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과일
생 블루베리를 처음으로 먹어본 날을 기억합니다. 생 블루베리를 먹은 게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줄곧 냉동으로만 접해온 과일을 냉동식품 코너가 아니라 과일코너에서 보게 된 건 서른 살이 넘은 제게도 꽤 신선한 경험이었기 때문이죠. 그동안 종종 냉동 블루베리를 우유와 함께 믹서기에 갈아먹긴 했지만 오랫동안 그게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블루베리를 생으로 먹는다는 것 자체가 제겐 조금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뭐야.. 블루베리는 냉동만 있는 거 아니었어?라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로요. 마트 과일 코너에서 처음으로 작고 아담한 패키지에 담긴 블루베리를 발견하곤 호기심이 일었고 요거트에 넣어서 먹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2불 50센트짜리 블루베리를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깜짝 놀랄 만큼 달고 풍부한 과즙을 자랑하는 과일은 아니었지만 냉동 제품에선 느끼지 못했던 생 과일 특유의 신선함과 식감에 눈이 절로 떠지는 기분이었죠. 입안에서 툭 하고 터지는 맛이 좋았고 천천히 먹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씨앗을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어 먹는 게 재밌었습니다. 먹고 나면 혓바닥이 까맣게 물드는 건 냉동이나 생 블루베리나 큰 차이가 없었지만요.
블루베리뿐만 아니라 대형 마트에 가면 그동안 한국에선 쉽게 보지 못했던 과일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이 다르고 그에 따라 환경도 기후도 다르다 보니 계절마다 나는 과일도 그중 맛이 좋은 과일도 제가 알고 있던 범위를 쉽게 벗어나곤 했습니다. 요 몇 년 사이 이제는 한국에서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과일을 좀 더 쉽고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계절마다 새로운 과일을 구경하는 것에 재미를 들려 마냥 신나는 마음으로 마트 청과 코너를 둘러보곤 했습니다. 서양배, 라즈베리, 블랙베리, 패션 프룻 같은 과일들을 조금씩 사서 맛 본 뒤 입에 맞는 과일 목록을 추리기도 했고 한국 과일과 맛을 비교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서양배는 작고 모양이 조롱박처럼 귀엽지만 역시 나는 아삭아삭한 한국 배가 더 취향이군. 딸기를 일 년 내내 저렴한 가격에 사 먹을 수 있는 건 좋지만 호주 딸기는 역시 좀 무같지 않은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요.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원래부터 과일을 무척 좋아하고 열심히 챙겨 먹었던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제 손으로 과일을 사 먹기 시작한 건 호주에서 독립생활을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리고 과일을 먹기 시작한 이유는 의외로 '건강'때문이었고요. 때문에 목표는 무척 심플했습니다. <매 끼니 잘 챙겨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몸에 좋은 것도 의식적으로 먹으려고 노력하자>. 친구들은 이럴 때 주로 비타민 같은 것을 챙겨 먹었지만 저는 '과일=건강'이라는 간단하고도 단순한 공식을 떠올렸고 그렇게 이번 주에는 뭘 해 먹지와 함께 이번에는 어떤 과일을 좀 먹어볼까를 고민하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1인 가구이다 보니 양껏 담아도 과일을 담은 장바구니는 생각보다 항상 단출했습니다. 1/6 사이즈로 컷팅된 수박, 오렌지 하나, 망고 두 개, 사과 하나, 이렇게요. 대부분의 과일을 박스나 커다랗고 튼튼한 까만 봉다리 단위로만 사 오시던 엄마가 보셨다면 아마 웃으셨겠지만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제겐 이 정도 양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중에는 친구들과 외식을 하는 날이 잦았고 어쩌다 호기롭게 요리를 시작한 날에는 요리가 완성될 즈음 체력이 다해 과일까지 깎아먹을 기운도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일요일에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냉장고에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수박을 나무 도마 위로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칼을 꺼내 세로로 7번, 가로로 4번씩 양쪽으로 칼집을 내면 빅 사이즈의 깍둑썰기가 완성되죠. 수박을 썰다가 오늘 제대로 수박을 골랐나 궁금한 마음에 가장 중앙에 있는 네모난 조각을 하나 집어 맛을 봅니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아삭한 식감과 함께 혀끝으로 전해지는 단맛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오늘도 성공. 잘 자른 수박은 위쪽부터 커다란 밀폐용기에 담고 용기의 절반 정도를 채우고 나면 다른 컨테이너에 남은 수박을 마저 담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얀 밑면이 보일랑 말랑할 정도로 살뜰하게 한 번 더 바닥을 발라내면 클리어. 가장 거대한 녀석을 해치웠으니 이제는 한숨 고르고 나머지 과일을 소분하기로 합니다.
