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의 정의

설거지

by Ronald

제게는 대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좋은 습관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건 식후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습관입니다.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이제 좀 한숨 돌리며 쉬고 싶단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바로 이때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순간이죠. 이 기세를 몰아 한바탕 설거지를 해치우고 가뿐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느냐 아니면 일단 설거지를 뒤로 미루고 먼저 쉬느냐.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선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팽팽하게 의견이 맞섭니다. 처음에는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설거지를 쌓아놓기 일쑤였지만 독립한 후에는 약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 바로 치우는 것이 서서히 몸에 배었습니다. 사실 시작은 자의였다기 보단 타의에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우스 메이트들과 함께 셰어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시드니에서 제가 처음으로 택한 주거 방식은 셰어 하우스였습니다. 각자의 방을 사용하되 거실과 주방, 화장실 같은 공용 구역은 함께 사용하는 주거 방식이죠. 정착 초기에는 오래 살 만한 셰어 하우스를 찾느라 몇 차례 이사를 거쳤고 마침내 느긋한 하우스 메이트가 있고 하우스 룰이 비교적 제 생활 방식과 잘 맞아떨어졌던 22호에서 꽤 오랫동안 셰어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생활 방식 중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셰어 하우스 생활은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전까지 한평생을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저는 제가 부지런히 집안을 돌아다니며 만들어낸 일거리를 모부가 조용히 뒤에서 감당해주고 계셨단 사실을 이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저절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고 어제까지 얼굴도 모르던 타인과 갑자기 한 지붕 아래 산다고 생각하니 처음에는 꽤 긴장을 해서 집안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습니다. 설거지도 그중에 하나였고요.


당시 셰어 하우스에는 저를 포함해 총 3명이 살았는데 집에 머무는 시간대가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한 명은 주로 저녁에 근무하는 까닭에 생활 시간대가 저와는 정 반대였고 주로 집에 상주하던 G는 저희 둘이 없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그래서 출근 전 준비 시간이 다른 사람과 겹친다거나 출근 후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이 겹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출근 준비를 하다가 시간이 촉박해지면 "미안! 다녀와서 설거지할게!"라고 G에게 이야기했지만 귀가 후 설거지를 하기 위해 키친으로 들어서면 개수대는 항상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죠. 집에 머무는 사람에겐 하루 종일 설거지가 쌓여 있는 것을 보는 것도 고역일 테고 어쩌면 제가 사용한 접시나 프라이팬을 다른 사람이 사용해야 할 경우도 있겠단 생각에 그 이후에는 식사 후 바로바로 설거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은 마음이 컸지만 막상 해보니 처음에 습관으로 들이는 게 어려울 뿐 신경 쓸게 없어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요.


이런 습관을 비교적 빨리 들일 수 있었던 건 제가 여러 가지 집안일 중 설거지를 좋아한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필요 없이 한 자리에서 부지런히 손만 움직이면 된다는 점에서 일단 체력적으로 덜 힘이 들었고 개수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설거지 거리가 바닥을 보이고 깨끗하게 닦인 그릇과 접시들이 건조대 위에 차곡차곡 쌓인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요리, 빨래, 청소와 같은 집안일 중 특히 설거지가 인기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저는 주로 라디오를 틀거나 음악을 듣습니다. 한때 팟캐스트에 빠져 있던 때는 새로 업데이트된 에피소드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물소리가 크고 설거지를 하다가 중간중간 딴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아 팟캐스트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는 걸 안 이후로는 그저 좋아하는 노동요를 크게 틀어놓곤 합니다. 어쩌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라도 나오면 흥이 나서 설거지를 하던 손놀림이 더욱 분주해지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집안일 중 최고는 역시 설거지야' 같은 엉뚱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죠.


설거지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하우스 메이트들과의 생활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내린 설거지의 정의는 수세미에 일정량의 세제를 덜어내고 거품을 내서 그릇과 접시를 깨끗하게 닦고 건조대에 쌓아두는 것을 의미했는데 하우스 메이트인 G는 설거지를 조금 다르게 정의했습니다. G는 제가 했던 과정 플러스, 건조대에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물기가 완전히 제거된 그릇과 접시들을 찬장에 넣는 것으로 설거지를 마무리했습니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을 때는 마른 수건으로 커다란 접시를 스윽스윽 닦아 찬장에 넣었고 이렇게 부지런한 G 덕분에 싱크대 옆 건조대에는 항상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22호의 기본값이었습니다. 설거지를 각각 다르게 정의하는 사람들이 만나 함께 생활하는 것이 셰어 하우스 생활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죠.


가끔 주말에 도시락을 싸기 위해 대량의 요리를 하다 보면 일인 가구라고 하기엔 꽤 엄청난 양의 설거지 거리가 쌓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땐 식기 세척기가 정답이죠. 하지만 평소에는 양이 얼마 되지 않고 별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는 게 좋아 재빨리 설거지를 해치우곤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쌓여있는 그릇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다 보면 머릿속에 둥둥 떠있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한 번에 정리되기도 했고 오랫동안 꺼져 있던 전구 스위치를 누가 '딸칵'하고 누르기라도 한 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기 때문이죠. 누가 그랬죠.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 순간은 산책, 샤워,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라고요.


늦여름의 오후 7시는 설거지를 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여름 내내 늦은 시간까지 주위를 환하게 비추던 태양의 길이도 서서히 짧아져 7시쯤이면 서쪽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황금빛에 가까운 진한 빛이 각도를 달리하며 집안 깊숙이까지 들어옵니다. 익숙한 동네 풍경 위로 황금빛 물결이 한 차례 덧입혀질 때면 설거지를 하는 손놀림도 조금 느긋해지죠. 주말 동안 해야 할 빨래, 청소, 장보기 등을 모두 마쳤으니 한주를 잘 마무리했다는 의미로 잠깐 설거지를 멈추고 창밖으로 펼쳐진 노을 극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합니다. 해가 질 무렵의 5분은 때론 붉게 때론 보랏빛으로, 시시각각 하늘의 풍경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시간이다 보니 어지간한 영화 클라이맥스 못지않게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굉장한 하늘을 만난 날에는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핸드폰을 들기도 하죠. 찰칵.


설거지를 마친 키친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개수대 옆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건조대가 보이고 사용한 접시와 그릇들은 모두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있죠. 4년 동안 부지런한 하우스 메이트들과 함께 살다 보니 없던 살림력도 생기는 매직을 경험하게 되었고 깔끔하게 정리된 키친을 바라보는 쾌감을 알아버린 탓에 이제 제가 예전처럼 설거지를 미룰 확률은 아무래도 낮아 보입니다. 처음 버릇을 만드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다행스럽게도, 그걸 유지하는 건 생각만큼 많은 품이 들지 않으니까요.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