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거트
시드니에 살기 시작한 뒤로 저는 집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빵과 요거트, 그리고 두유로 구성된 식단이었죠. 계절에 따라서 혹은 그때그때 변하는 취향에 따라 구성에 변화를 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이 세팅을 유지했습니다. 무엇보다 차리기도 먹기도, 그리고 치우기도 편하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적/심적 여유가 없는 아침상으로는 이만한 구성이 없었습니다. 자주 늦잠을 자거나 출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 촌각을 다투며 정신없이 출근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천천히 밥을 안치고 국을 끓여서 그것들을 음미할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이 정도가 적당한 타협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 호주 마트인 Woolworths에 갔다가 유제품 코너에서 약 30여 가지의 요거트를 보고 충격에 휩싸인 기억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여태까지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낯선 브랜드와 색다른 디자인, 커다란 용량, 다양한 맛의 요거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요거트의 천국이었죠.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종류가 많을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한국 마트에서 서양인들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다양한 지역 쌀(그것도 Medium grain만)을 판매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이 풍경이 자연스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인의 주식主食은 파스타, 빵, 요거트 같은 제품들이니 종류도 가격대도 다양할 수밖에요. 그래서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유제품 섹션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3~5개의 선택지가 주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빨리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본 뒤 비교적 쉽게 의사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옵션의 개수가 10가지, 20가지로 늘어나면 너무 많은 선택지에 압도당해 소비자들은 오히려 구매를 망설인다고 합니다.(*) 호기롭게 유제품 코너를 둘러보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흠.. 그래, 좋아. 그런데 도대체 뭘 사야 하지?'라는 물음표가 따라왔기 때문이죠. 그렇게 유제품 코너를 서성이다가 요거트 무더기에서 조심스레 하나를 집어 들어 카트에 넣었습니다. 패키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제품이었죠. 안타깝게도 디자인에 비해 맛은 평이했지만요.
한 가지 다행인 건 취향에 맞지 않는 요거트를 샀다고 해서 큰일이 날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걸 살걸 그랬어! 라며 잘못된 선택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요거트가 비싼 제품이 아니기도 했고요. 이번 주에 산 게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주에는 다른 요거트를 사면 될 일이었습니다. 시간과 품이 드는 일이었지만 지난주에 산 것보다 이번 주에 산 요거트가 더 입맛에 맞을 때면 목적지에 조금 가까워졌단 생각이 들어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습니다. 뭐, 이것도 괜찮긴 하지만 아직 더 탐색해봐도 괜찮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면 또 주저 없이 새로운 제품을 시도하곤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요. '오케이, 넥스트!'
마침내 저는 궁극의 요거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Danone사의 Ultimate Greek Yoghurt (Natural&Sweet)라는 너무 시큼하지도 달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의 제품이었습니다. 베리류와 무척 잘 어울려 계절에 따라 딸기, 블루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를 넣어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농에 정착한 후 제가 요거트 탐색전을 완전히 그만뒀느냐 하면 아뇨, 그럴 리 없죠. 늘 그렇듯 일주일치 장을 보러 마트에 갔는데 유제품 코너에서 처음 보는 요거트를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오예...! 뉴템!' 하며 신나게 집어 들었고 역시나 패키지가 무척 귀여운 제품이었습니다. 그릭과 오가닉이 합체한 제품으로 다소 위험성이 커 보였지만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저는 요거트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이 요거트를 다 먹지 못했습니다. 패키지에 유독 커다랗게 써진 '그릭'을 보고 진즉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시큼한 맛을 자랑하는 순도 100%의 그릭 요거트였고 게다가 오가닉이었으니까요. 역시 <몸에 좋은 건 맛이 없구나>라는 공식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 제품이었습니다. 꾸역꾸역 절반 정도를 겨우 먹어 치우고 은은한 눈빛으로 패키지를 며칠 더 바라보다가 결국 이별을 고했습니다.
제게 독립은 취향에 맞는 것들로 내 주위를 가득 채우는 일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고 그곳에 취향의 가구와 제품을 두고 제가 좋아하는 음식과 식료품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는 행위요. 끊임없는 탐색과 도전으로 이루어진, 어쩌면 실패로 가득한 도전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마트에 있던 30여 개의 요거트를 전부 맛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스무 개 정도를 시도해봤으니까요.
저희 집 냉장고를 열면 제가 좋아하는 수박, 코카콜라, 탄산수, 주스, 두유, 아몬드 우유, 우유, 계란, 그리고 요거트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엔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저에게는 더없이 안정감을 주는 풍경이었죠. 모두 '궁극의'라는 형용사를 붙여도 될 정도로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마침내 찾아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나에게 맞는 것들을 찾아가고 있단 만족감은 낯선 환경 속에서 일상에 버텨낼 수 있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곤 했습니다. 작지만 아늑한, 나만의 우주가 온전히 내 손 안에서 착실히 굴러가고 있다는 만족감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요.
(*) '선택 부담 효과' 혹은 '선택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