘려보낸 뒤 잔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떨어뜨리며 거품 만드는 동작을 몇 차례 반복합니다. 적정량의 거품층이 생기면 그 순간 탭을 올리고 잔 위로 올라온 거품을 가볍게 싸악 걷어내면서 완성. 군더더기 없는 전문가의 솜씨는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죠. 순식간에 네 잔의 맥주가 완성되고 결제를 마친 뒤, 각자 두 잔씩 맥주잔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갑니다. 연한 레몬 컬러의 퍼시픽 에일부터 황금빛의 페일 에일, 그리고 진한 초콜릿 색에 가까운 기네스 두 잔까지 각기 다른 컬러를 지닌 세 종류의 맥주가 테이블 위로 놓입니다. 모두 하려던 말을 잠시 목 뒤로 삼키고 그보다 먼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마셔보기로 합니다. "Cheers~!" 퇴근 후 Round 2를 시작하는 말로 이만한 단어가 없죠.
"꿀꺽"
한 모금을 마시자 톡 쏘는 청량감과 함께 상큼한 과일향이 입안을 감쌉니다. 처음으로 페일 에일을 마셨던 날, 저는 적잖이 충격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페일 에일이 제가 그동안 마셔봤던 맥주와는 너무나도 다른 맛을 선사했기 때문이죠. 당시 제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맥주지만 맥주 같지 않은 맛'. 한국에서도 가끔 기네스 혹은 호가든 같은 맥주를 마시며 옆길로 샌 적은 있지만 그때까지 제게 맥주란 고소하고 약간 쌉싸름한 맛을 자랑하는, 여름이면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라거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드니 펍에서 처음으로 에일을 맛보게 되었고 그렇게 맥주 인생의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죠. 애초에 주량이 약한 편이라 한 번에 여러 잔의 맥주를 소화하진 못 하지만 퇴근 후에 친구들과 써리 힐, 뉴타운, 달링허스트를 다니며 새로운 펍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맥주를 마셔보는 게 시드니 생활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드니는 천국 같은 곳이었죠.
시드니엔 다양한 맥주를 구비한 펍도 많지만 아예 양조장을 두고 로컬 비어를 판매하는 곳도 많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주, 강릉, 속초에 적지 않은 브루어리가 생긴 것처럼 시드니에선 이런 모습을 조금 더 일찍 만나볼 수 있었죠. 제가 처음으로 가 본 브루어리는 Marrickville에 위치한 Batch였습니다. 마치 바이킹선에 탔을 법한, 커다란 체구의 수염을 잔뜩 기른 남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한쪽엔 생맥주 케그를, 다른 한 손에는 맥주잔을 든 캐릭터가 마스코트인 곳이죠. 주소를 찍고 찾아간 펍은 생각보다 조금 외진 곳에 있었습니다. 주변에 다른 가게는 고사하고 거리 자체가 너무 한산한 모습을 하고 있어 주차를 하고 펍까지 걸어가면서 '이렇게 외진 곳에서도 장사가 되나?'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죠. 하지만 커다란 창고 같은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방금 전에 한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규모 콘서트나 맥주 페스티벌이 떠오를 정도로 그곳은 사람과 음악, 그리고 맥주로 넘쳐나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Can I try?"
주문을 하러 갔다가 카운터 앞에서 서있는 시간이 30초 이상으로 길어지는 날에는 최후의 카드로 시음을 해보기도 합니다. Ale만 해도 Pale, Summer, Pacific 등 종류가 꽤 많다 보니 설명만 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감이 안 잡히기도 하고 조금 낯선 이름을 가진 각각의 Ale들이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하니까요. 테스트가 가능하냐는 물음에 "당연하지"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기다렸단 듯 궁금했던 탭 두세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아주 작은 잔에 담긴 한 모금의 맥주를 마셔보고 다음 것도 시음. 이렇게 직접 맛을 보면 아무래도 선택이 훨씬 쉬워집니다. 첫 번째 것보단 두 번째 맥주가 조금 더 은은해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오늘은 이것으로 결정. 조금 더 다양한 방식으로 즐겨보고 싶은 날에는 아예 샘플러로 시작을 하기도 합니다. Pale Ale, IPA, Stout 등 각 레인지별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맥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특별히 마시고 싶은 맥주가 없는 날에는 이렇게 재미와 다양성을 한꺼번에 추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차선책이 될 수 있죠.
