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2박 3일 가족 여행
드디어 경주 가는 날. 연말-연초 KTX 예매는 평소처럼 한 달 전에 열리지 않고 특정일에 한꺼번에 오픈된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들 정말 이 시기에 여행을 많이 가는 건지 티켓팅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좌석 매진이 빨랐다.
쾌적하고 행복한 가족 여행은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부와 함께 본격적으로 가족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2년 전 부산 여행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강릉이나 속초 대신 운전 시간을 줄여주고 기차 여행의 재미를 더할 수 있는 여행지를 선택하고, 각자의 생활 패턴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도록 방은 따로 잡고, 카페에 앉아 있는 시간(=내가 좋아하는)은 줄이는 대신 좀 더 볼거리 위주의 계획을 짜고, 식당은 가끔 힘을 주되 평소 부담 없는 찾을 수 있는 가격대의 식당을 메인으로 할 것. 이 정도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가족 여행 지침서 Ver. 3 정도 될 것 같다. 앞으로도 내용 수정이 계속될 예정이다.
서울에서 경주는 KTX로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렌트카를 인수받고 시내로 이동하니(경주역에서 시내까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좀 됐다.) 어느덧 3시에 가까워졌고 일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점심으론 황리단길 근처의 칼국수집을 방문했다.
황리단길을 중심으로 둘러볼 수 있는 관광지가 몇 군데 있어서 천마총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연초라곤 했지만 평일이었는데도 경주에 정말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다. 작년 APEC 영향과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여행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납득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경주에서 조금이라도 유명한 곳을 갔다 하면 무조건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야외에 있는 첨성대는 그럴 일이 없었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서 잠깐 숨을 돌리고 노을도 볼 겸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때문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경주에선 서울에 비해 넓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바람이 매섭기도 했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경주 최고의 명소, 미피 스토어에 들렀다. 내 마음속 위시 리스트는 찰보리스빵이었는데 매장에 가니 운 좋게 한정판 멜라니도 있어서 친구 선물용으로 한 마리 데려왔다. 구입하진 않았지만 고혹적인 잿빛 피부를 뽐내는 석굴암 미피에 자꾸만 눈길이 갔고 그렇게 보리스빵 3개와, 멜라니 1개와 쟁취해 왔다.
첫날이기도 하고 많이 걷기도 해서 이날은 낡고 지친 상태로 일찍 숙소로 귀가했다. 그동안 아침밥 고민할 필요 없는 호텔 위주로 다녔는데 그래도 경주에 왔으니 한옥에 묵어보고 싶어 예약한 곳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뜨끈뜨끈한 온돌이 우리를 맞았고 거실에 앉아서 티비 틀어놓고 온돌에 몸을 지지니 이게 겨울의 맛이지 했다.
그리고 밤 열한 시쯤에는 퇴근 후 경주역에 도착하는 오빠를 픽업하러 엄마랑 출동했다. 경주 방문은 처음이어서 그냥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능이 있는 것도 너무 신기했는데 고등학교 이름이 막 신라 고등학교 이래서 대박.. 이러면서 잽싸게 사진 찍었다. 오빠는 가족 여행도 여행이지만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맘 편히 혼자 즐기는 여행이라서 조금 신이 나보였고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야식을 시키고 늦은 시간까지 신나게 수다 떨었다.
숙소가 불국사에서 멀지 않았고 그 근처에 식당이 많아서 아침을 먹으러 이동했다. 경주에서 이런 백반집을 몇 번 방문했는데 기본 메뉴에 생선구이랑 찌개가 포함돼 있어 특히 생선 킬러인 아빠가 좋아하셨다. 평소처럼 생선구이를 말 그대로 아작 내는 아빠는 보며 다른 가족들은 무척 뿌듯해했고.
11시에 신라 금관 관람을 예약을 해둬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국립 경주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대략적인 경주 여행 일정을 짜둔 후에 룰루랄라 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케데헌의 여파로 국현미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관람이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봤는데 (역시나) 신라 금관을 보려면 예약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되었다. 출발 하루 전 날의 일이었다. 어떡케 이럴 수가...
그리하여 경주로 내려가는 KTX에서 나는 부지런히 핸드폰을 새로고침했다. 오히려 일정이 임박하자 취소표가 떴고 무한 새로고침의 늪 속에서 두 장, 그리고 한 장을 더해 총 3장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비극은 우리 가족은 총 네 명이란 사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오빠가 관람을 포기했고 인기가 많은 전시라 예약을 했음에도 한 시간 정도 줄을 서서 들어갔다.
황룡사지 9층 목탑에 잠깐 들른 후 늦은 점심으로는 영양숯불갈비에 갔다. 경주에서 한우하면 손에 꼽히는 집이었는데 과연 부러 찾아갈 만한 집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3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가게에 손님이 적지 않았고, 숯불에 살짝 구운 소고기 한 점을 먹었는데 와.. 그야말로 고기가 입에서 녹더라. 이게 바로 한우의 맛인가 싶었고.
