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
업무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여 10 포인트 정도가 모인 날이면 저와 S는 오락실에 가곤 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장 최적의 동선인 쇼핑센터 옥상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오락실로 향할 때면 회사에선 무겁기만 했던 발걸음이 어느새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락실 입구에 설치된 기계에 게임 카드를 긁어 밸런스를 확인하고 나면 저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장 한 구석에 위치한 아케이드 게임 <쥬라기 공원>으로 향했는데 의자 구석에 각자의 클러치를 놓고 S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기계 위로 올려놓는 무언의 준비를 마치면 저는 비장한 마음으로 카드를 긁었죠. 한 판에 1불 20센트, 두 명이니까 2불 40센트가 카드에서 차감되었다는 문구가 스크린 위로 뜨면 "뚜둗! 뚜두둗ㄷ-"하고 슈팅 게임 특유의 요란하고도 시원한 소리를 내며 스타트 버튼을 눌러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 게임은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모티브를 따온 아케이드 슈팅 게임입니다. 영화의 설정과 같이 테마파크 쥬라기 공원에 갇힌 인간들이 폭주한 공룡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섬을 탈출하는 것을 미션으로 하는 게임입니다. 앙증맞은 사이즈를 자랑하지만 영리하고 성질이 사나운 콤프소그나투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익룡 프테라노돈, 그리고 둘리 엄마로 친숙한 브라키오 사우르스가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나 저희에게 공격을 가하면 들고 있는 기관총 혹은 수류탄으로 녀석들을 하나씩 해치워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죠. 각 라운드의 끝판왕으로는 티라노 사우루스나 티렉스가 등장했는데 단 한 번의 삑사리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했습니다. 초반에는 티라노의 발톱 한 번 건드려보지 못한 채 어이없이 게임이 종료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30불이나 충전해놓은 카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저희와 함께 빠른 속도로 $0에 수렴하기 일쑤였죠.
다행히도 게임에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더해질수록 저희의 실력도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팀워크는커녕 각자 살아남기 바빠 허공에 총알을 허비하던 영겁의 시간을 무던히 견뎌낸 대가였을까요. 어느덧 각자 일 인분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내기 시작했고 결국엔 11시 방향에 익룡, 다섯 발자국 앞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수류탄 던지기와 같은 저희 둘만의 매뉴얼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주로 기관총을 업그레이드해 눈앞에 있는 목표물을 집중 공격하는 전략을 택했고 순발력이 좋은 S는 깜짝 등장하는 공룡들에게 재빨리 수류탄으로 맞섰습니다. 한 스테이지도 채 완료하지 못하던 저희는 어느새 하나 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한 번도 이어하지 않고(=죽지 않고) 티렉스를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끝판왕을 물리친 날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헐!"하고 작은 탄식을 뱉어낸 뒤 저희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2불 40센트의 행복이었죠.
쇼핑몰 꼭대기층에 자리 잡은 넓디넓은 오락실에는 <쥬라기 공원>뿐만 아니라 익숙하거나 혹은 처음 보는 다양한 오락거리들이 즐비했습니다. <쥬라기 공원>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고 나면 저희는 Medal game 혹은 Coin pusher라고 불리는 게임으로 자리를 옮겨 두 번째 라운드를 맞았습니다.
이 게임은 좌우로 움직이는 발사대에 게임 코인을 장착한 뒤 제법 많은 코인이 쌓여있어 곧 무너져 내릴 듯한 장소를 집중 공략해 코인 벼락을 맞거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높은 포인트의 카드를 밀어서 떨어뜨리는 게임입니다. 코인 혹은 카드에는 일정한 포인트가 부여되는데 이걸 착실히 모으면 막대 사탕 하나부터 가전제품까지 교환이 가능해 은은하게 도전 심리를 자극하는 게임이죠. X Box 같은 콘솔 게임기는 너무 많은 포인트 점수가 필요해 애초에 엄두도 못 냈지만 그보단 오히려 '저길 딱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떨어질 것 같은데...' 같은 묘한 승부욕이 의자에 앉은 저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십시일반으로 포인트 카드를 모은 덕분에 결국엔 크롬캐스트를 득템 할 수 있었고 거실에 아이맥을 놓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TV와 크롬캐스트가 만나니 신세계가 펼쳐지더군요. 애초에 게임할 돈으로 크롬캐스트를 샀으면 되지 않냐고 하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즐겁게 게임도 하고 크롬캐스트도 땄으니 이 정도면 일석이조 아닌가요.
그밖에도 농구 게임, 인형 뽑기와 같은 고전 게임을 꽤 열심히 했는데 그중 원픽은 단연 두더지 잡기 게임이었습니다. 그날 회사에서 장시간 미팅이 있었고 매니저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린 날이면 유독 열심히 두더지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언제나 게임 막판이 되면 어깨에 힘이 스르륵 빠졌지만 얄미울 정도로 부지런히 얼굴을 내미는 두더지들을 게임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열심히 때려잡았습니다. 두더지 게임의 특징은 생각보다 스코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게임 전후로 얼마나 기분이 나아졌느냐가 중요할 뿐이죠.
짧게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30분 길게는 1시간 정도를 매주 오락실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이렇게 열심히, 그것도 주기적으로 오락실에 다닐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쇼핑 데이인 목요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상점이 5시쯤 문을 닫는 시드니에서 이만한 오락거리가 없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아지트 같은 공간을 늘 선망하곤 했는데 아지트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개방되었고, 또 넓기까지 하지만 이 정도면 시드니의 아지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준비물은 단돈 2불 40 센트면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