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기

공연

by Ronald

처음부터 시드니에서 그렇게 오래 지낼 거라고 계획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면접 당시엔 스스로를 시드니에 평생 뼈를 묻을 사람처럼 묘사하긴 했지만 속마음은 '일단 어찌 됐건 2년은 버텨보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해외 생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큰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의 생활이 익숙한 곳에서 했던 것보다 쉬울 리 없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한 편으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부분이 있을지라도 해외 취업은 분명 좋은 기회였고 2년 정도라면 커리어적으로도 도움이 될 테니까 라고, 최대한 가벼운 생각으로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시드니로 이주하며 가장 우선시했던 건 당연히 새로운 회사와 업무에 신속히 적응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특히 생활하는 데 있어선, 하루라도 빨리 이 나라에 정을 붙이려면 숨구멍을 한두 개쯤은 터놔야 한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해낸 건 부지런히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에 가는 건 한국에 있을 때부터 가장 열심히 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는데 호주는 영어권 국가이기도 하고 영연방에 속했으니 아무래도 좀처럼 내한하지 않았던 영국 가수나 유명 아티스트들이 많이 찾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제 예상은 적중했죠.


당시 출퇴근 길에 즐겨 듣던 가수 중 Lorde라는 뉴질랜드 출신 싱어송라이터가 있었는데 마침 시드니로 투어를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무대를 장악하는 그녀의 라이브를 유튜브에서 본 이후로 '어머, 이건 무조건 가야 해!'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저는 함께 갈 친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음악을 즐겨 듣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참석할 것 같은 S에게 출근길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가끔 퇴근 후 술자리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먼저 연락해서 어디에 가자고 한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안 있어 S에게 "Yes!"라는 답장이 왔고 저도 덩달아 마음속으로 '예스 예스!'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S와 단짝 E까지 셋이 Lorde의 콘서트를 다녀왔고 이를 시발점으로 본격적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선 휴가나 결혼식, 레스토랑 등 뭐든 미리미리 예약하는 시스템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때문에 규모가 크고 인기가 많은 공연일수록 무척 먼 미래로 공연 날짜가 확정되었고 예매도 일찍 시작되곤 했습니다. 팬덤이 두터운 가수일수록 빡빡한 스케줄로 인해 연 단위의 스케줄이 잡힐 테고 그렇다면 공연일 약 일 년 전부터 티켓팅이 시작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 그래도 일 년은 좀 너무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틈틈이 공연 사이트에 들어가서 일정을 확인하고 부지런히 티켓팅을 해뒀더니 예매해둔 걸 잊을 만하면 6개월 전에 예약해놓은 뮤지컬이, 1년 전에 끊어놓은 공연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있었습니다. 회사 일이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을 때나 향수병이 도질 즈음이면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과거의 내가 진통제를 미리 처방이라도 해둔 것처럼 말이에요. 이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더욱 부지런히 공연을 다녔습니다. 일 년에 한 아티스트의 공연을 두 번씩 가기도 했고 만족도가 조금 낮을지라도 안 가는 것보다 가는 게 조금이라도 즐겁겠다 싶으면 무조건 가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미래의 나를 돌볼 수 있는 건 역시 과거의 나뿐이니까요.


공연 티켓은 주로 Ticketek 사이트를 통해 예약했습니다.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을 제외하면 호주는 대부분 개별 좌석이 아닌 구역별로 예매가 이루어졌는데(구역 예약을 완료하면 해당 구역 내 좌석이 확정되는 식) 인터파크에서 기초를 다진 티켓팅의 민족이다 보니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그들의 시스템 체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Adele이나 Madonna, Coldplay 같은 대형 가수들의 콘서트도 항상 어렵지 않게 예매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매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만큼 경쟁이 치열하지 않기도 했고요.


한 번은 Taylor Swift의 공연을 예매했다가 제가 테일러의 노래를 그리 많이 알고 있진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베이에 티켓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 제가 예매해놓은 Floor석은 매진된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티켓을 올리자마자 엄청난 양의 쪽지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발 자신에게 티켓을 팔아달라고요. 그런데 사연을 읽다 보니 쪽지를 보낸 발신인은 대부분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팬인 딸을 둔 엄마 혹은 아빠였습니다. '시드니 엄빠들은 딸들의 팬질에 이렇게나 협조적이라니..!'라며 무릎을 쳤죠.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자녀들과 함께 콘서트에 가는 보호자들이 꽤 많다는 점이었어요. 어릴 적 모부의 손을 잡고 콘서트를 가본 기억이 없었던 제겐 쪽지에 쓰여있던 'with my daughter(딸과 함께)'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 여러 공연을 다니며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무척이나 많이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Adele이 영화 <007 Skyfall>의 오프닝이었던 [Skyfall]을 눈앞에서 부르던 순간이나 Ed Sheeran의 콘서트에 Elton John이 깜짝 출연했던 일, 무대 위에서 여전히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던 Madonna, 공연 내내 악동미를 감추지 않았던 Miley Cyrus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요.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공연장 바깥의 풍경들을 구경하는 것도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차량이 동시간대에 한꺼번에 몰려 엄청난 정체 현상이 벌어지던 Victoria Rd의 풍경이나 한껏 멋을 부린 채 다 같이 우르르 공연장으로 향하던 학생들, 공연 시작 전 캐리어에 맥주잔을 가득 채워 황급히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공연장 앞에서 가족, 애인 혹은 친구를 픽업하려고 늘어서 있는 승용차의 행렬까지도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Katy Perry의 공연 날, 다정하게 공연장으로 향하던 모녀 커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갔던 공연 중 유독 팬 연령층이 낮았던 탓인지 그날은 보편적인 시드니 콘서트장의 풍경이라 느껴질 정도로 모녀 커플의 비중이 높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그때 Taylor Swift의 티켓을 팔아달라고 나한테 쪽지를 보낸 사람은 아니겠지..? 아니면 저쪽에 저 엄마인가?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괜스레 흐뭇해져 그날은 유독 천천히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예매하고 먼 미래를 손꼽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새 공연 날이 다가오고 더불어 공연장의 이런저런 풍경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평생까진 아니어도 5년이란 시간을 시드니에서 그럭저럭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곳에서든 낯선 곳에서든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시간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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