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는 커피를 마셨다면 다시 맛있는 카페에 가면 된다

서울 휴가 첫 번째

by Ronald
삼세 세끼와 수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던전밥. 밑줄 긋자.

크리스마스 날, 오랜만에 공항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고 연휴이기도 해서 이미 출국할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가서 공항이 덜 붐비지 않을까 했는데 오산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택스 리펀 줄이 길지 않아서 후딱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긴 비행. 그래도 갈 때는 비교적 시간이 잘 가는 편이라 자다 깨다 책 읽다가 만화책 보다가 노래 듣다가 하니까 시간이 수월하게 갔다. 어쩌다 보니 던전밥은 비행기 안에서의 루틴 같은 게 되어버렸는데 다음 비행에서 이어 읽을 예정이다.


마침내 랜딩을 준비하는데 도착지 현재 기온은 마이너스 7도입니다라고 안내 방송이 나와서 비명 지를 뻔했다. 팀 겨울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격렬한 환영을 바란 건 아닌데 말이죠.



첫 일정은 건강검진으로 시작했다. 무사히 검진을 마치고 향한 곳은 연희동이었는데 근처에 찜해둔 스시집이 있어서 점심시간에 들렀다. 수년간 은행골로 단련된 덕분에 쌀 한 톨 흘리지 않고 접시를 깨끗이 비울 수 있었다. 스시 나오기 전에 내준 차완무시가 맛있었다.



커피가게 동경 연희점

교통이 불편한 연희동을 방문한 목적은 바로 커피가게 동경. 생각보다 아담한 가게였는데 들어서는 순간 어둑하고 아담한 매장에 폭 스며드는 느낌이 좋았다. 원두가 다양하게 구비된 곳이라 드립을 마셔야 하나 순간 고민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인슈페너라는 단어가 튀어나와서 주문완. 아인슈페너는 반칙 같은 메뉴이긴 하지만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졌다. 이 날의 경험이 좋았어서 출국 전에 다시 한 번 동경을 방문해서 원두를 구입했는데 샘플로 받은 약배전 원두가 넘나 취향이었다.


이번 서울 휴가 향수로는 엔리건틀리 도쿄를 챙겨갔다. 그리고 겨울이니까 친구가 얼마 전에 준 조말론 핸드크림도 가져왔는데 원래 좋아하던 향이라 서울 일정 내내 향수와 핸드크림을 번갈아가며 착실히 사용했다. 오랜만에 맡는 블랙베리 향이 너무 좋아서, 오는 길에 면세에서 향수를 지를 뻔했지만 일단 있는 거 착실히 개수를 줄여나가자 싶어 다음을 기약했다. 어른 다 됐다.



연희동에 갔으니 자연스럽게 독립서점 유어마인드에 들렀다. 2026년 달력을 자만추 하러 방문했는데 지난번 속초 동아서점에서 구입 실패한 ooo작가님의 『어떤만화』를 손에 넣었다. 시드니로 돌아온 후 유어마인드가 이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서점의 창문 풍경을 좋아했던지라 이번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연희김밥에서 오참김밥을 포장했다. 커피가게 동경(혹은 매뉴팩트) 갔다가 유어마인드, 그리고 마지막에 연희김밥에서 김밥을 포장해 오는 연희동 코스를 다들 기억하도록 하세요.



궁금한 소설이 있어서 오랜만에 동네 도서관에도 들렀다. 보고 싶은 종이책을 바로 도서관에 가서 빌려볼 수 있고, 그렇게 도서관에 갔다가 신착 도서 코너에서 좋아하던 사진가에 관한 크고 두꺼운 책을 만나고, 책장을 열심히 훑다가 관심이 가는 책을 슥 하고 빌려올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해외 생활을 하며 더욱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상호대차? 그건 도서관의 왕. 도서관의 치트키다.


그렇게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과 비비안 마이어의 전기, 그리고 인터뷰집 『여자가 사랑한 여자들』을 대출해 왔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사진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보모 일을 하면서 정말 아무도 모르게 사진 찍는 일을 그렇게 오래 했다는 도입부에 반해 대출해 왔으나 막상 읽을 시간이 없어서 책만 산책시켜 준 사람이 되어버렸다.


인터뷰이가 많은 인터뷰집은 좋아하는 순으로 읽거나 궁금한 사람만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15차례의 인터뷰 중 처음과 끝이 글 쓰는 여자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페이지를 맨 뒤로 넘겨서 최은영 작가의 인터뷰부터 읽었다.


백수린 작가처럼 주로 디아스포라 소설을 쓰고 해외생활을 한 게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가가 있지만 (내가 알기로) 최은영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어떻게 낯선 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외국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쓸 수 있는지. 그런데 이 인터뷰 집을 통해서 그 의문이 조금 해소되었다. 여행으로 한달살이를 한 경험이나 6개월 정도 유럽 수도원에서 봉사를 한 적이 있다는 인터뷰 내용에서 퍼즐 한 조각이 마침내 자리를 찾아서 가는 느낌이었다. 작년에 그의 단편집을 오랜만에 재독한지라 여러 문장들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해물 칼국수를 먹기 위해 오빠네랑 대부도를 찾은 날. 이번에 휴가 가기 전에 기필코 해산물을 많이 먹고 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는데 전복과 백합, 산낙지까지 푸짐하게 넣어주는 곳이라 부러 찾아간 보람이 있는 곳이었다. 이후에는 경기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베이커리 카페를 찾았다. 귀여운 고양이 라떼 아트를 해주는 곳이었다.



대학 친구들 만난 날. 지난번 휴가 때 출국 이틀 전인가 만났더니 이미 텐션이 살짝 꺾여서 뭔가 괜히 아쉬웠던 게 생각나서 이번에는 오자마자 만나는 걸로 날짜를 잡았다. 연말/연초에 한국 휴가를 온 게 처음이라 우리 이번에 진짜 송년회 한다며 좋아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장소는 안국의 애호락.


