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는 주문

모닝커피

by Ronald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기 시작한 단어는 아무래도 '모닝커피'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 아침, 사원증을 목에 걸고 회사 앞에 위치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동경해왔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 마시기 시작했지만 마시다 보니 왜 그렇게 사람들이 아침부터 커피를 찾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에 한 잔씩 마시던 커피는 어느새 하루에 두 잔, 세 잔으로 늘어났고 어느덧 저는 의식적으로 물을 챙겨 마시진 않지만 매일 일정량의 커피는 꼬박꼬박 마시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죠.


회사 근처엔 모닝커피를 살 수 있는 카페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조금 멀지만 커피 맛이 좋은 곳과 회사 가는 길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지만 커피 맛은 무난한 가게, 이렇게 두 곳이요. 출근길에 혼자 카페에 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종종 전날 밤, 미리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약속 시간은 8시 20분. 카페에서 회사까진 차로 5분밖에 안 되는 거리여서 출근 시간인 9시까진 꽤 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카페에 도착해서 줄을 서고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면 30분, 회사까지 운전해서 지하 주차장에 파킹을 한 뒤 사무실로 올라오면 보통은 8시 40분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그날 유독 손님이 많아 주문한 커피가 늦게 나올 경우를 감안하면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은 시간이죠. 사실 저도 이런 디테일까지 알고 싶진 않았는데 처음에는 8시 35분쯤 느긋하게 카페에 도착했다가 아슬아슬하게 지각 위기를 몇 차례 넘긴 뒤, 그 후에는 자연스레 8시 20분을 타깃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호주 카페는 일찍 열고 또 일찍 문을 닫습니다. 대형 쇼핑몰에 입점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 정도까지 영업을 하는 곳이 많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스케줄에 맞춰 카페는 그보다 더 일찍 손님 맞을 단장을 하고 오전 6시부터 영업을 시작합니다. 아침 일찍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운 진한 커피 향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출근하기 전에 커피를 사 가려는 사람들로 좁은 매장은 이내 복작거리고 저도 한 손에는 핸드폰, 다른 한 손에는 신용카드를 쥔 채 줄의 맨 끝에 서서 제 순서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대기하는 줄이 길어질수록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건네는 스태프의 손은 분주해집니다.


마침내 제 차례가 되면 스태프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주문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여기서 '제스처'란 제 눈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안부를 묻는 호주 문화도 적응이 안 됐지만 사실 그보다도 낯설었던 건 이야기를 할 때 꼭 상대방과 눈을 맞춘다는 점이었습니다. 귀로는 주문을 듣지만 눈으로는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스태프와 손님은 손님대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주문을 외듯 재빨리 오더 하는 시스템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죠. 처음 몇 달 간은 이런 문화가 무척 어색했지만 어느 순간 상대방이 안부를 물으면 가볍게 "Good, thanks."라는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인사를 건네고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같은 대화를 나누면 그제야 커피를 주문할 차례가 되는 거죠. 얼굴을 마주한 채 먼저 인사를 하고 자연스레 안부를 나누는 풍경. 아침의 카페가 유독 활기차고 생기 있는 공간으로 기억되는 건 어쩌면 이런 영향이 큰지도 모르겠습니다.


"One large latte. No sugar."

막상 주문은 매우 짧고 간결하게 끝납니다. 아이스커피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뜨거운 커피가 기본값이기 때문에 따로 'Hot'을 붙이진 않지만 대신 설탕 유무는 꼭 물어보기 때문에 주문할 때 미리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드니는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갈 정도로 춥진 않지만 대신 뼈를 애리는 추위가 있고(아마 한국의 온돌 같은 뜨끈뜨끈한 난방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춥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여름에도 아침, 저녁으론 꽤 선선하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따뜻한 커피가 제격인 날씨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아이스 메뉴가 없는 게 조금 의아했는데 이후에는 사계절 내내 따뜻한 라떼를 마시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받아 든 테이크 아웃 컵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의외로 커피 맛도 향도 아닌 온도입니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면 그래서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컵을 감싸게 되죠. 손바닥으로 온기가 충분히 전해지면 커피를 한 모금 마셔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커피의 첫 모금이 너무 맛있어서 매번 충격에 휩싸이게 되죠. 음식을 먹을 때도 처음 한 입이 가장 맛있는 것처럼 저는 커피도 첫 모금을 가장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느 정도냐면 저도 모르게 '아.. 좋네..'라고 혼잣말을 할 정도로요. 위쪽의 우유 거품과 함께 입안으로 들어오는 진하고 풍부한 라떼를 한 모금 마시면 순식간에 온몸이 데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아침이라 가라앉았던 기분도 한껏 상승하는 효과를 경험하게 되죠. 오후에 있는 중요한 미팅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들고 그렇게 한 모금, 두 모금을 마시다 보면 저도 모르게 뭐.. 괜찮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오후 시간을 전부 잡아먹는 긴 미팅이 될 수도 있지만 앉아있다 보면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갈 테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서 어느새 미팅도 끝나 있겠지 하면서요. 제 마음 상태와 관계없이 시간은 항상 같은 속도로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단 사실이 때로는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한 날은 카페 반대편에 위치한 회사까지 천천히 걸어갑니다. 시원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들고 한적한 거리를 일정한 보폭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도 합니다. 회사가 모여있는 지역이다 보니 주변에는 커다란 회사 건물 밖에 없어서 조금 건조해 보이기도 하지만 도로를 따라 오랜 세월 동안 한 자리에 있었을 법한 커다란 나무들과 낯선 생김새를 한 식물들을 보다 보면 한없이 평화로운 아침처럼 느껴지도 하죠. 큰 언덕이 없고 길이 고르게 나있다 보니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며 걷기에는 꽤 좋은 산책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커피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커피를 마시며 걷는 동안 사실상 바뀐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또 하루를 보낼 에너지가 이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침에 조금 서둘러서 카페에 들르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요. 하루를 시작하는 주문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전 04화설거지의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