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아닌 저곳, 시드니

프롤로그

by Ronald

'새 메일(받은 편지함)이 도착했습니다'라는 알림에 메일함을 클릭하자 Dear, 로 시작하는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실기시험과 면접을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그에 비해 약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회사 대표와의 면접은 얼마나 정신없었는가를 떠올려보자 이 모든 게 과거가 되었단 사실에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면접을 본 다음 날 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도 얼떨떨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Offer Letter를 받게 되자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얼마 후에 시드니로 가겠구나,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일과 함께,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생활이 시작되겠단 사실을요.


"그런데 헤드 오피스가 시드니에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헤드 헌터는 일단 이것부터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단 듯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드니? 호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즉각 대답을 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적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죠. 해외 생활이란 말에 덜컥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게 뉴욕도, 런던도 아닌 시드니란 사실에 조금 안도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휴학을 하고 호주 퀸즐랜드 지역에서 7개월간 워킹 홀리데이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게는 그게 첫 독립생활이었던 셈이죠. 7개월의 워킹 홀리데이가 제게 생각만큼 높은 토익 점수를 가져다 주진 못했지만 일하고, 어학 코스를 수료하고, 여행과 봉사 활동을 하며 스스로 삶을 꾸려나간다는 감각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 덕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호주라는 나라는 제게 꽤 친숙하게 다가왔고요. 서울에서 팍팍한 직장 생활을 하며 종종 호주의 드넓은 하늘과 여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했는데 그걸 다시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온 것이었죠.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헤드헌터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이후 저는 마음속에선, 이미 절반쯤은 시드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구글맵에 회사 주소를 쳐보고 거리뷰를 보며 주변에는 뭐가 있는지를 찾아보며 부담 없이 출퇴근을 할 수 있고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도 좋은 지역은 어디일까를 열심히 탐색했습니다. 마치 여행 가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단계가 가장 신나는 것처럼 이것저것을 검색해보고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안 제 기분은 점점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인사담당자의 말로는 몇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던 취업 비자가 덜컥하고 예상보다 일찍 나오고 말았습니다. 마치 이미 수시에 합격한 고3 수험생처럼 이 기간을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이 달콤한 기간을 늘리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출국을 미루던 저는 어느새 다음 달로 다가온 추석을 가족들과 보내고 호주로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석을 보내고 며칠 후엔 제 생일이 돌아왔지만 그 이상은 날짜를 미룰 수 없었고 그렇게 저는 생일날 호주 시드니 땅을 밟게 되었죠.


생일이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첫 출근날은 그저 정신없이 보낸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월요일 새벽에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으로 마중 나온 인사 담당자를 따라 회사로 갔고 회의실 같은 곳에서 다짜고짜 사진을 찍혔는데 이게 사원증에 쓰일 거라곤 그때는 상상도 못 했죠. 여권 사진보다 못한 사원증 사진을 볼 때마다 오랜 기간 동안 인사담당자를 원망했습니다. 이럴 거면 미리 예고라도 해주던가 하고 툴툴거리면서요. 이후에는 간단한 회사 소개를 듣고 낯선 동네로 가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핸드폰을 개통했습니다. 나라를 이동하니 한국에서 입사할 때 와는 다른 입사 절차를 밟는구나 라고 조금 감탄하며 그저 알려주는 걸 부지런히 따라 하기 바빴습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어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동기와 숙소로 이동하며 그래도 어떻게 하루가 갔다며 근처 마트에 들러 다음날 먹을 아침 거리를 샀습니다. 쇼핑몰 푸드 코트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와서 샤워를 하니 그제야 하루 종일 긴장해 있던 마음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걸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첫 출근을 성공적으로 마친 저 자신을 다독였지요.


많은 기대와 꿈을 안고 떠난 해외 직장 생활은 낯선 곳에서 일 인분의 삶을 착실히 꾸려나간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때론 예상치도 못한 일에 마음이 쪼그라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국으로 휴가를 와서 시드니에서 회사 생활을 한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던 말 중 하나는 "우와, 부럽다. 거기 살기 좋잖아"라는 말이었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저 말을 들으면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었던 것 같습니다. 시드니가 서울에 비해 환경적으로 나은 부분도 있지만 한국에서도 살다 보면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타국에서 산다고 순식간에 없어질 리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 모든 걸 익숙한 모국어가 아니라 외국어로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은 정말 말 그대로 실전이었습니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실수는 온전히 모두 100% 저의 책임이란 걸 의미했죠. 그래서 어이없는 일을 당한 날에는 전 세계 이민자들의 공통 레퍼토리인 '내가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를 저도 모르게 읊조리게 되더군요.


"시드니에서 살기 어때? 이민 가면 어떨까?"

시드니에 사는 동안,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요즘도 종종 주변인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막연한 호기심에서부터 꽤 진지하게 가족 이민을 고려하는 케이스까지 각자 고민의 깊이도 이유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자녀의 교육 문제 같은 구체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단순히 이곳이 아닌 저곳의 삶이 더 좋아 보여서 같은, 손에 잡힐 것 같은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질문의 종류와 구체성에 따라 제 대답은 한없이 길어지기도 무척 짧아지기도 했죠. 물론 해외살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은 아니지만 위험 부담도,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드는 결정이기 때문에 가까운 지인일수록 최대한 현실적인 대답을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선택은 친구들의 몫이겠지만요.


이 글 묶음은 시드니에서 5년간 직장을 다니며 일인가구로 사는 동안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은 가능하면 솔직하고 과장 없이 적으려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조금 달라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해외라는 특이사항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언젠가 진지하게 "시드니 사는 거 어때?"라고 물었던 친구에게 꽤 긴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이건 그때 못다 한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글로 묶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제 막 독립해서 일인가구로서 생활력을 키우고 계신 분들이나 그냥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삶이 궁금하신 분, 혹은 각자 속한 곳에서 소소하게 일상을 꾸려나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에게도 부담 없이 읽힐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라봅니다.




Photo by Jayden S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