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이스터 연휴에 친구들과 여행을 가게 되었다. 사실 작년부터 연휴에 함께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몇 차례 나왔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정말 여러 명이 계속 의견만 낼뿐 도무지 합의점을 찾지 못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급기야 정말로 산(=블루 마운틴)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다행히 블루 마운틴은 가지 않았고 그렇게 여행은 무산되었다.
4월 부활절에 시드니 근교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온 건 올해 초였다. 지난번과 다르게 여행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아직 특별한 계획 없어", "그럴까?" 같은 긍정적인 대화가 오갔고 차로 3~4시간 거리의 포트 맥콰리와 울릉공을 오가다가 1시간 거리의 아발론 비치로 목적지도 금세 정해졌다. 여행 이야기기 나오고 에어비앤비로 숙소 예약을 마치기까지 3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역시 일이 될 때는 또 이렇게 일사천리로 된다더니.
사실 이 멤버로 여행을 가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한국에서 머물렀던 3년 동안, 멤버 변동이 생기기도 했고 연인에서 부부로 관계에 변화가 생긴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사이 늘어난 예산만큼 각자 <이것만은 꼭!> 리스트가 생긴 점도 재밌었다. 이를 테면 화장실은 두 개 이상, 비행기를 안 타도 되는 거리, 연휴 마지막 날은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하루 전날 돌아오기 등이 있었다. 일정만 맞는다면 이것저것 많이 따지지 않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었던 이십 대 후반~삼십 대 초반에, 여러 친구들과 여행을 많이 다녀둬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2박 3일로 일정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숙소를 예약하자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연휴 전에 각자 장 볼 것들을 나누고 출발 시간을 정하는 것으로 여행 준비를 마쳤다. 근교 여행이 좋은 이유는 운전해서 갈 수 있다는 점이고 이 말은 캐리어에 꼼꼼하게 짐을 쌀 필요 없이 느슨한 짐 꾸리기가 가능하단 것을 의미한다. 2박 3일 일정에 원두와 핸드 드립 기구를 챙겨서 친구에게 손절당할 뻔했지만 이 모든 걸 다 넣어도, 자비로운 트렁크에는 공간이 남았다.
체크인이 2시였기 때문에 중간지점에서 한 번 쉬어갈 겸 점심시간을 갖기로 했다. 마침 그 근처에 사는 친구가 있어 합류하기로 했고 그렇게 디와이 비치에 미리 예약해 둔 카페를 찾았다. 메뉴에 오일 파스타가 있어 큰 고민 없이 메뉴를 결정할 수 있었고 얼마 안 있어 친구들이 도착했다. 며칠 전에도 봤지만 무척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온갖 수다가 이어졌다. 테이블 두 개를 붙이자 둘러앉은 인원이 총 일곱 명이었다.
숙소는 정말 사진으로 보던 그대로였다. 내부 공간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고 딱 알맞은 사이즈였는데 대신 야외 테이블과 바베큐 시설이 놓인 데크가 있었고 해먹이 걸린 넓은 뒤뜰이 있어 여러 명이 함께 지내도 답답함을 느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시드니의 4월은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둘째 날에는 연휴를 맞아 본가로 향하는 친구가 있어서 배웅 겸 그 친구가 살던 동네를 구경하겠다며 친구들이 전부 외출을 했다. 그래서 커다란 집에 혼자 남아 밀린 여행 사진을 정리하고 가져간 책을 읽기도 했는데 불현듯 내가 지금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게 신선놀음이라면 사실 나는 굉장히 쉽게 만족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복작복작 일곱 명이 모여 떠들던 어제도 좋았지만 잠깐이나마 혼자 보낸 이 시간이, 이번 여행에서 특별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전의 여행, 그러니까 약 4~5년 전과 달라진 일이라면 그동안 넷플릭스, 그리고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이제는 저녁에 다 같이 티브이 앞에 앉아 한국 영화나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첫째 날에는 마침 며칠 전 넷플릭스에 올라온 영화 [Kill Boksoon]을 다 같이 보았고 다음 날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Beef](a.k.a 성난 사람들)을 연달아 몇 편이나 보았다. 국적불문 함께 보아도 될 K 콘텐츠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당연히) 영어 자막이 지원된다는 점에서 신기하고도 즐거운 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작년에 들른 적 있는 뉴포트 암즈 호텔에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공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랐고 강아지와 함께 온 사람, 커플, 가족 단위의 손님까지 각각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덩달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예전보다 덜 촘촘하게 움직인다는 점, 그리고 모든 일정을 다 같이 함께 하기보단 각자의 스타일과 기분에 따라 여럿이 함께 했다가 가끔은 혼자, 혹은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자연스러운 여행이었고 그래서 편안하고 즐겁게 다녀올 수 있었다.
2박 3일의 여행 후, 예정대로 연휴 마지막 날은 집에서 보냈다. 연휴가 끝나가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과 시간을 잘 보낸 덕에 아쉬움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