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놀기

도서관

by Ronald

"사락사락"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려올 뿐 실내에는 정적이 감돕니다. 가끔 옆자리에 앉은 동행과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눈앞에 놓인 갖가지 소지품을 정리하는 부산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그곳은 커다란 음악소리도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도 자취를 감춘 침묵의 공간이죠. 커다란 테이블 앞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부지런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거나 800ml짜리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기도 하고 한 손으로 머리에 손을 댄 채 골똘한 얼굴로 리포트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가게 몇 개와 대형 마트의 진입로이기도 한 4차선 도로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주말을 맞아 장을 보기 위해 마트로 향하는 차량들 때문에 끊임없이 차들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별생각 없이 지켜봅니다. 그렇게 한참을 빈둥거리다가 이제 좀 됐다 싶으면 아침에 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읽고 있던 책으로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일요일 오전 11시 23분, 세상 어느 곳 보다 느긋하고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동네 도서관의 풍경입니다.


시드니에 사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도서관에 갔습니다. 주로 토요일에 외출을 하고 그다음 날인 일요일엔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은 채 빨래, 청소와 같은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는 게 일상의 루틴이었죠. 한 주를 또 무사히 보내기 위해선 주중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지런히 집을 정리해놔야 했고 그래서 주말엔 최대한 여러 개의 태엽들을 끼릭끼릭 맞춰 제자리로 돌려놓기 바빴습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들을 오전에 해치운 뒤 휴식을 취하는 방법으론 멍 때리기, TV 보기, 게임하기 등등이 있지만 저는 무엇보다 도서관에 앉아 시간 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노트북을 가져가서 웹 서핑을 하다가 자연스레 온라인 쇼핑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이따금씩 핸드폰을 확인하고 중간중간 책을 읽는 등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와 특별히 다른 것을 하진 않았지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개방되고 조용한 곳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게 조금 더 기분 좋았고 심지어 효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드니에선 지역마다 작지 않은 규모의 도서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동네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에 도서관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책을 대출하고 자연스레 그 아래 위치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이 가능했죠. 동네에 있던 도서관을 처음 방문한 날이나 그 이유 같은 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주말에 대형 마트로 일주일치 장을 보러 갔다가 층별 안내도를 보고 같은 건물 1층에 도서관이 있단 걸 알게 되었고 그럼 어디 한번 둘러보기나 할까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스르륵-하고 부드럽게 열리는 자동문을 지나 들어선 동네 도서관은 생각 이상으로 규모가 컸고 수많은 장서와 함께 쾌적함을 갖춘 공간이었습니다. 서가에는 눈높이 정도의 책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전면이 통유리로 된 창가에는 여러 개의 커다란 테이블과 함께 6개의 의자가 놓여 있어 저도 모르게 저기에 앉아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노트북과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시 도서관을 방문한 게 도서관 생활자의 시작이었죠.


동네 도서관에선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 책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주말에 영어 공부라도 조금 해볼까 싶어 좋아하는 작가의 원서를 찾아보다가 한국 책, 중국 책, 일본 책 섹션이 따로 있단 걸 발견했습니다. 호주 전체 인구 중 이민자의 비중이 30% 정도 되다 보니 동양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도서관엔 이렇게 따로 섹션이 마련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국 책이 한국 도서관만큼 다양한 건 아니었지만 일명 베스트셀러인 책들은 생각보다 꽤 구색을 갖추고 있었고 운이 좋으면 인기 작가의 최신작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었죠. 시드니에서 한국 책 코너를 만나게 되자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한국어에 대한 갈증이 살아났고 결국 저는 빠르게 원서 읽기를 포기하고 도서관에 있던 한국 책을 하나 둘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니 얼씨구나 신이 났고 이것만으론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결국 한국 인터넷 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들을 하나둘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주문한 지 3~4일 정도가 지나면 회사로 따끈따끈한 신간이 도착했고 책을 가지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시드니 도서관의 풍경은 한국 카페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대화와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하단 점을 제외하면 말이죠. 대부분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느긋하게 가져온 책을 읽기도 하고 어떤 학생들은 앉아서 그저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대신 엎드려 잠을 자거나 문제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푸는,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풍경을 시드니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평소보다 조금 더 북적이긴 했지만 언제나 어렵지 않게 빈자리를 찾아볼 수 있었고 쾌적한 느낌과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언제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혼자 카페 가는 것을 좋아했던 것처럼 시드니에선 열심히 도서관을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매주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주변에선 꽤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도서관을 가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아, 그래~?"하고 자연스럽게 올라간 말꼬리 뒤에는 아마 '주말에 도서관? 왜 쉬지 않고 주말에 공부를...?' 같은 문장이 생략되었겠죠. 아직까지 도서관이 주는 이미지가 딱딱한 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느지막이 일어나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사들고 11시쯤 도서관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 저를 봤더라면 아마 친구들은 '아하~ 그럼 그렇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비 오는 여름날,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다가 마음에 닿는 구절을 만날 때면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발레 수업을 마친 뒤 아빠 손을 잡고 승용차로 향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나 발레 학원 1층에 위치한 피자 가게에서 1미터짜리 피자를 나르는 직원들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커피 잔으로 손을 뻗어 한 모금 정도 남아있는 커피를 호로록 마신 뒤 서둘러 카페에 가서 차이 라떼 한 잔을 더 사 오곤 했죠. 페이지가 부지런히 넘어갈 때면 모처럼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카페인 섭취가 꾸준히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쯤 되면 확실히 도서관에 가는 건 제게 분명 놀이에 해당했던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서 있는 게 즐겁기도 했고 이 시간이 저에게는 분명 쉬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일로 이사를 가야만 했을 때 회사까지의 거리나 마트까지는 몇 분이 걸리는지, 집 근처에 음식점이나 카페가 얼마나 있는지 와 같은 주변 시설을 검색해보다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는지를 자연스레 체크 리스트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집에서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고, 이 도서관보다는 우리 동네 도서관이 확실히 더 좋은데.. ' 같은 생각을 하다가 결국 지역을 옮기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100% 도서관이 영향이 미친 건 아니었지만 공세권이나 숲세권 같은 신조어가 생겨나는 걸 보면 좋아하는 곳을 곁에 두는 건 분명 사는 곳에 대한 만족감에 높여주기 때문이죠. 공세권이나 숲세권도 좋지만 '도세권'이라고 쓰인 전단지를 보면 저는 조금 솔깃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동네 도서관을 매우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습니다. 시드니에서와는 달리 주로 대출/반납 서비스만을 이용하고 있지만요. 이 글을 쓰면서 코로나가 완화되면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단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마 중요한 업무를 보거나 특별한 일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3~4권의 책을 쌓아놓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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