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연말결산
2025년은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겠다. 이런 표현은 약간의 과장이 섞인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닫게 해 준 한 해였다.
연초에는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흘렀고 하반기에는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일들을 쫓기듯 해치우다 보니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그럼 올해가 가기 전에 2025 연말결산을 시작해 본다.
올해의 영화 : 서브스턴스
올해는 총 30편의 영화를 보았고 이 중 16편을 극장에서 만났다. 기다리고 있던 작품이 개봉을 하거나 평이 좋은 영화들은 챙겨보려고 했지만 예전만큼 마음에 닿는 영화가 많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쉬운 한 해였다. 예년보다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를 본 비중이 늘었고 세어보니 한국 영화는 딱 두 편을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늦은감이 있지만 올해의 영화로는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를 꼽고 싶다. 마지막, 마지막-1, 마지막-2, 진짜진짜 마지막, 이런 식으로 정말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대단한 영화였다. 엔터 업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큼 노골적이고 신랄하지만 파괴적인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 영화였다.
뒤늦게 본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나중에 극장에서 재개봉하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끄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은 그야말로 고전의 정석 같은 영화였다. 젊은 날의 까뜨린 드뇌브는 충격적이었다.(Positive)
올해의 드라마 : 소년의 시간, 은중과 상연
단 4편의 리미티즈 시리즈로 이렇게 엄청난 인상을 남긴 드라마가 또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한 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생각하는 게 사실은 얼마나 부분적일 수 있는지, 생각에 생각을 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폭군의 셰프]를 재밌게 보던 와중에 속도 조절이 필요해 [은중과 상연]을 시작했는데 이 드라마의 끝을 볼 때까지 연지영 셰프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드라마의 세계가 작디작다 이렇게까지 작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천상연이란 인물에 대해 송혜진 작가의 인터뷰 중 '제가 사랑했던 친구들의 총집합체 같은 인물'이라는 설명을 보고 왜 이 캐릭터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 왜 여러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는지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프로그램 : 신인감독 김연경
이렇게 거슬리는 게 없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배구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어떻게 이 판을 더 키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물을 보는 것 같았다.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방송인으로서도 자신이 가진 재능과 장점을 잘 활용하는 영리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 종료 후 원더독스 선수들의 프로팀 입단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괜히 나까지 뿌듯했다. 시즌 2 어서 가시죠?
올해의 여행 : 길리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행지를 다녀왔고 기대 이상으로 만족도가 큰 여행이었다. 3박 4일 동안 워터 액티비티를 원 없이 하면서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붓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 길리가 압도적으로 좋았던 걸로 봤을 때 앞으로 휴양지 여행에 대한 계획을 어떤 식으로 세워야 좋을지 가닥이 잡혔달까. 시드니에서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여행지이니 앞으로도 종종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책
총 25권의 책을 완독 했다.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재독 했는데 왜 이 작가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 때문인지가 더 명확하게 눈에 들어와서 앞으로도 좋아하는 작가로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상하고 천박하게』에서 김사월 님이 이훤 님에게 보내는 결혼 축하글이 너무너무 좋아서 정말 여러 번 들춰봤다. 가장 빠르게 읽은 책은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였다.
올해의 쓰기 : 소설 수업
처음으로 소설 수업을 들었다. 무려 시드니에서 오프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운이 좋았다. 퇴근하고 시티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만나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말로, 그리고 글자로 옮기는 작업을 두 달 정도 했다. 소설이란 건 어떻게 쓰는 걸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항상 있었는데 잘 이끌어주신 작가님 덕분에 마지막 수업 전에는 단편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쭉 쓰는 사람이고 싶다.
올해의 취미 : 차와 커피
새롭게 무언가를 구입한 게 많이 없는 와중에 티/커피 한정해서는 가짓수를 알음알음 늘린 한 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차이라떼를 내려 마셨고 차선을 들여서 말차 격불을 시작했다. 모카포트가 생겨서 커피 생활에 다채로움이 더해졌다. 꾸준히 시간을 들이는 것, 소비가 지속적인 걸 보면 이제 티/커피를 취미 생활이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의 일
회사가 외부/내부적으로 소란스러워 몸도 마음도 많이 깎여나간 한 해였다.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그 와중에 웃을 일도 제법 있었어서,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년에는 회사 생활이 좀 더 안정되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다.
올해의 사건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집을 구입했다.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고민 끝에 여러 조건에 맞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건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가령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창밖으론 어떤 풍경이 있길 바라는지, 아파트에서 꼭 갖췄으면 하는 편의시설은 무엇인지, 거리상으로 가장 멀리 살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인지 등등이 그랬다.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여러 계약서들을 검토했고 정말 많은 싸인을 한 후에 마침내 변호사에게 세틀먼트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뿌듯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올해의 투자
부동산, 예금, 주식, 레버리지 ETF 등으로 최대한 카테고리를 나눠 분산 투자를 하려고 애썼다. 시장이 좋을 때는 진입 여부만으로도 자산의 증가가 크게 달라지는데 그 타이밍이 언제 올진 사실 아무도 모른다. 올해는 특히 주식 시장이 좋은 한 해였던 것 같고 내년에는 고점에 아쉬움 없이 매도하고 저점에선 두려움 없이 잘 매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해의 공연 : 빌리 아일리시
상반기에는 빌리 아일리시, 하반기에는 레이디 가가 콘서트를 다녀왔다. 둘 다 너무너무 좋았지만 빌리 아일리시는 다음날 한 번 더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올콘 뛰는 팬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달까. 다음에는 망설임 없이 무조건 미리 티켓팅을 하리라 다짐했다.
올해의 팟캐스트 : 밀림의 왕,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구독하고 있는 팟캐스트가 6개 정도 되는데 업로드되는 속도가 듣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새로운 팟캐를 열심히 탐색했다.
[밀림의 왕]은 (다른 팟캐에 비해) 제한적인 주제를 심도 있게 (오타쿠 적으로) 잘 다뤄주고, [큰일여]는 주제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진입장벽이 낮아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뿌리는 같다 보니 두 팟캐를 적당히 잘 섞어가면서 듣고 있다.
항상 한 해를 마무리할 때는 아쉬운 마음도 컸던 것 같은데 올해는 홀가분하게 2025년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서오세요, 붉은 말의 해. 이렇게 2025년을 마무리하고 내가 2026년에게로 간다.