조금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연말이라 그런지 관광객들까지 더해져 이미 시내가 복작복작했다. 생각보다 장소가 협소했는데 예약을 하고 가서 편안히 착석할 수 있었다. 5합 보쌈과 새우튀김, 애호박 찌개를 주문했는데 약간 요즘 입맛에 맞게 반찬이 하나하나 맛있고 보쌈과 굴의 조합이 좋아서 친구들의 만족도가 높은 집이었다.



궁이 보고 싶어서 찾은 카페 텅. 왼쪽으로는 창덕궁이 오른쪽 창으로는 남산 타워가 보이는 곳이었다. 먹고 싶었던 학화호도과자 말차 맛을 친구가 가져와서 기뻤고 뭐 좀 먹고 잠깐 앉아서 얘기했을 뿐인데 시간은 왜이렇게 잘 가는지. 이후에는 오랜만에 계동-북촌-삼청동을 산책하듯 구경했다. sns에서 본 마그나라에도 다녀왔다.


왠지 소화제랑 숙취제만 쌓여있을 것 같았던 수산시장 내 약국

크리스피 크림의 우유크림 도넛이 먹고 싶어서 잠깐 롯데 소공점 들렀다가 노량진으로. 정작 한국에 있을 때는 안 가던 더현대나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곳을 휴가 오면 가고 싶어지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래도 휴가는 기대가 크다 보니 평소에는 안 하던 일을 굳이 하게 되는 거 아닐까 나름 합리화를 해본다. 하여간 새로 지어진 이후에 처음 찾은 수산시장. 회랑 해산물이랑 주문 착착하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튀김도 마저 주문한 후에 라면 사리 넣은 해물탕까지 정말 배부르게 먹었다. 씨푸드? 네, 당분간은 괜찮을 거 같아요.



춥다고 집순스 하는 방울이처럼 3일 동안 집에서 요양했다

다음날 오리고기를 먹고 탈이 나서 3일간 몸져누웠다. 연말에 시상식 보면서 피자나 후라이드 치킨 시켜 먹는 게 위시 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게 억울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당장 경주 가족 여행이 코앞이었기 때문에 일단 잘 쉬고 빨리 낫자라는 생각뿐이었다.


31일쯤에는 조금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아서 영화 [주토피아2]를 보러 갔는데 극장에 도착하니 늦은 조조라 그런지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방학 기간이기도 하고 인기가 많은 애니메이션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말을 하는 주디와 닉을 보고 더빙판을 예매했단 걸 그제야 눈치챘고 아직 나 아픈 거 맞네... 하면서 영화는 잘 관람하고 왔다. 이후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좋아해 줘서 뭐 웃픈 에피소드 하나 생겼다 싶었고.


12월 31일에는 이렇게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워서 갑자기 블로그 연말 결산을 벼락치기하듯 업로드했다. 병원에 갔더니 기름지고 매운 거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해서 피자와 오븐 스파게티를 먹진 못했지만.. 그래도 연말결산이라도 하나 올리고 나니 오히려 조금 위안이 되었다.



예전에 찍어둔 사진들. 이젠 추억의 장소로 남겨놓기로 했다.

1월 1일, 새해니까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바깥 커피 마시러 오전부터 망원동으로 향했다. 다른 카페에 비해 이곳은 비교적 일찍 문을 열고 특히 오전에 가면 차분하고 한적한 느낌을 줘서 좋아하는 카페로 꼽곤 했는데 언젠가부터 매장이 조금씩 부산스러워지더니 이 날은 커피가 나왔는데 '어? 이건 맛이 없겠는데?' 생각했고 결국 올해 최초로(1월 1이긴 했다) 커피를 남겨버렸다. 원래는 한 잔을 마시고 리필까지 하던 곳이었고 집에 모카포트를 들인 것도 이 카페에서 마시던 모카포트 라떼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컸다.



행복은 퀜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어서 그대로 2차로 퀜치 가서 만족 카푸치노를 마시고 행복 사람이 되었다. 퀜치에서 카푸치노가 나오는 순간 '아.. 이건 맛있는 커피다'라는 느낌이 왔는데 호주에서 여러 카페들을 찾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커피가 나오기만 해도 이건 맛있는 커피인지 아닌지 대충 감이 온다. 마치 원두 때깔만 봐도 이게 잘 볶아진 원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된 것처럼.


마지막 남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 가져간 소설책을 읽었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분도 혼자 와서 시집을 읽고 있었고 사장님에게 새해 인사를 건네는 단골들 덕에 매장 내에 감도는 따스한 공기가 좋았다.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 어떤가, 그러면 맛있는 카페에 다시 가면 된다. 올해는 툭툭 털고 잘 일어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커피 1.5잔을 마시고 슬슬 배가 고파져서 점심을 먹으러 다시 한강을 건넜다. 점심은 화목 순대국. 손님이 많아서 명동교자처럼 합석이 자연스러운 음식점이라고 들었는데 신정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적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1월 1일에 평일과 다름없이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아서 기분이 약간 묘했는데 이럴 때는 한국이랑 호주랑 반반 섞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맵고 기름진 음식이라 이것 역시 절반 밖에 먹지 못했지만 마치 중국집에서 양파를 주는 것 처럼 대파의 흰 부분을 두껍게 썰어서 쌈장과 내주는 게 신기했다. 컨디션 좋을 때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집이었다.


맛있는 커피도 마셨고 궁금했던 음식점도 가봤으니 이후에는 아쉬움없이 귀가했다. 다음 날은 경주로 가족 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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