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떤 리뷰

계속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영화 [국보]를 관람하고

by Ronald

2026년 첫 영화는 [국보]였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연초까지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슬슬 출국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많은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고 하필 찜해둔 영화는 전부 다 러닝 타임이 3시간 짜리였다. [국보], [하나 그리고 둘], 그리고 [아바타3]까지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잔인한 상영 시간을 자랑했다. 한글 자막, 너무 소중한데 저 중에 뭘 봐야 할까 하다가 결국 작년부터 잊을만하면 은은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국보를 예매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영화가 상영되는 3시간 내내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 나에게 필요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가부키를 소재로 하는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주연이 등장한다. 야쿠자 집안 출신이자 극 중 굴러 들어온 돌을 담당하고 있는 키쿠오와 전통 있는 가부키 명문가의 도련님이자 박힌 돌인 슌스케가 그 주인공이다. 키쿠오에겐 타고난 재능이 있지만 슌스케에겐 명문가의 피가 흐른다. 키쿠오처럼 그 재능을 일찍이 인정받아 제자로 받아들여지는 케이스도 있지만 가부키는 아직까지도 선대의 호칭을 이어받는 습명이 있을 정도로 혈통을 중시하는 문화다. 그래서 높고 단단한 벽이 키쿠오의 앞길을 여러 차례 가로막고, 이야기는 때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상위 1%든 10%든 어떤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안쓰러울 정도로 밀어붙인다. 마치 그 외 다른 것들은 그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영화를 볼 즈음에는 한창 방영 중이던 [흑백 요리사 시즌2]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연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57년 조리 인생을 살아오며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70대 중후반의 후덕죽님이나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요리가 자신의 인생에 훅 하고 들어와서, 그동안 쌓아 놓은 것들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인생의 판을 뒤집은 유명 셰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뭘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작년에 좋아했던 프로그램이나 열심히 덕질을 한 사람들도 모두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콘서트에 갔다가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 빌리 아일리시, 월드 오브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쿄카, 신인감독 김연경의 김연경 감독이 그랬다. 한 분야에서 톱을 달리는 사람들이 본업을 끝내주게 잘하는 걸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도파민이 터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커다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뭐랄까..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최정상의 그들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최소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표가 생겼다.


첫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어쩌다 보니 같은 업계에서 10년 이상 같은 직무를 해오고 있다. 하고 있는 업무는 일 순위로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관심과 재미를 꾸준히 가지고 해올 수 있는 일이었다. 회사를 통해 자아실현 하려고 하지 말아라,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둬야 한다는 말처럼 일 순위가 아니니까 너무 잘하고 싶어서 안달 날 일이 없었고 그렇게 일과 나 사이에 적당히 거리감을 두고 쿨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곤 했다. 물론 회사에선 매일매일 크고 작은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성취감을 느꼈지만 주말이 되면 회사에 대한 스위치를 아쉬움 없이 끌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그 와중에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내왔다는 사실에 만족해 왔다. 그런데 새해에 영화를 보고, 넷플릭스 인기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리고 좋아하는 얼굴들을 떠올리다가 어쩌면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다음 날에는 나의 잼얘 친구 I님을 만나는 날이었다. 동년배인 그와 나는 만나면 주로 근황 업데이트를 나누곤 하는데 이번에는 이게 말로만 듣던 중년의 위기인 건지 평소와 다르게 회사와 일에 대해 한숨을 푹푹 쉬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보통은 한 해가 끝나면 그래도 아쉬움 같은 것이 남기 마련인데 2025년은 I도 나도 회사에서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탓에 웬일로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후련했다고 그래서 어서 새해가 오길 기다렸다고 아니, 이번에는 내가 새해에게로 간다 같은 마음이었다고 비슷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한참 회사 이야기를 하다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근 읽고 있는 책이나 관람한 영화로 대화 주제가 자연스레 넘어갔다. 나는 마침 전날 본 영화 [국보]를 보고 떠오른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일이 그냥 일이 아니라 저렇게 계속 잘하고 싶은 마음은 어떤 걸까요 하고.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문장을 짓고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질투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지만 회사에서 일잘러를 볼 때는 마음에 큰 동요가 없었다. 저 사람은 일을 잘하네 하고 잠깐 생각할 뿐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그걸 잘 해낸다는 건 너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내게 좋아하는 일과 재능이 일치하는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충실히 밥벌이를 하고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우리는 제법 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같은 이야기를 친구와 나누었다.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국보]에서 키쿠오는 결국 인간 국보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던 목표를 성취한 그는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는 사람처럼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기도 하니까. 애초에 정해진 정답 같은 건 정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내가 더 원하는 방향인가와 주어진 선택지 중에 결정을 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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