다음으론 두툼한 껍질 너머로 다디단 단내를 풍기는 망고와 상큼한 향의 오렌지를 꺼냅니다. 준비물은 자그마한 과도. 처음에 내용물은 말랑하지만 껍질은 생각보다 두껍고 맨질맨질한 망고를 어떻게 잘라야 하나 고민에 빠졌는데 몇 번 자르다 보니 요령이 생겨 이제는 익숙한 손동작으로 슥슥 씨앗을 분리하고 껍질을 발라내 먹기 좋게 알맹이만 획득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오렌지는 파인애플 껍질 벗겨내듯 위에서 아래로 몇 차례에 걸쳐 두꺼운 껍질을 제거한 뒤 망고는 하나씩, 오렌지는 절반으로 나눠 용기에 담으면 비로소 세 가지 과일로 가득 찬 두 개의 컨테이너가 완성됩니다. 하나는 도시락용, 나머지 하나는 일주일 동안 집에서 먹을 식후 과일로 일요일 오후면 늘 이렇게 먹을 것들을 미리 소분해두곤 했습니다. 내일, 또 내일로 미루다가 다음 주말이 되어서야 일주일 동안 냉장고에서 방치된 정체불명의 형상을 몇 차례 마주한 뒤에야 생긴 습관이죠.
도시락으로 후식용 과일을 싸가면 무척 인기가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작은 통에 사과를 잘라갔는데 식사를 마치고 동료들과 느긋하게 과일을 한두 개 집어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게 좋았고 그러다 보니 과일을 담는 용기의 크기도, 가짓수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죠. 집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과일까지 챙겨 먹는 건 손이 많이 가고 무척 수고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 약간의 책임감과 보람이 더해지자 오히려 이를 동력으로 주말이면 더욱 즐겁게 과일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소비할 수 있는 과일의 양이 늘어나자 혼자 먹기에는 조금 부담이 됐던 파인애플이나 멜론 같은 과일도 부담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죠. 무엇보다 월요일이면 함께 과일을 먹으며 이번에도 설탕 수박을 골랐다고 아낌없이 칭찬을 퍼붓는, 칭찬 폭격기 같은 친구들이 있기도 했고요. 독립해서 살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방법을 이렇게 하나씩 익혀갔던 것 같습니다.
인기 과일이었던 수박은 일 년 내내 제 장보기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품목이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계절에 나는 과일을 부지런히 섭취했습니다. 겨울에는 7~8불씩 하던 블랙베리가 3불 50으로 반값이 되기도 했고 수박만큼 달고 과즙이 풍부한 멜론도 한 통에 2~3불이면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제철 과일은 맛이 좋았습니다. 이젠 2~3배의 가격을 지불하면 철이 아닌 과일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일의 왕중왕인 제철 과일의 맛은 결코 따라갈 수 없단 걸 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소식이 잠잠하던 과일이 마트 전단지에 등장하거나 매대에 보일 때면 신나는 마음으로 장바구니를 채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 무화과처럼 고개를 빼곰 내밀었다가 서둘러 자취를 감추는 과일이라면 더더욱요.
제게 제철 과일을 먹는다는 건 삶을 부지런히 가꾸고 꾸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일은 1인 가구의 필살기인 냉동 보관이 용이하지 않고 특히 여름철엔 냉장실에 넣어도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한 내에 구입한 과일을 모두 소비하려면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계절에 나는 과일만 부지런히 챙겨 먹어도 한 계절이 훅- 하고 지나있기도 합니다. 올여름 내내 딱복, 황도, 백도 같은 온갖 복숭아를 열심히 먹다보니 어느덧 가을이 훌쩍하고 코앞으로 다가온 것처럼요. 이쯤 되면 제철 과일의 꽃말은 '부지런함'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부지런한 새가 제철 과일도 많이 먹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