Pale Ale과 달리 Stout나 Dark Ale 같은 흑맥주는 마실 때마다 새로운 맛을 발견할 수 있는 매력적인 그룹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탄산이 덜하고 맛이 진해서 이건 또 다른 의미로 맥주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죠. 첫맛은 다크 초콜릿을 깨물었을 때처럼 깊고 쌉싸름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부드러운 거품과 잘 어우러졌고 캐러멜의 은은한 단 맛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풍부함 바디감을 자랑하는 커피처럼요. 한때는 이 세계에 빠져 퇴근길에 리쿼 샵에 들러 브랜드별오 흑맥주를 한 병 사는 것에 재미를 들린 적도 있습니다. 각 브랜드의 다크 에일을 마셔보며 사실 내 취향은 흑맥주였구나..! 라며 그동안 모르고 있던 취향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뻐했지만 강하고 개성 있는 것들이 늘 그렇듯, 6개월 정도 지나자 조금 시들해져서 한동안은 흑맥주를 의식적으로 멀리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그냥 그때그때 음식과 분위기에 따라 맥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다른 것처럼 각각의 맥주가 가진 특징을 알게 되니 선택의 폭이 한층 넓어진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상황에서, 단 하나의 맥주가 꼭 정답일 리도 없고요.
이렇게 맥주 친화적인 환경과 술을 즐겨마시는 친구들을 곁에 둔 덕분에 이제는 어디서든 부담 없이 맥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낮에 혼자 식당에 가서도 반주 삼아 종종 맥주를 시키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제게도 맥주 첫 모금이 가장 맛있는데 그 한두 모금이면 충분하다 보니 맥주를 남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편입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친구들은 괴로워하고 저는 그렇게 괴로워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또 즐거워합니다. 친구들에게 종종 "평생 마실 맥주를 시드니에서 다 마셨다"라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러면 왠지 모르게 친구들은 제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요. 각자 주량은 다르지만 이런 걸 보면 괜히 친구가 된 게 아니구나 싶죠.
<불편+술=불편 없음>
수많은 애주가들의 뼈를 때린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에 등장하는 공식입니다. 절절한 사랑 고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뼈 아픈 자기반성이 반복되는 책인데 작가 본인이 꽤 오랜 시간 동안 겪은 알코올 중독에 대해 촘촘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논픽션이죠. 바닥을 드러내는 솔직한 문체가 충격적이라 몇 년 전에 무척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책을 읽는 동안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집으로 가지 않으려는 친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물론 주변에서 알코올 중독 증세를 겪는 친구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에 대한 오랜 궁금증이 위의 공식을 통해 해소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런 효과를 경험한다면 정말 술을 안 좋아하기란 오히려 힘든 일이 아닐까 하고요. 한때는 평생토록 가지지 못할 즐거움이란 생각이 들어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친구들을 질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즐길 수 있는 만큼만 잘 즐기자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비록 맥주 한 잔 일지라도요.
이번 주 월요일(10월 11일)부터 시드니는 106일간의 긴 록다운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백신 접종률이 70%에 달하자 10월 11일을 'Freedom Day'라 호명하며 그동안 엄격하게 유지했던 여러 가지 규제들을 조금 느슨하게 가져가기로 결정한 거죠. 거주지에서 반경 5km 이내로만 이동이 가능했고 필수 업종 이외에는 재택근무를 권장하며 회사로 출퇴근 시에는 일주일에 2번씩 코로나 테스트를 해야만 했던 친구들의 일상에도 조금 느긋함이 깃들기를 바라봅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포장과 배달만을 했던 레스토랑과 영업을 중단해야 했던 펍도 이번 주엔 오랜만에 문을 활짝 열고 록다운으로 지친 사람들을 맞이하겠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늘은 모처럼 금요일이니 시드니에 있는 친구들에게 록다운 해제를 축하하며 건배를 제안해봅니다. "To celebrate Freedom Day. Cheers~!" 이런 날에는 마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