여행 전에 미리 음식점을 검색해 두는 건 대단한 맛집을 방문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보다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곳들을 최대한 미리 걸러내기 위함인데 이 집은 한 입 먹고 가족들 모두 눈이 땡그래져서 먹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흐를 정도였다. 소금구이가 너무 맛있어서 소금만 추가하려다가 그래도 맛은 봐야지 싶어서 양념도 시켰는데 일반 양념 고기처럼 너무 달지 않고 둘 다 맛있었다. 경주는 뭐다? 영양숯불갈비.
이후에는 천년애 찰보리빵과 최영화 황남빵을 구입하기 위해 마치 작전을 펼치듯 둘씩 흩어져서 임무를 수행했다. 전날 실패했던 천년애 찰보리빵은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최영화빵 황리단길점은 도무지 줄이 줄지를 않았다. 결국 본점으로 차를 돌렸고 15분 정도 기다린 후 미션 수행완. 본점이 매장 규모가 커서 빵 나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니 이 글을 보신 분들은 제발 본점으로 가시길.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나이 지긋하신 숙련된 직원분들이 직접 손으로 빵 만드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황리단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영화빵, 경주빵, 보리빵, 하여간 무슨 빵봉지를 하나식 들고 다니는 게 너무 진풍경이었고.
아침에 불국사 근처에서 아침밥 먹고 테이크 아웃 커피를 구입했던 걸 제외하면 오늘 카페에 앉아보지도 못했는데 시간 왜이렇게 잘 가는지... 빵 사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니 어느덧 해질 때가 되어서 동궁과 월지로 향했다. 경주에서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라 주차장에 차 대고 입구로 슬슬 걸어가는데 역시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한 건지 우리 뒤로 계속 사람들이 몰려오는 걸 보고 좀 웃었다. 점점 하늘색이 짙어지더니 얼마 안 있어 조명이 켜졌고 산책하듯 연못을 한 바퀴 도는데 2026년에 처음 만난 보름달이 너무너무였다.
늦은 점심을 먹어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를 수는 없잖아요. 그리하여 저녁은 간단하게 보리밥 정식으로. 이번에 경주에서 찾아간 밥집들 대부분 반찬이 맛있고 푸짐해서 만족스럽게 식사할 수 있었다. 고등어가 노릇노릇 너무 맛있게 구워져서 배부름 이슈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지막까지 고등어를 공략하였습니다.
마지막 아침, 숙소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밥집을 방문해서 순두부 정식을 먹었다. 취향에 따라 얼큰, 청국장, 그리고 나는 흰색 순두부로. 아침이라 슴슴하게 간한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고. 이 날은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오후에 서울로 올라가는 일정이라 이동 동선이 짧은 숙소 근처로 일정을 잡았다.
카페에서 어제 못 떤 수다를 떨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고 그래서 석굴암과 불국사는 약간 쫓기듯 구경을 했다. 석굴암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밈이 있는데 산속 깊숙이 위치한 석굴암을 보러 가는 길에 나랑 오빠는 직장인 모드가 되어 어떻게 여기까지... 그 석공 너무 힘들었겠다.. 이런 대화를 하다가 실제로 석굴암 보고 감탄해서 문화제 무조건 보존해, 문화유산 지켜 절대 지켜 사람이 되었고요.
학창 시절에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만 갔던지라 경주는 처음이었는데 사진으로만 보던 불국사를 드디어 만났다. 약간 산책하듯 궁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서울에서도 경복궁을 한번씩 들르는 편인데 불국사는 경복궁에 비해 여러 곳에서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렇게 자연스럽게 마모되고 색이 바랜 흔적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져 뭉클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후에는 잽싸게 렌트카 반납하고 경주역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급히 김밥만 사들고 플랫폼으로 올라갔더니 얼마 안 있어 서울행 KTX가 역 안으로 들어섰다. 기차에 앉아서 보리떡 먹으며 경주에서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니 두 시간이 훌쩍 가더라.
이제 내가 커서 언니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됐다고, 보다 넓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 [봄밤의 모든 것], 백수린
경주 내려가는 기차에서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을 읽었다. 당시에는 그저 저 문장이 좋아서 사진을 찍어뒀는데 어제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다시 보니 이번 여행의 문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어울리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장은 마치 운명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눈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번 경주 여행은 오빠가 결혼하고, 내가 호주로 온 이후 처음으로 원가족이 함께 한 여행이란 점에서 의미가 컸다. 원가족이 함께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다른 차원의 편안함이 있는데, 이런 시간을 오랜만에 길게 확보해서 여행을 해보니 옛날 생각도 났고 가족 내에서의 역할 변화 같은 것이 느껴져서 세월을 체감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뿌듯했고 한편으론 조금 슬픈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빠가 합류한 후 원가족 완전체로 다닐 때 모부가 진심으로 행복해하시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다음 여행을 또 계획해야지 생각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행은 원래 힘들고 피곤한 게 맞지만 선명한 추억을 남기기에는 또 여행만한 게 없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